'곰팡이가 피는 곳에 햇빛을 비추라'
'곰팡이가 피는 곳에 햇빛을 비추라'
  • 양승훈
  • 승인 2012.08.1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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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부패와 치부, 교회의 가장 큰 적

지난 여름, 방한 중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이 대구 인근 어느 식당에서 모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무 명이 채 되지 않는 동기들 중에서 여덟 명이 참석했고, 그 중에서 여섯 명은 부부동반으로 참여했습니다. 아직 죽은 사람은 없지만 대학을 졸업한지 34년이 지났으니 교직이 아닌 분야에서 일하던 친구들 중에는 이미 은퇴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제는 은퇴가 자연스런 얘기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살아온 얘기를 하는데 제 옆에 앉은 친구 부인이 제가 예수 믿는 것을 알고 기독교에 대한 얘기들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불교 신자라는 그 부인이 열거하는 얘기들은 새삼 다시 언급한 필요도 없는 기독교인들의 치부였습니다. 그가 얘기하는 비난들은 별로 과장된 것도 없고, 인터넷이나 매스컴에 떠도는 얘기들 중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진 것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만한 내용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기독교가 너무 종교 권력화 되었다고 비난하는 대목에서만 제가 "그것은 불교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고 딴지를 걸었을 뿐 나머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들어준 탓인지 친구 부인은 더 열심히 교회와 기독교인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치부를 '고발'했습니다. 어느 목사가 바람피웠다는 이야기, 교회 재정을 자기 마음대로 유용했다는 이야기, 교회를 세습한 대형교회 이야기, 인도네시아와 일본의 지진 쓰나미의 비참한 현장을 보면서 인정머리 없이 저주했다는 이야기 등등… 늘 듣던 메뉴들이었습니다.

제가 계속 반박하기보다 고개를 끄떡이면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자 한동안 소나기처럼 기독교를 비판하던 그 사람도 별 재미가 없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좀 머쓱한 생각이 들었는지 얘기를 중단하고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우선 하신 말씀이 다 사실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분노하는 것 이상으로 저도 분노하고, 다른 많은 기독교인들도 분노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얘기하신 것들은 기독교가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의 적이며, 인간의 타락한 모습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제도종교로서 기독교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모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 부인이 웃으면서 옆에 앉은 남편에게 이 사람은 좀 고수이니 당신이 얘기를 좀 하라면서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전에도 인터넷이나 매스컴에서 기독교 안티들의 활동들을 많이 접했지만 주변 불신자들로부터 직접 그런 얘기를 이렇게 많이 들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미 다 아는 얘기들이었지만 모임 후에도 그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몇 가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누구든지 악을 행하거나 비호하는 자나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교회의 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교회의 적은 제도교회의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가장 큰 적은 기독교에 적대적인 타종교나 정치세력이 아니라 제도교회의 내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All truth is God's truth)이듯 모든 선은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악은 사탄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패는 숨겨주어야 할 프라이버시가 아니며, 그 자체가 바로 교회의 적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쉬쉬하면서 '우리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며,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서 단호하게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장에서 적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확인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몸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병인지 정확하게 진단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의 질병도 먼저 우리의 적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해야 효과적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 얀 후스는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해 화형 당했다.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언젠가 한기총 해체운동을 하시는 분에게 한 기자가 한기총의 금권선거와 부패를 세속 언론에 폭로하는 것은 기독교의 치부를 폭로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해치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도 교회 세습이나 회계 부정, 지도자들의 스캔들을 교회 바깥에까지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즉 우리 내부의 부패는 조용히, 불신자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우리끼리' 해결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진리 여부가 아니라 제도종교의 틀을 피아구분의 선으로 생각한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자기 백성이라고 덮어두시지 않았던 것이나, 이방민족들의 죄악보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더 엄하게 다루신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만일 교회의 가장 큰 적이 제도교회 내부에 있다면 우리는 전선을 새롭게 획정(劃定)해야 합니다. 기독교와 성경의 용어를 동원한다고 모두 하나님 편은 아닙니다. 때로는 기독교적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교회에 더 많이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미국 역사상 재임 중에 공식 석상에서 기독교적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만큼 교회의 짐이 되고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은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잘못된 정치로 미국을 거덜 낸 것이야 자기 나라의 일이고 대통령을 잘못 뽑은 미국 국민들의 어쩔 수 없는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념 없이 열정만을 가진 지도자가 온 세계와 교회에 어떤 해를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둘째, 말 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제도교회나 다른 사람의 문제이기 전에 바로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도 동일하게 교회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8장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 끌려가는 또 다른 자신이 있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타락한 성품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속에 구렁이처럼 도사리고 있는 악한 생각과 행동을 시인하고 이를 대적하기가 어렵지만 우리 속에 우리의 적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을 싫컷 비난하고 나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그러면 너의 악은 없느냐?'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곤 합니다.

셋째, 신앙을 빙자한 악행은 일반적인 악행보다 훨씬 더 비열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선한 일에 대한 열정이 확신과 결합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이 되지만 악행과 부패가 신앙적인 확신으로 뒷받침 되면 현대에도 얼마든지 마녀사냥이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들고 가는 자의 발은 아름답지만 신앙을 빙자한 악행은 일반 형사범들보다 훨씬 더 추합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나 한동안 교계를 달구었던 스쿠크법보다 제도교회의 틀 내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부패와 타락은 훨씬 더 심각한 우리의 적입니다.

교회사에서 잘못된 신앙적 확신에 의한 악행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오래 전 부패한 가톨릭교회가 종교 개혁자들에게 가한 폭력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도 폭력의 명분은 거룩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하나 됨을 해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교황청이 종교 개혁자들에게 가한 폭력과 테러는 세속사회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정당한 재판도, 변론의 기회도 없이 사람들을 마구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이는 일이 교회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종교개혁 선구자들 중에 사형을 당한 영국의 위클리프나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제도교회의 폭력에 희생된 한 예에 불과합니다.

얀 후스의 경우 그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교회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했을 때 교황청은 ‘교회의 개혁과 일치’를 해친다는 명분으로 그를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했습니다. 이 때 후스가 소환에 응하지 않을까봐 당시 보헤미아왕을 겸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그문트는 그가 공의회에 출석한다면 신변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편지까지 써주었습니다. 하지만 후스가 도착하자마자 교황청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가 행한 교회 비판을 무조건 철회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의 변론이나 대화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이단자로 정죄되어 1415년 7월 6일, 발가벗긴 채 공개적으로 화형대에 묶여 불에 타 숨졌습니다.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교회의 부패와 치부를 숨기거나 변호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마치 곰팡이가 피는 곳에 햇빛을 비추는 것과 같고, 산불이 났을 때 방화벽을 구축(構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더 이상 타락의 곰팡이가 하나님의 교회에 퍼지지 않고, 성도들을 실족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제도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우리끼리'라는 싸구려 동정심으로 감싸거나 그것들을 드러내는 것을 교회의 하나 됨을 해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교회의 주적을 돕는 것이요, 사탄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양승훈 /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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