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먼저?, 건물먼저?
하나님 먼저?, 건물먼저?
  • 손경호 목사
  • 승인 2012.11.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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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호 LA기윤실 실행위원, "예수님 계신 곳은 어디라도 성전"

이 글은 손경호 실행위원이 LA기윤실 주최 건강한 교회 포럼 '교회 건축을 말한다'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LA기윤실과 손경호 목사의 허락을 받고 <미주뉴스앤조이>에 올립니다. - 편집자 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제한시켜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는 보이지만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인지되지 않도록 자신에 대한 표징만을 주셨습니다. 오직 이를 인지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는 충분한 감춰짐이 존재했습니다.” (파스칼/팡세 430)

교회 건물 과연 필요한가? 어떤 경우는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처럼 교회들이 건물을 새로 짓겠다, 증축 하겠다는 형태는 많은 부분 잘못된 동기의 건축이라고 본다. 필요하지 않는 것을 무리해서 짓겠다는 것은 대부분 목회자의 허영 때문이다. 교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헌금내고 어려운 형편에도 건축에 동참한다. 정작 목회자는 일의 효능이라는 구실로 적법한 절차를 무시한 채 투자하다가 모자라면 경기 탓으로 돌리고 특별 헌금을 요구한다. 신도들은 제대로 불평한마디 못하고 따라가는 것이 현실이다. 목회자에게는 절대 순종해야 복 받는다는 윗사람 존경의 동양적인 사상이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사각지대는 어디라도 존재한다. 가만두면 좀벌래 처럼 전체를 먹어치우고 만다. 한국 교회 건축 문제는 특정한 교단이나 일부 교회에 국한된 질병이 아니다. 시간적인 차이는 있으나 모든 교회가 진통하는 전염병이다. 미국도 한때는 교회 건축 붐이 일면서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결국 동부의 많은 교회들은 수백 년전 엄청난 돈으로 건축했다.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비고 있으며 또한 단단한 석조건물은 다른 용도로 전환하기기 쉽지 않다. 할 수 없이 아파트로 구조변경 하거나 아니면 적지 않은 건물은 술집이나 유흥업소로도 사용되는 형편이다.

현재 한국 교회의 세습기류가 전염병처럼 번지는 경우를 보면 교회 건물 사이즈에 비례하고 있다. 작은 건물을 가진 교회일수록 세습제 비율이 줄어든다는 것은 결국 교회가 돈의 대물림과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다. 비싼 건물, 웅장한 건물은 돈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목회자 개인의 성공의 발판으로 이용되며, 혹은 쉽게 후임에게 물려주지 못하는 우상이 되고 만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욕심에 합리화시킨 역사적인 배경이 존재 한다. 오래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건물에 집착한 유대 왕궁에 하나님의 경고문을 선포하다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당신이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이 집(성전)을 실로(성막, Tabernacle)같이 되게(성막의 자취가 사라짐)하고 이 성(예루살렘 성전)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겠다고 경고하셨다. (렘 26:6)

성전에 대한 경고문을 선포한 예레미야를 제거하기위해 관리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백성이 연합하여 성전 문 광장에 모인다. 모두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다. 그러나 몇몇 의로운 장로들은 예레미야의 처형을 반대 한다. 히스기야 시대의 예를 들며 그의 사형을 반대한다. (예레미야 26:18)

성막도 성전도 무너졌다. 성막과 성전 실체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가시적 건물의 존재 의미를 찾지 말아야한다. 현대 교회는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구실로 건물을 무분별하게 짓지만 결국 버림받을 일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이는 건물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도 버렸다.

1. 예루살렘 성전과 현대 교회 건물의 연관성

구약 성전의 원래 모형(母型,matrix)을 성막으로 보통 생각한다. 그러나 성막을 짓게 하신 하나님의 본뜻은 후대에 건축될 성전 모형을 미리 주신 것이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성전 건축을 위한 조건으로 성막 건축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성막 건축과 성전 건축은 분명히 구별되었다. 성막은 하나님이 짓도록 하셨고 성전은 사람의 의지가 선행되었다. 또한 성막 이전에 그들은 이미 성막 제사와 동일한 형태의 번제와 화목제가 존재했으며(출 24:6) 야웨 하나님과의 피 뿌리는 언약이 체결되었다(8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후 성막을 짓도록 하셨다. 성막의 가장 중요한 중심은 율법이다. 성막 안의 각양 도구들의 존재 이유는 율법의 두 돌 판이다.

성막을 다른 말로 ‘증거막(Tabernacle of Testimony)’이라 표현했다. 증거막은 법궤를 보관하는 장소다. 즉 법궤를 ‘증거(עֵדוּת)의 궤’라고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증거’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법궤의 기능을 대변해 준다. 증거라는 말의 본래 뜻은 ‘경고’라는 뜻이다. 법궤의 본래 기능은 ‘경고신호(Warning sign)’를 울리는 것이다. 법궤의 사명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백성에게 울리는 것이다.

법궤는 613개의 신앙생활 법으로 구성되었다. 왜 법궤의 사명이 끊임없는 경고신호를 울리는 것인가? 증거라는 말이 법궤를 명명하는 단어로 삽입된 배경이 있다. 야웨께서 백성에게 말씀할 내용을 두 돌 판에 기록해서 증거 궤에 보관하게 하셨다. 증거의 궤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백성을 향한 야웨의 선언이다. “The law of God is his testimony because it is his own affirmation relative to his very person and purpose." 법궤는 야외의 선언이기에 자연스럽게 경고로 받아야 하며 순종하려는 두려움의 마음이 필요하다. 여호와를 보통마음으로 섬기라 하지 않고 “경외하라!”(Fear!) 즉,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독교 신앙에는 두려움의 마음을 갖추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즐거워도 나 혼자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한 즐거움이 되어야 하며, 슬퍼도 나 혼자만 슬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에 연결된 슬픔이어야 한다. 율법에는 248개(몸의 뼈와 중요한 장기의 수)는 하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365개(일 년을 대변한다)는 하지 말라는 경고의 내용이 있다. 이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곧 야웨의 백성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광야생활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권은 성막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막이 움직이면 성막 따라 이삿짐을 챙겼다. 가는 방향의 결정권은 모세도 백성도 아니었다. 삶의 방향이나 형태가 성막 중심으로 40년간 진행되었다는 것은 백성들이 철저하게 야웨의 경고신호에 익숙해 졌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도 성막 중심의 생활 pattern을 유지하는 것이 야웨의 뜻이었다.

그러나 실로라는 곳에 성막을 옮긴 이후 성막에 대한 특이할만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실로에 단이 있다고만 했지 후에 어떤 모습으로 제사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매년 야웨의 절기가 있었다는 서술만 보인다. 그 말은 정기적으로 거국적인 성막 중심의 제사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성막의 원래 의미가 사라졌다. 그들의 일상 삶은 율법에서 발신되는 ‘경고신호’를 무시해 버린다. 성막 중심 생활이 무너졌다. 성막 이외의 단을 쌓기 시작했으며 성막중심에서 이탈하여 부족과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350년간 이어온 사사시대에 성막을 중심한 제사 활동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성막은 존재했었다. 그러나 제사장 가족 중심으로 시행된 흔적밖에 없다. 후기 사사시대에 엘리라는 제사장과 가족이 성막을 지키고 있었다. 이후 사무엘이 등장하여 성막 제사가 일부 재개 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막을 중심한 신앙보다는 오히려 법궤에 대한 사건과 이야기로 전개된 것이 중심을 이룬다. 이후 성막 없는 법궤 등장으로 역사는 전개된다. 법궤를 다루는 것도 법궤를 통해 전달되는 야웨의 ‘경고신호’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위급할 때 잠간 묻는 형식으로 법궤가 이용된다. 법궤는 이스라엘의 전쟁터를 누비며 백성들의 수호신이 되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어떤 이유로 성막이 백성들의 예배 중심에서 멀어졌는지는 더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다. 야웨께서 가나안 정착 후에 성막이 필요 없다 말씀한 기록도 없다. 그런데도 성막제사가 소흘해졌다. 전쟁의 수호신으로 생각한 언약궤만 덩그러니 들고 다녔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아마도 땅 분배로 인한 자리싸움, 혹은 부족 간의 힘겨루기와 형식화된 제사제도와 함께 전쟁에 시달렸던 이유가 아닌가 싶다.

주목할 사실은 실로의 성막이 제사장 독주의 기득권을 누리는 장소가 되었던 사실이다. 제사하는 사람들의 제물을 마음껏 탐내는데 혈안 된 제사장 가족은 야웨를 경외하는 마음이 마비되었다. 제사에는 관심 없고 젯밥에만 욕심낸 꼴이 되었다.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마비될 때 쉽게 물질에 욕심낼 수밖에 없는 영적인 타락상을 미리 보여주었다.

성막과 법궤가 동일하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기간은 사무엘이후 다윗 때까지 약 70년에서 80년 동안의 공백이 보인다. 사무엘 때도 전쟁의 수호신으로 법궤가 사용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법궤를 보관하는 성막 존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여기서부터 법궤를 보관하는 성막의 존재가 없어진 것으로 본다. 사울 왕 제위시절 한때나마 법궤를 내세워 전쟁 위기를 넘긴 흔적이 있었다. 이후로 법궤를 직접 사용하거나 일정한 곳에 보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윗 시대 때 이미 성막이 패기 된 이유를 동시대 아삽 그룹이 노래하기도 했다. 시편 78:59-60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 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사사 시대 후 왕정시대를 맞아 성막의 중요성 인식이 소멸되었다고 본다. 다윗이 왕국을 정리한 후 가장 먼저 법궤를 어떻게 보관할까에 관심을 가졌다. 이때는 옛 성막 형태에서 새로운 모양의 성전이 구상되었던 시기로 본다. 다윗이 법궤를 옮기기 위해 수만 명을 동원했으나 일차 법궤 이동에 실패한다. 운반 방법을 변경하여 이차 법궤 이동에 성공한 다윗은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데까지 이른다.

이후 다윗은 법궤를 보관할 장소를 만든다. 흥미 있는 사실은 법궤 보관 장소를 ‘성막’이라 부르지 않고 ‘친 장막’이라고 불렀다.법궤를 보관하는 ‘성막’의 중요성을 다윗이 몰랐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법궤를 보관하는 장소를 ‘천막’(삼하 6:17)에다 보관했을까? 성막과 천막의 차별성이 분명히 존재했었다고 본다. 물론 성막이라고 주로 부르는 단어 מִשְׁכָּן 은 보통 백성들이 거주하는 천막이기도 하지만 주로 법궤를 보관하는 성막을 일컬을 때 많이 사용했다. 다윗은 성막(מִשְׁכָּן) 이라는 말을 본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경우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후에 시편에서 몇번 정도 하나님의 계시는 성막이라는 말을 할 때 사용했었다. 다윗이 법궤를 보관하는 장소 즉 천막을 짓고 그 곳을 AHAL 이라고만 부른 후 이후 다른 곳에서 사용한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다윗 이후로 성막이라는 단어 מִשְׁכָּן이 사용된 경우는 7번인데 반해 대부분 39번이나 AHAL 이라는말을 사용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후 법궤보관 장소를 장막 이라고 주로 불렀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후대에는 성막과 장막 이라는 단어의 차이점을 두지 않고 사용되었지만 적어도 다윗 시대에는 성막과 장막의 차이를 둔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다윗은 법궤의 중요성은 인정했으나 법궤를 보관하는 성막을 모세시대처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또한 법궤가 오벧에돔이라는 개인 집에 무사히 석 달 동안 머물렀던 상황을 통해서 장소의 중요성 보다는 법궤 자체의 역할에 더 깊은 의미를 두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 다윗은 법궤가 머무는 장소를 מִשְׁכָּן 즉 백성들과 장소적으로 구별된 장소가 아니라 가깝게 머물러 있다는 의미의 AHAL 이라는 장막을 선호 했다고 본다. 참고로 고대 유목민은 그들이 사는 집을 주로 동물 가죽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천막 혹은 장막이라고 부르는데 다윗이 사용한 AHAL 이라는 단어가 바로 짐승의 가죽이나 염소 털로 만든 유목민이 사는 천막이라는 뜻이다.

왜 다윗은 법궤를 장막이나 천막에 머무는 것을 선호했을까?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매일 이용하는 천막처럼 삶 가운데 깊숙이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장막으로 옮긴 하나님의 법궤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고 한다. 왜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고 생각했을까? 야웨께서 성전에 대한 중요성을 요구한 흔적은 없어 보이는데도 성전을 지으려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통일왕국 이후로 안정된 생활에 돌입한 다윗이 자기는 웅장한 백향목 궁전에 살면서 천막에 안치된 법궤를 생각하며 가책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현상은 모두에게 잠재하는 공통된 감정이다. 교회건물을 짓고자 하는 목회자들이 신도들의 양심을 흔들며 교회 건축에 대한 감정이 일어나도록 불을 지피 운다. ‘어떻게 교회가 여러분이 사는 집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라는 양심에 호소하는 심리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윗의 심중을 아신 야웨께서 선지자 나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교회 건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찾는 중요한 해답이 있을 것 같다. 성전과 현대 교회 건물과의 역사적인 연관성은 전혀 없다고 본다. 야웨께 예배한다는 의미적인 개념으로는 성전 제사와 교회 예배와의 연관성은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성전은 단일 장소에 존재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반면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어떤 장소에도 의미가 있다. 신약교회는 일정한 장소에서만 예배해야 한다는 제한적인 의미를 벗어낫다. 일정한 장소를 신격화 하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의 출발이다.

우리교회 건물은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신실한 주의 종들을 한 지역에서 잠시 사용하신 후에 엉뚱한 곳에서 또 다른 일군들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 분이시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 7:6-7)”

야웨 하나님은 법궤를 보관하는 건물에 (전혀)관심이 없으셨다. 그러나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겠다.”(삼하 7:11)고 하셨다. 야웨의 뜻은 다윗의 후손을 위해서만 집을 짓겠다는 일회성 성취에 제한되지 않는다. 메시야의 출현과 연관된 뜻이 내포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다윗은 가시적인 야웨의 집 건축에 만전을 기한다. 성전건축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다윗이었다.

성전건축에 대한 공이 솔로몬에게 넘어간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보통 다윗은 전쟁을 많이 치렀고, 피를 흘렸다는 이유 때문에 성전건축의 혜택이 솔로몬에게 넘어갔다고들 해석한다. 그러나 성전건축의 실무적인 책임이 솔로몬에게 넘어간 숨겨진 이유는 다른데 있다. 성전건축 자질 여부를 따지자면 솔로몬이 다윗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전쟁도 다윗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야웨께서 모든 전쟁의 작전지휘관이셨다. 하나님의 왕국 건설에 필요한 전쟁이었다. 왜 다윗은 성전 건축을 양보했을까?

오히려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양보(!)는 성전에 대한 극대가치를 알고 있는 자신의 자격여부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두었던 것이다. 성전 건축에 대한 야웨의 본래 의도는 전쟁의 잔재가 사라진 후 평화 시대 때 건축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성전의 영원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 평화의 왕이시라는데 의미가 있다. 교회는 부와 권력을 위한 투쟁과 세상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의 상징물이 아니라 하늘의 평화를 전해 주기 위한 장소라는 의미가 더 크다.

일단 성전건축의 공을 솔로몬에게 던지지만 모든 준비는 다윗이 했다. 전체적인 의미를 성경신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야웨와 다윗의 생각에 대한 차이점을 발견한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다윗의 궁전과 법궤가 머무는 천막의 차이를 죄송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동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쉽게 다윗의 결심을 이해할 것이다. 감히 내 집이 야웨의 집보다 좋으면 되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야웨는 법궤를 보관하는 집의 규모나 가치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구약에서 인식한 성전 건물

왕정 시대가 본궤도로 접어든 시대의 성막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 때 기도한 내용과 하나님의 원래 뜻이 일치한다. (역대하 6:1)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여기서 “캄캄한데 계시겠다.”(עֲרָפֶל)는 번역은 애매하다. 단어 자체는 ‘캄캄하다’ 로 해석할 수 있지만 본의(本意)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이 캄캄한데 계시기를 좋아한다면 어감이 이상하다. 이 단어는 원래 캄캄하다는 의미 이전에 아주 짙은 구름(Thick cloud)이라는 뜻이 강하다. 결국 구름(우주의 구름) 가운데 계시겠다는 뜻이 가깝다. 인간의 장막이 아닌 우주의 구름가운데 계시겠다는 뜻이다.

야웨 하나님은 인간들이 건축한 집에 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람이 억지로 하나님의 집을 눈에 보이게 짓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전 건축의 동기였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삼차원 적인 제한된 공간에 모시겠다는 인간의 욕심(?)이 성전을 건축하게 했다는 관점이다.

7년의 성전 건축 후 솔로몬은 13년 동안이나 자기 궁전을 건축한다. 성전 건축이후 성전제사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던 이유다. 오랜 후 요시야 왕의 유월절 행사 때의 규모를 설명하기를 사무엘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라 했다. 그것은 곧 성전은 어마하게 지었지만 성전건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제사에 소흘했다는 증거다. 성전 완성된 후 350년 가까이 유월절 행사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구약 시대의 성전은 어떤 의미에서 야웨에 대한 제사가 중심 신앙이 아니었음을 본다. 오히려 성전 건물과 예루살렘 이라는 선택된 지역에 대한 이상주의 적인 의미가 더 컸다고 본다.

한국의 이민자들이 가지는 소원이 무엇인가? 버젓한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힘들게 집을 장만했지만 이용하는 것은 고작 밤에 와서 잠이나 자는 여관 형태의 역할에 제한되었다. 성전을 지었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로 버려진 것이다.

그들은 이시각도 건물 없는 성전 터 아래쪽에 진치고 성전 회복을 꿈꾸며 눈물 흘린다. 물론 야웨께서 성전을 회복해 주겠다는 메시지가 전혀 없음에도 그렇게 울고 있다. 성전 회복만이 그들의 신앙과 선민 지위를 회복해줄 것으로 믿기에 그런 것이다. 알아둘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 운동은 야웨 신앙과는 아무 연관성도 없는 시오니즘 주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기독교가 이스라엘의 성전회복 운동에 참관한다면 잘못된 신학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후기 선지자의 기록에 성전 제사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호세아 6:8)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또한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서 보인 것은 이미 성전 제사의 본래 의미가 악한세력에 의해 완벽하게 폐하여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단 12:11) 흥미 있는 사실은 이방에서 다니엘 혼자서 드린 제사 내용을 출애굽때 드린 제사와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방이지만 전심으로 야웨께 제사할 수 있다는 장소를 벗어난 제사가 가능했음을 말해준다. 참조: 요한복음 4:21 (예수님의 관점)

간간히 성전 제사가 시행되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부정과 부패에 오염된 성전 제사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구약 말기 시대의 성전제사는 야웨의 인정받지 못한 정략적인 제사나 혹은 제사장의 기득권유지 차원의 형식적인 제사로 전락하고 만다.

3. 성전 건물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

예수님은 성전 제사와 건물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는가? 성전은 예수님을 분노하게 한 걸림돌이었다. 성전이 지저분해서 청결하게 하라고 외치는 잔소리할(?) 거리를 주었다. 예수님께 있어서의 성전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대에 불과했다. 왜 마귀는 하필이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을까? 마귀조차도 성전을 우롱하는 존재로 여겼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현대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과 닮은꼴이다. 마귀와 세상은 교회를 조롱하고 교회 건물로 신앙을 시험하는 도구로 삼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1) 예수님은 성전을 잘못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경고하셨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마23:16)

종교가 인간의 욕심과 결합하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입으로는 성전이라 말하면서 성전을 빙자하여 백성들의 돈을 착취하는 강도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성전으로도 맹세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이들은 한 술 더 떠 성전에 드리는 금(금이나 은돈)이나 선물로 맹세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결국 성전에 많은 돈을 내면 그들의 맹세가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작태는 오늘의 교회가 종교의 이름을 빙자하여 철저하게 옛날방법(예수님이 성전을 빙자하여 돈 뜯어내는 자들을 꾸짖은 당시)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과 같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가톨릭이 저지른 죄를 비판하면서 비슷한 방법으로 성도들을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돈 뜯어내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헌금을 강조할 때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해 강조하는가를 생각해보라. 결국 목사와 개인의 생활 수단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방법보다 더 깊이 깔려 있지 않는가를 솔직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조직적인 죄악을 (마 23:17)“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라고 경고하셨다.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 의로운 판단력 상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공백, 신뢰성 상실. 현대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똑 같은 질병을 오래전 질책하셨다. 결국 예수님 당시 성전 주변에서 맴도는 종교 관리들은 심각한 종교질병에 오염된 상태였다.

오늘의 교회 현상과 닮은꼴이다. 이런걸 보면 솔로몬이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Ecc 1:10)” 말한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세우고는 개인의 이익 챙기는데 집중한다. 결국 교회의 부흥 프로그램은 누가 더 신속하게 이익을 챙겨 가느냐의 경쟁 각축장이 되었다.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가 돈이 보이고 덩치 큰 이권이 생기면 죽으라고 싸우는 것이다.

한국 대형 교회의 건물 소유권 및 기도원 소유권 싸움, 교회 기득권 쟁탈전, 세습제등 모든 사건들은 결국 금권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돈 없고 가난한 교회는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전혀 상관없다. 왜? 돈이 없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이 진짜 원하셨던 성전은?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6:55)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곳이 곧 성전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전통과 유전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가르쳤다. 아전인수라는 말이 현대의 대형교회가 저지르는 불의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옛날 시골에 가면 게으른 농부는 늦게까지 싫건 자고 논에 나와 새벽같이 일어나서 땀 흘리며 물을 퍼다 채운 이웃 논둑에 구멍을 뚫고 물을 그냥 도둑질 해가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추구하는 전략은? 작고 힘든 교회 성도들을 끌어가기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사람들을 재밌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말로는 아니라지만 그걸 누가 믿는가 말이다.

예수님의 원하시는 교회는 색깔이 선명하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뒤에 하신 말씀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Mat 16:18)” 여기의 “이 반석”이 무엇인가? 교회를 베드로의 신앙 고백위에 세우신다는 말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Mat 16:16)”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현재형이다. 지금도 영원토록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크리스천의 일이다. 살아계신 분을 건물 안에만 가두어 두려는가? 세상의 왕과 정치인은 큰 건물이 있어야만 권위가 유지된다. 보안문제뿐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눈과 권위가 건물에 비례 한다. 예수님이 종종 성전을 이용하신 이유에는 성전에서 자행되는 비리와 죄악들을 지적하며 교훈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제사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성전에서 한번 정도는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법 한데 없다. 세례요한을 소개할 때는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한 상황을 말해준다. 예수님과 성전제사에 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 물론 제사장 가족이 아닌 예수님이기 성전 제사와 상관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성전에서 제사할 의무가 있었다. 한번 정도는 예수님도 양을 잡아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법 하다. 그러나 없다. 예수님이 성전제사에 참석했는데 제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을까?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성전제사를 부정하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보신 성전 건물은 하나님의 진노와 백성들을 심판할 근거만 주는 골칫덩어리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바라본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저주의 표적이었다.

왜 그럴까?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건물에 집착하고 건물의 거룩함만 주장했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 이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서 사람들이 임의로 정한 모든 예배 장소를 부인하셨다. 세상 어디에나 믿는 크리스천이 있는 곳이면 하나님께 예배할 장소로 합당하다는 결론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건물의 크고 작음과 구조에 상관없이 살아계신(현재형)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원하셨다. 올바른 가르침이 없는 교회는 건물을 빨리 포기할수록 좋다.

3) 성공신화에 사로잡힌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교회건물 과연 필요한가?

예수님은 결국 보이는 성전 건물의 불필요성을 그의 죽음으로 증명해 주셨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태복음 27:51)

성전 건물을 더 이상 필요 없다. 건물이 폐허되었다고 야웨 신앙이 폐허되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건물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야웨께서 감옥 같은(?) 건물이 무너진 후 더욱 자유로워(?)지신 것이다. 결국 가시적인 성전 건물은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켜주는 대리인 역할밖에 되지 못했다.

교회의 존재 가치는 건물에 있지 않다. 역사에 의해 제한된 곳에서 그 역할을 감당했을 따름이다. 역사가 바뀌면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며 사명을 다하는 것이 복음이 담고 있는 특수성이다. 구태여 수많은 재정을 투자하여 자손만대(누구 맘대로)까지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다. 어떤 교회는 수만 불의 돈을 들여 교회 앞마당에다 Time Capsule을 묻어놓았다. 생각이 제대로 된 사람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많은 교인들 중 한 사람도 극렬하게 말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성경을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해석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예수님의 죽음과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휘장 밖에서 제사할 수밖에 없었다. 휘장은 야웨의 거룩한 곳에 죄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곳이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하나님이 휘장을 열고 사람에게 나오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는 자들이 휘장 밖에서 두려워하다가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휘장을 열어놓으신 새 창조의 사건이다. 휘장이 필요 없기에 휘장을 열어놓지 않고 찢어놓으셨다. 아울려 모든 성전제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 사명이 끝났다는 뜻이다. 이제는 성전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날마다 묵상하며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신앙논리다. 일시적인 장소에 불과한 교회 건물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 성막과 성전 그리고 교회 건물 자체를 섬기도록 부추기지 말라는 것이다.

4. 초대 교회와 건물

초대 교회는 기록에 의하면 4세기 초까지 교회의 기존 건물이 없었다. 물론 정치적으로 교회 건물이 공인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 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가로부터 교회 건축 허가와 집회가 공인된 이후부터 교회 건물은 단순한 집회 장소의 의미를 벗어나버렸다. 황제와 국가의 권력을 등지고 별 희한한 건축술이 동원되었다. 교회 건물은 순수한 신앙집회 장소의 의미 이상이 되어버렸다. 정치적인 위엄과 권세를 떨치는 건축술의 획기적인 길잡이(land mark)가 교회 건축에 도입 되었다. 교회 건물이 웅장하게 들어서면서부터 반대로 신앙의 집중력이 상실되었고 고난과 함께 가야 하는 기독교의 특성이 약해지고 말았다.

5. 교회 건물에 숨겨진 역사적 비밀(로마 가톨릭의 정치적인 우월성 차지)

1) 교회 건축 양식의 흐름

교회사에 획을 긋는 ‘밀라노 칙령’(Famous Edict of Milan)에서 교회 건축물의 무분별한 시발점을 찾을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와 리키니우스(Licinius)가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종교는 로마 제국의 억압이나 제약을 받지 않는 다는 중립적인 종교제도 포고문이다. 밀라노 칙령은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포함한 어떤 신앙을 선택하더라도 방해받지 않는다는 황제의 포고문이다. 기독교는 박해의 걸림돌이 제거 되었다는 자유를 맞게 된다. 문제는 로마제국 관할의 모든 국가에서 기독교에게만 완전한 자유가 허락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여타 종교에도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종교의 체질상 다른 종교와 대립하는 환경에서는 공격적인 신앙으로 변해버린다. 결국 기독교의 입장은 다른 종교가 기독교의 번영과 부흥을 분쇄시키는 경쟁적인 종교로 보일 수 있다. 다른 종교를 능가해야만 정치와 권력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게 했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슈퍼 종교로 살아남아야만 된다는 주도권 경쟁에 선두주자로 달리게 된다. 기독교가 이 부분에서 다른 종교와 경쟁하는 입장 보다는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몰수이 맡기고자 하는 신앙 전통을 세웠다면 정말 달라졌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기독교는 투쟁과 지배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지배하는 종교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엉뚱한 신앙 전통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그 길이 훨씬 쉽게 보여서 선택했다고 본다. 또한 밀라노 칙령의 본래 의미를 이기적으로 해석했던데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영어로 번역된 황제 칙령의 원문은 “Perceiving long ago that religious liberty ought not to be denied, but that it ought to be granted to the judgment and desire of each individual to perform his religious duties according to his own choice, we had given orders that every man, Christians as well as others, should preserve the faith of his own sect and religion.”

모든 종교에 자유를 부여한다는 내용이다. 기독교를 가장 뛰어난 종교로 인정하고 거기에 중점적인 특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또한 미국 헌법의 종교 자유에 대한 항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본다. 뒤에 따라 나오는 세부 설명도 같은 맥락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칙령을 이기적으로 해석해 버렸다. 마치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만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다고 믿어버렸다. 양심적인 역사가라면 바르게 해석해 주어야 할 것이다. 엄밀히 콘스탄티누스가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 바탕에서 칙령을 내렸느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칙령의 부언에서 “each one should have the liberty of choosing and worshiping whatever deity he pleases. This has been done by us in order that we might not seem in any way to discriminate against any rank or religion.”

개인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조물주를 마음대로 예배할 수 있다는 자유를 선포했다. 로마는 기독교의 공인 이전에 황제 숭배 종교를 위시한 잡다한 이방 종교의 박물관과 같은 국가였다. 결국 밀라노 칙령은 다신교의 성장 기틀을 마련해준 칙령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는 이러한 자유의 틈을 타서 경쟁의 종교로, 다른 종교를 힘과 권력으로 이겨야 한다는 투쟁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서 기독교는 정치와 권력을 기회만 있으면 이용하는 아부종교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통치종교에 대한 갈망이 결국 종교 전쟁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황제에 의해 공인 된 교회는 지하가정교회에서 지상 가시 교회로 부상하게 된다. 교회 건물을 어떤 형태로 지을까가 관심사였을 것이다. 칙령에 의하면 교회가 건물을 지으려면 지방 관리의 허락을 통해서 짓도록 명시했다.

공식적인 교회 건물이 허락되기 전까지는 크리스천은 공동사회 속에서 서로 나누며 소유를 공유해 왔다고 명시하며 기독교 신앙의 미덕을 칭찬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교회건축에 많은 돈과 권력을 투입한 후로 교회는 공공 사회가 함께 이용할 수 있었던 공간이 좁아졌으며 특수한 종교 집단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교회건물 형태를 디자인할 때도 황제의 궁전형태(Imperial Form)를 도입했다. 교회와 황궁의 동일성을 확보했던 것이다. 건물 사이즈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의 가치를 대변해 주는 잣대로 이용된 것은 고대 그리스 인들의 생활에서 시작되었다. 교회 건물 모양이 황궁 형태에서 비롯되어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2) 모슬렘 건축양식이 교회 건축에 모방된 증거.

한때는 교회 건축이 모슬렘의 건축양식을 본떠서 지은 적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불란서의 ‘오텡’ 대성당은 모슬렘 건축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교회라고 한다. 여기서 표현된 건축 양식은 성경에 전혀 표현되지 않았던 제3의 출처로서 황금전설에서 영향 받은 저울에 영혼의 무게를 달고 있는 미카엘 대천사의 모습을 다룬다(사이코스타시스). 이러한 건축물의 표현은 당시 문맹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기독교 사회에서 대중과 순례자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대중매체 적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이 건물을 평가한다.

교회 건물양식을 중심으로 어둡게 내리어진 그림자는 건물이 단순한 신앙을 위한 모임장소가 아니라 신앙과 거리가 먼 이권 경쟁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 건물 뒤에 숨어있는 사탄의 음모는 지금도 존재한다.

사실 구약에서 성전의 모양을 형편없이 조작한 흔적도 있다.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2 Ki 16:10-11)”

6. 법궤 없는 성전제사, 말씀에 순종 없는 현대교회 (현대 교회가 당면한 교회 건축 문제성)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현대교회의 교회 건축은 잘못된 동기의 요소가 많다. 교회 건축이 하나님께 큰 것 한번 드리고자 하는 신앙과 연결시키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교회 건축에 목숨 건 목회자도 있다. 건물 하나 잘 지어놓으면 세상에 왔던 사명을 다했다고 자위한다. 인간적인 가치관에서 나온 거짓 신앙이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건축에 올인하는 목회자들을 경고 하셨다. 교회 건축이 끝나면 약방의 감초처럼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목회자가 쫓겨 가거나, 교회가 시험 들거나, 교인들이 시험 들어 교회를 옮긴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똑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건축이 끝난 다음 빚더미위에 올라앉아 있는 교회는 끊임없이 부채 갚을 부흥회를 개최하여 교인들에게 돈 내라고 부채질한다. 왜 같은 부작용이 반복되는데 교회를 지어야 하는가? 신앙이 아니라 자기 성취욕 때문이다.

물론 교회를 짓는데 어려움 없었던 예외도 있다. 어떤 경우일까? 꼭 건물이 필요한 교회가 교회를 지었을 때, 교인 숫자에 맞는 적당한 건물을 지었을 때, 신앙 이외의 욕심이 배제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보기 힘들다.

7.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것인가, 이대로 망할 것인가?

보이는 성전은 오래전에 천국으로 올라가버렸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Rev 11:19)” 지상 교회는 더 이상 성전이라는 기능이 없어졌다. 믿는 성도들 모두가 움직이는 성전이다. 교회는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장소요, 공간이다.

천국의 성전은 세상을 심판하는 사령본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Rev 14:15 KOR)” 거짓 교회의 역할을 자처하다가 심판의 타깃은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마지막에 남는 성전은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이 성전이 되심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Rev 21:22 KOR)” 성전 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은 누추하고 허름한 곳이라도 형편없는 곳이라도 성전이다.

8. 교회 건축 비리에 관한 문제 해결 방법은 있을까?

1) 목회자 수를 줄여야 한다. 숫자가 적을수록 질이 향상되지 않나 싶다.
2) 신학교 개혁이 필요하다.
3) 다목적용 교회 건축 방법 연구필요.
4) 교회 건물 크기에 대한 세금 부여 법안 제정.
5) 건축 필요성 교회에 대한 적합성을 평가해 주는 공인된 단체가 필요.

9. 집으로(To The Native Home)

(막 11:11)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심. 성전의 잘못된 것을 보심. 오늘의 교회를 둘러보시고 무슨 생각을 하실 것인가?
(요 2:19-21) 성전과 예수님의 육체 - 교회가 진짜 교회가 되려면 예수님의 육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함.
(Hebrews 8:1 - 13) 마지막 부탁

손경호 목사 / 보스톤성령교회, LA기윤실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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