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우리 고향입니다'
'한국이 우리 고향입니다'
  • 이승규
  • 승인 2009.05.11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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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마운틴에 사는 은퇴 선교사들의 이야기

▲ 플라워스 린튼(왼쪽) 씨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결핵을 퇴치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플라워스 린튼은 유진벨 외손자 휴 린튼의 아내다.
로이스 플라워스 린튼 씨(83세)는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행 배를 탔다. 무려 일주일이나 걸리는 긴 항해였지만, 한국에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다. 린튼 씨의 한국 이름은 인애자. 구한말 근대 교육과 의료 사역을 한 유진벨 선교사의 외손자인 휴 린튼의 아내이며, 세브란스병원 외국인 진료소 소장인 인요한 씨의 어머니이기도 한다.

하지만 린튼 씨는 1년여가 지나서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아직 전쟁의 화염이 가시지 않은 한국 땅은 위험하다며, UN군이 이들의 입국을 막았기 때문이다. 린튼 씨에게 발전한 한국을 보며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더니, 연신 '원더풀'이라며, 너무 좋다고 했다.

린튼 씨는 한국에 들어와 순천 기독교 진료소에서 결핵을 퇴치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 남한 지역의 결핵 환자 수는 200만 명에 달했다. 세계 제일의 결핵 왕국 중 하나였을 정도였다. 결핵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걸리는 대표적인 후진국형 질병이다. 린튼 씨는 당시 한국이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말했다. 린튼 씨는 35년 동안 결핵 퇴치 운동을 벌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96년 호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린튼 씨는 1986년 은퇴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블랙마운틴 지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린튼 씨 집에는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들이 자주 드나든다. 그녀의 셋째 아들 제임스 린튼 씨가 북한의 지하수 개발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린튼 씨는 6월 달에도 북한을 방문해 협력 사업을 진행한다.

제임스 린튼 씨의 고향은 대한민국 군산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말도 유창했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제임스 린튼 씨는 친구들과 뛰놀며 고구마를 구워 먹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옛날 일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었던 제임스 린튼 씨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준 까닭에 지금 한국은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됐는데,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을 한 직후였다.

▲ 플라워스 린튼의 셋째 아들 제임스 린튼(왼쪽) 씨가 아내 마가렛 린튼 씨와 함께 블랙마운틴장로교회를 방문했다. 제임스 린튼은 북한의 지하수 개발을 돕고 있다.
"한국 교회는 너무 분열을 많이 합니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북한 지하 교회 교인들이 남한 교회가 시시하다고 쫓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한 교회는 북한 땅에 깃발을 꽂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과 조금 달라도 북한을 돕는다는 대의명분 아래 뭉쳐야 하는데, 한국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왜 그렇게 교파를 따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클로이스 메리 씨는 1961년부터 1991년까지 서울과 대전, 부산 등지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고등학교 때부터 선교에 관심이 많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국을 선교지로 선택했다. 그녀의 남편 역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선교를 했다.

클로이스 메리 씨는 선교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인물이 누구냐고 묻자 갑자기 눈시울을 붉혔다.

▲ 메리(맨 오른쪽) 씨는 남편 클로이스(오른쪽에서 두 번째)씨와 함께 서울과 부산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선교를 했다. 찰스(맨 왼쪽)와 마리(왼쪽에서 두 번째) 씨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대전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때였습니다. 다리를 저는 여자가 영어를 배우고 있었어요. 집도 없어 쉼터에서 살던 여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을 찾아갔는데, 창도 없고, 침대도 너무 붙어 있어서 한 사람 겨우 눕기도 힘든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니까 그 여자 분이 계속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찾아와 창피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잠시 뒤 따뜻한 차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나 울었는데, 이 여자 분이 저에게 '사모님, 울지 마세요. 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잖아요'라면서 저를 오히려 위로해줬습니다."

올해 87세인 마리엘라 프로보스트 씨는 자신의 고향을 광주라고 소개했다. 프로보스트 씨는 전주예수병원과 대구동산병원에서 간호사로 활동했다. 그녀는 한국 전쟁 당시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환자와 전쟁고아를 돌봤다.

▲ 프로보스트 씨는 한국 전쟁 중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부상자와 전쟁고아를 돌봤다.
프로보스트 씨는 그 많은 환자를 두고 도저히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고 했다. 목숨은 하나님께 맡긴 것이기 때문에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포에서 학교를 세운 타마지 목사고, 오빠는 타요한 목사다. 프로보스트 씨 부부는 경주문화중고등학교를 다시 개교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학교를 세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는데, 샌디에고에 있는 한 교회가 이들에게 1,000불을 보내왔다. 이 교회와는 일면식도 없었기 때문에 더 놀랐다. 프로보스트 씨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에는 이들 외에도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 20여 명이 살고 있다. 한국 최초로 기독 의학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의료 발전에 앞장선 메리 씰(84세) 씨, 장로교신학대학원 기독교 교육원을 설립한 기독교 교육 전문가 메리 안네 멜로즈(86세) 씨 등도 한 동네 식구다.

이들은 미국남장로교 교단에 속한 선교사들로 195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활동했다.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미국 교단들이 선교 구역을 나눴기 때문이다. 미국남장로교 교단은 전라도 지역을 담당했었다. 이들이 블랙마운틴에 모여 사는 이유는 이 지역이 미국남장로교 교단의 본거지이기도 하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내 고 루스 그레이엄 여사가 고향인 이곳에 은퇴 선교사들이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준 점도 작용했다. 약 100명 정도가 모여 살았지만, 이제는 20여 명이 모여 살고 있다.

▲ 마포삼열 목사의 아들 사무엘 머핏 목사(왼쪽)가 한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들이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은퇴 선교사들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사랑의 필요하다면 어디든지 가야 했기 때문이다"고 했다.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선교사의 직분으로 더한 오지라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이 발전한 모습을 보고는 고맙고 자랑스럽다는 뜻을 밝혔다. 마치 자식이 훌륭하게 성장한 느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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