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외치라"
'사랑하면 외치라"
  • 전현진
  • 승인 2013.06.13 16:4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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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청지기교회 송병주 목사, 호세아 1장 1~11절

6월 9일 LA 선한청지기교회 송병주 목사가 호세아 1장 1~11절을 본문으로 전한 설교입니다. 송병주 목사의 블로그에 올라온 설교문을 본인 동의를 얻어 올립니다.  -편집자 주

   
 
 

▲ 이탈리아 작가 두초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 1255-1319)가 그린 호세아.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던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을 다 회복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번영하던 시기였습니다. 강대국에 기죽지 않고, 우리 끼리 충분히 잘해나갈 수 있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장 팽배하던 시기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없이도, 적당히 하나님 믿어도, 바알과 하나님을 같이 섬겨도, 소위 벌 받지 모든 것이 잘되는 시기였습니다.

물질적 축복은 2가지 경우에 주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축복입니다. 말 그대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의 축복을 말합니다. 축복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복이 물질적 축복과 동의어도 아닙니다. 물질적 복을 못 받아도 복 받았다고 감사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며,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순위인 사람들이며, 물질적 축복이 꼭 아니어도 되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경우는 내 힘으로 축복을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선순위가 먼저 그 나라와 의가 아니라, 물질적 축복과 번영이 우선순위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은 못 받았지만, 영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지리도 복도 못 받는 것들이 저런 식으로 자위해요~”하며 속으로 비웃습니다. 이분들은 물질적 축복 받기 위해서라면 먼저 그 나라와 의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위해서라면 종교적인 조건도 따를 각오를 합니다. 주일 예배도 나가고, 새벽기도도 나가며, 필요하면 큰 헌금을 할 수 있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투자가 필요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보기로는 매우 종교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을 위해서 다른 신이 필요하다면, 둘 다 동시에 섬기거나, 아니면 혼합시켜서 섬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종교는 마음의 평강과 복 받으려고 필요한 것 아냐? 그러니까 다양한 종교를 가져도 괜찮아…”라고 생각합니다.

'바알과 여호와가 좀 잘 지내면 좋을 텐데…'

오늘 본문의 호세아 시대는 이 2가지 중에 어디일까요? 아무래도 두 번째, 복으로 똘똘 뭉친 때입니다. 이 시대는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과 혼합시켜서 섬기던 시대입니다. 어떻게 그랬느냐면, 하나님은 유목민 곧 목축의 신이라 농사의 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데는 농업의 신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농사법을 지역 주민들에게 배웠는데, 그들은 파종하고, 김을 매고, 물을 잘 대어주고, 수확하는 농사를 짓는 방법만을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농사 전에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며, 수확을 하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우상숭배도 함께 배운 것입니다. 농사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농업의 바알과 아세라에게 잘해야 한해의 농사가 성공한다고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목축업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과 골짜기를 다니며 풀을 찾고, 오아시스를 찾는 일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농사를 지을 때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언약도 시내산에서 주고, 호렙산에서 만났고,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라, 산신령 같은 분이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넓은 논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바알과 아세라 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매우 영적이고 규범적인 분이시니까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 뜻대로 해야 하지만, 세상 살아갈 때에는 세상의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축하는 일과 안식일 지키는 데는 여호와 하나님 식으로 하고, 농사짓고 경제 발전 시키는 데는 바알과 아세라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 바알(왼쪽)과 아세라(오른쪽)의 형상물.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그들은 강변합니다. “절대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 버린 것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식으로 하고, 예루살렘에 가면 예루살렘 식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목축업에 능하시고, 농사는 바알과 아세라식으로 하면 된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복 받고 살기를 원하시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이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 버려도 되고, 우상과 더불어 섬겨도 되고, 매우 균형 잡힌 것처럼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더구나 바알과 아세라 신앙은 음란을 거룩한 것으로 말해줍니다. 왜냐면 하늘신이며 남자신인 바알과 땅신이며 여자신인 아세라가 짝짓는 우주적 성행위를 해야 농사가 잘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비가내리고, 땅이 풍성한 열매와 소산을 내는 것을 신들의 우주적 성행위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짝짓기와 우주적 성행위를 위해서는 인간들이 신들에게 성적인 자극과 모티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제사와 예배가 된 것입니다.

성전에서 성적인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여성 사제들을 '성창' 이라는 성전 창녀로 세웠고, 그들의 예배는 당연히 음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성 중심의 유대 사회의 남성들은 이 음란하고 더러운 종교가 구미에 당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거룩의 하나님이고 이런 모든 것을 음란과 죄로 여기는데, 바알과 아세라는 포르노를 거룩한 예배로 만들어주니 더욱 바알과 아세라를 즐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주일과 금요일 밤 그리고 교회에서는 하나님 식으로 살고, 주중과 야밤에는 그리고 사업처와 거래처에서는 바알과 아세라식으로 살면 된다는 생각은 지금이나 그 때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쾌락적인 세상 문화와 거룩한 기독교 문화를 둘 다 즐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며 사는 모습도 지금이나 그 때나 차이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음란 사이트 찾아다니느라 클릭한 손가락으로 찬양 악기 연주하고 손들며 찬양합니다. 밤새도록 음란 문화 지키느라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눈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룸싸롱 돌아다니며 놀면서 내 자식들은 바르고 착하게 크라고 교회 함께 다닙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영적인 유혹은 “교회 다니지 말고 룸싸롱 가자”가 아니라, “교회 다니면서 좋은 이야기 듣고, 룸싸롱 가서 인생도 즐기고”가 더 큰 유혹입니다. “바알과 여호와가 갈등할 필요가 있나요? 두 분이 좀 잘 지내면 우리가 편할 텐데….” 로마와 예루살렘이 친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한 이후 이것은 우리의 가장 큰 영적인 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중심이 된 호세아의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바로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에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호세아를 부르셨습니다. 포르노도 거룩하게 즐기는 길이 열렸고, 남들 모두 세상적인 번영도 누리면서 종교적인 은혜를 받으며 잘 살고 있는데, 이들을 향해 망할 것이라는 심판을 선언해야 할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정말 남들 다 잘 나가고 있는데, “재수 없는 소리하는 사람 되라”고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아십니까? 가장 번영의 시대에 가장 쓴 소리, 재수 없는 소리를 한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 세 분의 선지자가 가장 강력하게 활동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듣기 좋은 말을 해줄 목사가 아니라,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외쳐야 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룩한 분노를 품고 이스라엘을 향해 확 쓸어버릴 쓴 소리를 냅다 질러 버릴 사람을 세우시는데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세아 1장 1~2절).”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고 생각하시면, 이 나를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선포하라고 하셔야 할 텐데, 오히려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하나님이었다면, “호세아야… 이 세상을 확 그냥…” 그리고 제가 만약 호세아라면, 이들의 음란한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삶의 현장과 교회 현장에서 얼마나 야누스처럼 표리부동한지 고발 기사를 팍 터뜨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난도질은 다 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니… 참 당황스럽습니다.

이런 시대에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투사가 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분노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포하고 지적하고 쓴 소리 하기 전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여인과 결혼하면 선지자 자격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율법으로 호세아를 걸 수 있습니다. “너부터 그런 여자와 결혼해서 부정한 것이 누굴 부정하다고 하느냐”고 조롱하면 아무 말도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의인의 자리에서 “이 더러운 것들아 그 따위로 살지마”하고 투사로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더러운 세상을 부둥켜안고, 그들을 사랑으로 가슴에 품고, 연인으로서 “내 사랑아. 이러면 안 돼. 사랑하는 내 자식들아 이렇게 살면 안 돼… 안 돼. 제발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하며 울부짖는 것입니다.

메시지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호세아가 하나님 시키니까 할 수 없이 기계적으로 그냥 고멜과 결혼했을까요?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멜과 결혼하게 시켰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은 음란한 아내를 맞이하라 했지 고멜과 결혼하라고 사람을 지정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멜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호세아 자신이었습니다.

3절을 보시면,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호세아는 기계적으로 시키는 대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음란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고멜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음란한 여인 같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호세아도 사랑으로 고멜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고멜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언제부터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습니까? 세상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는 세 자녀들을 낳으면서 입니다. 3절 이후를 보십시오.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6절을 보십시오.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8-9절을 보십시오.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 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호세아는 분노하고 생각날 때마다 선지자적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패망의 메시지를 자녀를 낳을 때마다 선포하게 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무엇을 의미하고 계신 걸까요? 솔직히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를 그린 작가 코디 밀러(Cody F. Miller)의 작품. (코디 밀러 홈페이지 갈무리)

 
 
저는 이 아이들이 저주 받은 아이들이어서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다르게 말하고 싶습니다. 고멜을 사랑했다면, 비록 음란의 자식이지만 호세아 자신에게는 이 자녀들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비록 음란의 열매였지만, 호세아의 관점에서는 “사랑의 열매가 맺힐 때마다, 세상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다.”입니다. 심판의 메시지는 분노를 안고 선포하지 말고, 사랑의 열매가 맺힐 때 가슴에 품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사랑 없이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사랑 없이 새끼 낳는 번식을 하면서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무 잔인한 인간이고, 잔인한 하나님이시죠. 그것이 아니라, 진실로 아파서 찢어질 것 같은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사랑의 열매를 담을 때마다 이스라엘을 향해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더러운 것들아 그 따위로 살지마”하고 분노에 떠는 선지자의 소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더러운 세상을 부둥켜안고, 핏 덩어리 같은 자녀들을 가슴에 품고, “내 사랑아. 이러면 안 돼. 사랑하는 내 자식아 이렇게 살면 안 돼hellip; 안 돼. 제발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하는 가슴으로 사랑에 아파 찢어진 가슴으로 울부짖는 선지자의 외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외치라. 사랑 없이 외치지 말라.

어제 말씀 준비하면서, 원고를 쓰면서 흐르는 눈물을 계속 참았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의 길이군요…” 설교 준비하는 금요일부터 계속해서 이 LA 목회자들의 용납할 수 없는 더러운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토요일은 최고조였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설교 준비를 할 수 없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하나님 이런 목사를, 이런 교회를, 이런 성도들을, 어찌 그냥 보십니까?”, “내 이번에 이런 상황을 좌시하지 않으리라”하며 부글부글 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이번에 호세아서를 설교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구나. 오케이. 각오해라. 이 교만하고 타락한 목사들아, 사람과 돈을 주인 삼은 평신도 지도자들과 교회야, 그리고 화려한 설교와 언변에 옳고 그름을 잃어버린 바보 같은 성도들아. 다 죽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며 준비하다가 눈물이 그냥 흐르더군요. 그리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 이번에 호세아서를 설교하게 하신 이유가 있으셨군요.”

실망과 분노로 독설을 쏟아내는 저에게 성령께서 깊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분노하고 실망하고 지적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하면 안 되겠니?" 분노하고 실망하고 지적하는 일은 쉬웠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려니 참 어렵더군요. 이런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그냥… 울었습니다. "사랑의 열매 없이 분노로 외치지 말라. 하지만, 가슴에 사랑의 열매가 맺힐때에는 타협없이 외치라." 성령님 주신 그 마음 안고… 기도합니다. 결단합니다. “눈치보지 않고 외쳐야겠지만, 사랑없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랑할 수 있기 전에, 사랑의 열매가 맺히기 전에, 선지자 흉내내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해야 합니다. 분노 때문에 자기 의 때문에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3절을 찾아 읽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러분의 고멜이 누구입니까? 거룩한 분노 보다 아픈 사랑을 먼저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선포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라 하셨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러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9절에서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심판을 선언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긍휼히 여겨 구원’하시고, 그러나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너희는 내 아들들이라’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는 불타는 사랑의 책입니다.

호세아는 ‘구원’이란 뜻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신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바로 십자가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구원은 사랑으로 선포된 회개와 진노 중에라도 잃지 않은 긍휼의 결과입니다. 호세아에서 우리는 바로 십자가 사랑을 봅니다.

이렇게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뿌듯한 가슴으로 그래 호세아처럼 주님처럼 이렇게 사랑하고 용납해야지 하며 원고를 정리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이번 호세아를 통해 사랑의 선지자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제 가슴에 성령께서 다시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래서 목사들이 안 돼. 항상 너희들은 설교만 하면 호세아 흉내만 내고 있을까? 넌 네가 고멜이라는 것은 잊은 것 같구나. 네가 이스르엘이었고, 로루하마였고, 로암미라는 것을 잊은 것 같구나. 호세아 흉내 내고, 내 흉내 내려 하지 마라. 네가 고멜 같은 존재였음을 뼈에 새긴 사람이기에 호세아 같은 선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고백했습니다. “아이고 주님… 선지자 흉내 내느라…” 설교를 다시 쓸 수도 없고… 깊게 고민하다가 오늘 그냥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또 다른 의미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설교입니다. 죄인임을 잊어버린 채 선지자인줄 알고 설교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호세아의 사명을 생각하셔야 겠지만,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멜,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같은 우리 자신을 향해 저의 실패한 설교가 다루지 못한 메시지를 성령님께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의 가슴에 말씀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나'의 하나님, 반전의 하나님” 그분을 찬양합니다.

송병주 목사 / 선한청지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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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3-06-23 14:01:50
너무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설교 준비중 우신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다. 주님!
오! 주여!주여!흐느끼며, 통곡하는 목사님의 모습 너무 귀한모습입니다.

표세흥 2013-06-23 13:56:20
너무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설교 준비중 우신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다. 주님 ,주여,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