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복음, 반제국적 읽기는 가능한가
바울 복음, 반제국적 읽기는 가능한가
  • 이광하
  • 승인 2009.05.1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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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바울이 다시 학계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바울 신학의 대가 김세윤 교수가 새 책을 냈다. <그리스도와 가이사-바울과 누가의 저작에 나타난 복음과 로마 제국>(원저 <Christ and Caesar: The Gospel and the Roman Empire in the Writings of Paul and Luke>(Eerdmans, 2008)). 최근 신약 학계의 중심 이슈로 떠오른 바울 복음과 로마 제국의 정치적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바울 복음의 사회 변혁적 역동성과 함께 이방인을 향한 전도자의 열정을 뜨겁게 전해준다. 최근 인문학계의 바울 읽기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들을 수 있을까? 청어람아카데미에서 '바울과 제국' 세미나를 이끌었던 양희송 실장(청어람 아카데미 기획자·전 <복음과상황> 편집장)이 지난 3월 27일 김 교수를 만났다.

▲ 김세윤 박사 (풀러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사진 제공 유헌)
요즈음 교수님의 근황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지요. 연구와 저술 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애초에는 미국 신학교에서 봉직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총신대학교에서 94년 말까지 만 6년을 가르칠 때, 신학 대학 원장을 했는데, 한국 목사님들의 재교육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어요. 목회자들이 신대원에서 3년 배운 것으로 일생 목회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풀러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임명이 됐을 때, 제가 학교 측에 한국 목사님들과 미국에 있는 한인 목사님들을 위한 목회학 박사 과정을 개설해달라고 제안했어요. 내 임무의 3분의 1을 그 일을 위해 쓰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시작했지요. 그동안 목회학 박사과정 규모가 커져서 지금은 내 일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미국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로서 모국의 목회자들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는 보람을 느끼면서 이 일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WBC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을 개정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제 스승이신 F. F. 브루스가 82년에 출판한 것인데, 제가 위임을 받아서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고 있지요. 데살로니가전서는 짧은 서신이지만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해요. 바울의 초기 신학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서신이지요. 그런데 지난 10여 년 동안 '바울 복음과 로마 제국의 관계'가 신약 학계에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어요. 초대 교회 복음 선포자들이 로마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복음 선포를 하고,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기독교 운동을 했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확산되었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데살로니가전·후서·빌립보서·로마서를 샘플로 삼아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주석을 쓰다가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한 권 썼어요. <그리스도와 가이사>인데, 한국판이 2주 전에 두란노 아카데미에서 나왔어요. 2008년 10월 미국 어드만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박문재 전도사가 번역을 해서 출간했어요.

제가 필생의 학문적 과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예수와 바울의 관계입니다. 바울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어떻게 이방 선교 상황에서 활용하고 있는가, 특히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어떻게 이어받고 어떻게 카테고리와 개념을 변주하고 있는지 연구하려고 합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예수의 말씀이 없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바울이 예수 전승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연구하려고 하는데, 이미 미국의 큰 출판사에서 모노그라피(monography, 특정한 주제에 대한 연구 논문)를 써달라는 위임을 받았어요. 데살로니가 주석 다음에는 그것을 쓰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가이사>에서 논쟁의 상대방인 '바울 서신에 대한 반제국적 읽기'는 어떤 내용으로 제시되고 있는지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지요.

반제국적 읽기를 하는 학자들은 바울이 당시 황제 숭배와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용어들을 채택하여 복음을 선포한다는 점을 지적해요. 바울은 퀴리오스(kuyros 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장차 오실 것을 선포하면서 '파루시아'(parusia 오심, 살전 2:19; 4:15; 살후 2:8)와 '에피파네이아'(epiphaneia 나타나심, 살후 2:8)라는 단어를 사용하지요. '파루시아'는 통상적으로 황제나 군주가 속주 도시를 공식 방문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였고, '에피파네이아'도 황제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였어요. 헬레니즘 세계에서 '아판테시스'(apantesis, 영접)라는 단어는 한 도시의 유력한 시민들이 그들의 도시를 방문하는(파루시아) 군주를 영접하기 위해 나가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어요. "'퀴리오스'(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파루시아'(parousia, 재림)를 행하시리니, 믿는 자들은 공중에서 있을 '아판테시스'(apantesis, 영접)를 위하여 끌어 올려지리라"(살전 4:17).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황제의 방문이라는 장엄한 예식에 비추어 묘사하려 했다는 강한 인상을 줍니다.

나아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3에서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사람들의 말을 비판하면서 로마 제국 이데올로기의 중심 슬로건이었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저희들이 안전하다 평안하다고 할 때 주의 날이 도둑같이 임한다고 했거든요. '평화와 안전'(팍스 에트 세쿠리타스, Pax et Securitas)은 팍스 로마나의 유명한 구호였어요. 로마가 전 세계에 약속하는 정치적 복음이었어요. 로마가 무력으로 라인 다뉴브 강 북쪽 게르만 야만인과 동쪽 파르티야의 야만 기병대로부터 모든 지중해 연안의 문명 세계를 지켜준다. 그 안에서 모든 부족들이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로마법에 청종하고 세금을 내면 마음대로 이주할 수 있고 국경 없이 자유 무역하면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거죠.

또 바울이 편지를 쓰던 시기에 로마에 복속된 유대 민족은 군대로 징집되고 정치적 압제와 경제적 수탈과 종교적 우상 숭배를 강요당하는 등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AD 66년에 그것이 제1차 유대 전쟁으로 폭발하는데, 바울은 그보다 15년 전에 편지를 쓰고 있어요. 이 모든 것들은 바울 서신에 대한 반제국적 읽기를 권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학자들은 로마 세계에서 바울이 예수를 메시아적 왕, 주, 하나님의 아들, 이 세대와 세상의 통치자들을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러 오실 구원자로 선포한 것은 가이사에 대항하는 왕을 선포하고 로마 제국의 거짓 복음과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런 입장을 갖고 있는 주요 학자들은 어떤 이들인가요?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ley)가 70년부터 주장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어요. 그러다가 5~6년 전부터 N.T 라이트(N. T. Wright)가 명백하게 그 노선을 취해서 그 입장을 강화하는 글과 강연을 하고 있지요. 반부시 반제국주의적 시대 정신과도 관련이 있어요. 냉전 체제가 해소된 후에도 미국은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유지하는 제국주의적 리더십의 위치에 있었어요. 그런데 부시 정권이 들어서서 강력하게 기독교적 근본주의 세계관을 표방하고, 그것이 이라크 전쟁과 이슬람권 적대시 정책으로 표출되자 세계 지성인들의 반발을 샀어요. 그러니까 ('바울 서신에 대한 반제국적 읽기'가) 반부시·반제국주의적 시대 정신과 N.T 라이트처럼 영향력 있는 학자들의 주장이 가세하면서 지난 10년 사이에 많이 확산되었어요.

▲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기획자) (사진 제공 유헌)
최근 한국 지식 사회의 흥미로운 현상을 하나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마르크스주의나 여성주의 쪽에서 볼 때, 기독교가 사회 모순의 진원, 즉 가부장제나 노예제, 자본주의적 착취 등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정당화한다고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학문적으로 진보 진영이나 맑시스트 배경이 있는 학자들이 기독교를, 그중에서 특히 바울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책들을 줄줄이 출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 조르지오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 슬라보예 지젝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에 마오주의자인 바디우의 경우는 '오늘날과 같은 제국의 시대에 맞서는 보편 윤리의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울이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진리 사건'은 김세윤 박사님이 바울 신학에서 '다메섹 경험'을 핵심에 놓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아감벤은 아예 로마서 1:1을 놓고 주석을 썼어요.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이란 개념을 끌어와서 로마서를 해석하고 사회 철학을 전개하는 거지요. 지젝의 경우는 '이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바리케이드의 이편에서 함께 연대하여 대항 전선을 구축하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현상은 서구의 비판적 지성계가 기독교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제국주의적 상황에서 기독교가 오·남용되는 양상과 단절하고 기독교의 사회 변혁적 자원들을 보편적인 장으로 끌어내고자 하는 시도라고 읽힙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청어람에서 이런 주제로 세미나를 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열리는 공간을 한국의 기독 지성인들이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악용하고 오용했다는 말은 정확한 진단입니다. 일반 지식인들이 신약 성경에서 예수와 바울의 혁명적 정신과 보편적 의의 개념을 통한 혁명적 변화의 정신을 마치 새로 발견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들이 그동안 신약 학자들의 책을 안 읽었다는 말이죠. 예수 연구에 있어서 바울 신학을 제대로 한 사람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복음과 바울의 칭의론의 복음이 사회 혁명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모두 인정하고 있어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 모든 가치를 뒤집어엎는 혁명의 복음이었지요.

바울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여러 카테고리로 다시 표현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칭의론입니다. 칭의론의 복음은 출생, 계급, 지식 등 인간적인 메리트를 무가치하게 봅니다. 유대인으로 출생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자유인이라고 해서 높은 것도 아니고, 종교적 선행이나 헬라철학의 깊은 지혜를 쌓았다고 해서 인정을 받는 게 아니에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은혜의 사건을 믿고 은총을 덧입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한다, 그게 칭의론 아닙니까.

칭의론의 사회적 함의를 갈라디아서 3장 28절(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에서 명료하게 선언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의인이 되고 구원받은 복음은 옛 창조 질서의 전형적인 세 가지 구분,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인종적 구분, 남자와 여자라는 성적 구분, 자유인과 노예라는 사회 신분적 구분을 완전히 무효화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하나라고 선언하지요. 바울이 예수의 혁명적인 하나님나라 복음을 사회적인 관계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이방인 믿는 자들과 유대 믿는 자들이 함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엊그제까지 유대 신학자였던 바울이 특수주의를 폐기하고 세계 보편주의로 전환하게 된 것이지요.

칭의론의 복음을 부부 관계에서 적용한 것이 고린도 전서 7장(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한다)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남편과 아내가 절대적 상호 동등성의 관계를 맺고 있어요. 남성 우월성이 전혀 없어요. 여자들이 설교도 하고, 리더십도 취합니다. 바울이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빌레몬서의 내용을 보면 그건 노예를 해방하라는 말이지요. 빌레몬의 집에서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간 오네시모를 바울이 감옥에서 만나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바울이 감옥에서 낳았다고 하지요. 당시는 노예를 은닉해주면 같이 처벌을 받으니까 다시 돌려보내요. 그러나 바울이 뭐라고 편지를 씁니까, 더 이상 노예로 받지 말고 형제로 받으라. 더 이상 노예는 없다. 재림 전에는 법적으로는 네가 상전이고 이 사람이 노예이지만, 그리스도의 새 질서 속에서는 형제로 받으라. 이보다 더 혁명적인 언어는 없어요. 고대에 그렇게 아름다운 편지가 없어요. 맑시즘보다 더 혁명적이지요.

문제는 기독교 역사가 항상 변증법적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과 바울의 칭의론의 복음이 제대로 선포될 때는 혁명적 변화가 나타났어요. 노예가 해방되고 여성이 해방되었어요. 그러나 복음이 올바로 선포되지 않고 세상의 가치와 시대 정신에 의해 왜곡될 때는 성경이 기존의 세상 질서, 기득권 세력의 세계관을 옹호하고 변호하는데 오용되고 악용되지요. 한국에서도 유교적 가부장제를 옹호하기 위해서 교회가 앞장서서 성경을 오용했어요.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도 전서 14장 34~35절인데, 그 본문은 나중에 끼어들어간 구절이거든요, 그것을 앞뒤 문맥도 살피지 않고 무식하게 해석을 해서, 교회에서 여자들은 잠잠하라고만 해요. 바로 앞 장에서는 여자들이 예배도 인도하고 설교하기도 하는데, 그건 읽지 않아요. 고린도전서 7장 4절을 보세요. 남편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말고 아내가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자기 몸을 주장하지 않고 남편이 한다고 해요. 고대 사회에서 이보다 더 혁명적인 말은 없어요.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를 뒤집는 말이죠. 몸은 자기 실존 전체를 의미해요. 남편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철저한 상호주의죠. 그런데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착취와 수탈의 질서를 옹호하는 우를 범했어요.

작년인가요,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한 교수님의 입장을 기사를 접했습니다. 뜻밖에 "고린도 전서 14장 34~35절이 사본학적으로 취약한 본문이다, 그래서 그런 해석은 신빙성이 없다"는 내용이 가장 중요한 논거로 제시되었더군요.

고전 14장 34~35절을 원래 바울이 쓰지 않고 후대에 필사가가 여백(margin)에 쓴 것을 후대의 필사가가 다시 집어넣었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첫째, 문의 위치가 사본학적으로 아주 불안정해요. 다시 말해 이 구절에 대한 위치가 사본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이 위치에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중요한 사본의 배열에 따른 것이지만, 다른 사본들은 이 문맥의 맨 끝에 여자에 대한 내용을 배열하고 있어요.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죠. 가장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이유지요. 둘째 12장 바로 앞장의 문맥과 전혀 맞지 않아요. 나중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만약 바울이 여자가 설교하지 못하도록 썼다면 이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신뢰할 수 없는 신학자가 되지요. 불과 3장 앞인 11장에서 바울이 여자들이 공예배에서 예언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는데 다만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11장에서는 말하라고 하고 몇 장 뒤인 14장에서는 잠잠하라고 하면 스스로 모순이 되는 것 아닙니까? '잠잠하라'만 고집하는 사람은 성경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지요. 신약성경의 훨씬 더 많은 본문들에서 일관되게 가르치는 교훈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바울 복음 전체 체계에 맞지 않고 칭의론 복음의 사회적 문학적 적용에 맞지 않아요. 제가 이 세 가지를 다 밝혔는데도, 아직도 근본주의적 정신이 강해서 그런지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오해를 해요.

▲ 바울이 다시 학계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바울신학의 대가 김세윤 교수가 새 책을 냈다. <그리스도와 가이사-바울과 누가의 저작에 나타난 복음과 로마 제국>. 청어람아카데미에서 '바울과 제국' 세미나를 이끌었던 양희송 실장(청어람 아카데미 기획자∙전 <복음과상황> 편집장)이 지난 3월 27일 김 교수를 만났다.(사진 제공 유헌)
성서학 공부를 하면서 사본을 찾아 들어가다 보면 딜레마에 빠지는 부분이 생기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 같은 경우도 사본적으로 후대의 첨가로 보는 대표적 본문이지 않습니까? 이런 텍스트에 근거해서 설교하기는 힘들어지지 않을까요?

왜 그렇지요? 요한복음 8장은 예수 전승에 들어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의 목사들이 사본학도 공부하고 역사 비평도 공부해야지요. 그런 근본주의적 태도가 성경을 제대로 강해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먼저 바울의 복음 전체와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을 알아야 해요. 바울의 가정 윤리에 대한 대전제는 피차 복종하라는 상호 윤리입니다. 바울이 상호 윤리를 가르치다가 어디까지 옵니까? 고린도 전서 7장 15절, 혼합 결혼 상태에서도 함부로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바울의 대 혁명적인 가르침입니다, 모든 종교는 '부정한 것과 연결되면 부정하다'는 성별의 원칙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뒤집어서 원칙을 적용한다고요. 부정한 자에 의해서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통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불신자 배우자가 거룩해진다고 예수 정신을 가르칩니다. 예수가 그런 정신으로 문둥병자를 만져서 깨끗하게 치유한 거예요. 신자에게는 성령이 있어서, 불신자 아내가 신자 남편에 의해서 거룩해지듯이 불신자 남편도 신자 아내에 의해서 거룩해진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가정 사역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아버지가 가정의 제사장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엉터리죠.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이자 전달자라는 메타포(metaphor, 은유)로 쓴다고 하더라도 적절하지 않아요. 고린도전서에서 신자 아내가 남편에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전달한다면 아내가 제사장 역할을 했네요? 현실에서도 신실한 어머니의 기도와 헌신적 사랑으로 크리스천이 된 남편이 많아요, 반대 경우가 더 많아요? 신학도 모르고 현장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정 사역자라고 고대의 가부장제 주장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신학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토론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교회는 제국주의적이고 반평등주의적이라고 판단하는 거예요.

바울 서신의 반제국주의적 해석들의 개략적 그림을 보여주셨는데, 교수님의 결론적인 입장은 어떤 것인지요. 

바울 서신에 대한 반제국주의적 해석의 기본적인 전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당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평화를 이루었다는 것,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 황제 숭배가 널리 보급되고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주와 구원자로 선포했고, 여러 번 투옥 당했다는 전제입니다. 또 다른 전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로마 제국 이데올로기 간에 존재하는 용어가 병행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황제 숭배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맞서는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느냐는 결론을 도출하지요.

그러나 바울의 로마 제국에 대한 입장은 긍정과 부정을 함께 갖는 변증법적인 거예요. 바울은 로마 제국의 죄악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2장 6~8절, 15장 24~28절, 무엇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을 보면 팍스 로마나의 복음을 완전히 부인합니다. 진정한 안보와 평화, 구원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루신다고 하고, 빌립보서 3장 26~27절에서는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자(soter, '소테르')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팍스 로마나는 진정한 복음의 패러디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로마에 대항해서 싸우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도리어 로마 제국에 순복하라고 해요. 그게 유명한 로마서 13장 1절이지요. 그 구절은 AD 56~57년의 로마 교회의 현실, 유대 반란이 일어나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읽어야 해요. 그러니까 지금 유대 반란이 일어나려고 하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거기에 합류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지요. 바울은 그 반란이 실패할 줄 알았어요.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임박한 종말을 믿었어요. 그때까지 바울은 땅 끝까지 복음을 선포해야 할 임무를 부여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바울에게는 로마 제국의 정치 군사적 안정과 비교적 공정한 로마법과 행정 체계가 자기의 세계 선교를 위한 전제 조전이었어요. 바울은 ‘팍스 로마나’의 상대적 가치를 인식하고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인 거지요.

그러면 바울이 왜 자꾸 관원에게 갇혔느냐? 학자들은 바울이 로마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복음을 전파하고 가이사 외에 또 하나의 왕이 있다고 선포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을 강조해요. 그런데 바울은 매번 석방이 됐어요. 바울은 가이사 앞에서 받을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빌립보서 2장 6~1절, 3장 20~21절의 글을 쓰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어요. 빌립보서를 쓰면서 바울은 주저하기는커녕 도리어 제국의 법정에서 주눅들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거나 ‘찬양하겠다’고 맹세했어요.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무죄로 풀려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고 있어요(빌 1:19).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전에도 여러 번 석방된 경험이 있고, 재판의 공정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겁니다. 재판에서 반혁명적으로 당신의 권세를 무너뜨리려고 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변증해서 석방될 것을 확신한 것이죠. 바울이 만약에 반가이사적 반제국주의적 복음을 선포했다면 친위대가 어떻게 복음을 영접합니까. 그러니까 임박한 종말을 앞두고 선교할 때 사회적 혁명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고 볼 수 있지요. 바울은 로마 제국의 체제가 전체적으로 볼 때 자신의 세계 선교에 해가 되기보다는 득이 되고 무정부 상태나 혼란보다는 분명히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리스도와 가이사>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바울, 누가, 계시록이 각각 원리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 질서와 대립하나 현실 교회의 정황에 따라 적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복음의 원칙을 견지하되, 현실적인 정황에서는 창조적인 활용을 할 필요가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까요?

▲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착취와 수탈의 질서를 옹호하는 우를 범했어요." (사진 제공 유헌)

그렇습니다. 바울도 정치적 대결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노예제를 거부했으니까 사실상 로마 제국의 질서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린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으니 로마 제국의 황제 앞에서 데모하고 습격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아요. 로마의 법 체제 안에서 그 체제가 낳는 사단적 압제와 불평등과 착취의 질서를 따르지 말고 노예를 형제로 대하라고 해요.

누가는 거기서 더 나가서 사회적 실현이라는 차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과 관계는 바울처럼 변증법적으로 봐요. 아우구스투스와 아기 예수의 대조가 있습니다. 동시에 로마 제국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있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때에 하나님나라에 의해서 대체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짧은 중간기 동안에 로마 제국은 교회가 선교를 수행할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보는 거지요.

그러므로 교회는 혁명을 가져오려고 애쓰는 대신, '팍스 로마나'의 긍정적인 면을 활용해 복음 전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그 안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현재화해가는 일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반면에 계시록은 도미티안(Domitian 주후 81~96년) 치세 말기에 쓴 책인데, 아시아 7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계시록의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받았고, 거기에 항거하는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지요. 누가의 이탈리아 지방에서는 황제 숭배가 계시록의 배경이 되는 동반구보다 더 심하지 않았어요.

바울, 누가, 계시록을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면 우리에게 던지는 함축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상황이 달라졌어요. 바울은 임박한 종말론을 기대했어요. 그래서 내일 모레 주께서 임하시는데, 사회 변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임박한 종말론의 압박을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아요. 지금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그리스도의 주권의 현재적 실현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오늘날의 상황에서 둘째 교회가 이제는 작지 않아요. 초대 교회는 겨우 20~30명 모아놓은 상황인데, 지금은 막강한 세력이 되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체제들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을 가졌어요.

셋째, 적어도 서방 세계와 민주화된 한국 사회에서는 전체주의적 압제를 받지 않아요. 가능성이 열린 체계 속에서 산다고요.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바울의 신학과 누가의 신학 히브리서의 신학을 창조적으로 계승해서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합당한 정치를 구현해 감으로써 누가는 하나님나라 구원의 현재적 실현을 사회적 영역까지 보여 주는데 우리는 정치적 영역까지 화해와 하나님나라의 구속을 실현해야 할 의무를 주고 있어요. 그게 창조적 해석학의 의무라고 봅니다. 이 책에서 그런 토론을 해요.

교회가, 특히 목회자가 성경의 원칙을 상기하고 가르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면, 적용은 모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은 원칙을 가르치고, 성도들이 삶의 현실 속에서 대결하고 흥정하고 역할 분담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어요. 그러나 목회자가 복음을 가르치면서 그것의 사회적 함의까지 일러줘서 성도들이 관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판사가 되면 어떻게 복음에 합당한 입법과 적용을 할 것인가, 하나님나라의 샬롬의 실현을 도울 것인가를 해야 합니다. 한국판 서문에도 썼는데, 한국에서 기독교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이 사람들이 복음에 합당한 정치를 하지 못할 때는 '그리스도 복음의 정신에 정배치 되는 정책을 하면 안 됩니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지요. 목회자가 정치에 관심도 없고, 세상의 맘몬 정신에 편승해 무조건 그 사람이 교인이니까 밀어줘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안 되는 일이죠.

목회자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 이 위정자가 복음에 합당하게 하면 그 길로 가도록 뒷받침하고 거기에 위배되면 선지자적인 비판을 해서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소. 하나님의 정책에 어긋난다고 해야 합니다. 부시 때문에 기독교가 얼마나 약화되었습니까? 바울도 로마서에서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에서 모욕을 당한다고 하지요. 예수님도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지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정치가가 되고 위정자가 된다면 세상에서 소금 노릇하고 빛 노릇해서 그리스도인 때문에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말이 들리고,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지요.

김세윤 박사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후 영국 맨체스터대학교에서 브루스(F F Bruce)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바울 복음의 기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홈볼트 연구교수, 싱가포르와 미국 칼빈신학교, 풀러신학교, 고든콘웰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했다. 국내에서는 아세아 연합신학대학 교수, 총신대학신학대학원 교수와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 교회에 대한 소명을 따라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학 박사과정(D. Min)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이광하 / <복음과상황> 편집장

이 기사는 <복음과상황> 5월호에 실렸습니다. <복음과상황>의 허락을 얻어 전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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