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날만한 곳"(A Place to Meet God)
"하나님을 만날만한 곳"(A Place to Meet God)
  • 김영봉
  • 승인 2013.11.26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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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김영봉 목사, '성지묵상' (2)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지난 10월 성서의 땅을 다녀와 전한 설교 시리즈입니다. 본인의 허락을 맡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 와디 럼(Wadi Rum). ⓒ미주뉴스앤조이 전현진  
 
1.
이번 순례 여정에서 가장 많이 본 것 그래서 돌아온 후에도 가장 자주 생각나는 것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뒤덮고 있는 돌산, 광야 그리고 사막입니다. 요르단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선교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연 강수량이 500밀리 이하가 되면 '사막'이라고 부르고, 그 이상이면 '광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동쪽에 있는 요단 강 지역과 서쪽 지중해 가까운 평지에만 숲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 산지와 광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거쳐 사해로 가는 동안에 산지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사막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산들은 나무들이 많아 물탱크요 산소 탱크의 역할을 하지만, 이스라엘의 산들은 나무도, 풀도 자라지 못하는 산입니다. 비가 와도 한 방울 스며들지 않습니다. 누런빛의 황량함이 보는 이의 입을 마르게 할 정도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있는 요르단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 일행은 요르단의 최남단인 홍해까지 내려갔다가, 그곳으로부터 출애굽 여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 왔습니다. 요르단의 남부 지방은 거대한 사막이었고, 조금 더 올라오니 황량한 광야가 이어졌고, 그 이후에는 거대한 돌산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 이색적으로 보인 것은 거대한 돌산의 정상에 도시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리는 빗물을 받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 정상에 촌락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 일행은 요르단 남부에 있는 와디 럼(Wadi Rum)이라 불리는 사막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잘 지어진 텐트에서 지냈으니, 제대로 된 사막 체험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막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 낮에 사막을 걷기도 했고, 달빛이 내려앉은 사막의 밤을 느끼기도 했으며, 새벽녘에 살을 파고드는 사막의 한기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40년을 방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했고, 또한 중대한 고비를 만날 때마다 광야 혹은 사막으로 나가 기도했던 믿음의 선조들을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 사막 혹은 광야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우연히 광야로 나갔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 위해 광야로 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초대 교회에는 사막에서 수도했던 '사막의 교부들'(the desert fathers)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광야와 요르단 광야를 밟는 제 마음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싶은 열망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돌산에 만들어진 굴을 볼 때면 그곳에 자리를 잡고 기도에 전념해 보고 싶기도 했고, 광야에 텐트를 치고 며칠 살아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말만 통한다면 광야와 돌산을 돌아다니며 양을 치는 베두인들(Bedouin)과 함께 지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늘과 땅,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곳에 며칠만 있으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만날 것 같았습니다.

2.
성경에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하갈은 이집트 여자입니다.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하갈은 가족과 친척을 떠나 멀고 낯선 땅에서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주인 사래가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부릅니다. 하갈은 사래의 청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자기 대신 남편의 아들을 낳아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종으로 살고 있지만, 하갈에게도 언젠가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 보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산산이 깨뜨리는 제안입니다. 주인어른의 나이가 85세입니다. 아직 아이를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고는 해도, 그 노인에게 평생을 바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하갈은 이 제안을 받고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주인의 제안이니 거절했다가는 미움 받아 쫓겨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자한 주인 아브람의 사랑을 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자신은 어쩌란 말입니까? 자신이 아들을 낳는다 해도 상속자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은 흠 있는 여자가 되어 제대로 된 결혼 한 번 못하게 생겼습니다.

며칠이 걸렸을까요? 하갈은 마침내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사래가 기대한 대로 얼마 지나자 하갈의 몸에 태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가 생긴 것이 분명해지자 하갈의 말과 행동이 사래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하갈의 태도가 어느 정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종에서 첩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게다가, 정실부인이 가지지 못하는 아이도 가졌으니, 말과 표정과 몸짓에서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지나쳤다면 문제이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나무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래는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합니다.

결국 사래는 아브람을 볶기 시작합니다. 사래가 말하지요.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5절)

매일,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들볶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시작해 놓고서 그 책임을 남편에게 돌립니다. 그런데 아브람 좀 보십시오.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텐데, 하갈과 동침하여 자식을 얻자는 사래의 제안에 아무 대꾸 없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기자 사래가 그 책임을 아브람에게 덮어씌웁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아내에게, 하갈을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합니다. 아브람은 모든 주체적 판단을 내려놓고 아내가 시키는 대로 눈 감으라면 감고 뜨라면 눈을 뜹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렇게 사는 분이 많으시지요? 아브람으로 인해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로 인해 애꿎게 하갈만 고통 받습니다. 사래가 견딜 수 없도록 학대합니다. 이 때, 하갈의 고통이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얼마나 분했을까요? 자기가 원한 것도 아닌데,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핍박을 하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생명도 자식의 생명도 보존할 수 없다고 느낀 하갈은 마침내 가출을 결심합니다.

3.
당시, 아브람은 가나안 땅 남쪽 브엘세바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시나이 반도를 지나면 이집트로 이어집니다. 브엘세바에서 이집트 방향으로는 거대한 사막이 놓여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임신한 여인이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홀로 그 광대한 사막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와디 럼의 모랫길을 걸으면서 하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 그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하갈은 광야를 지나가다가 샘을 발견합니다. 그곳에서 목을 축였습니다. 정신 없이 그곳까지 왔는데,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갈 곳이 없습니다. 미혼모의 몸으로, 빈털털이로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다시 사래의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임신한 여자의 몸으로 광야에서 터를 잡고 살 수도 없습니다. 하갈은 그제서야 자신의 절망적인 운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광야에서 꼼짝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하갈은 자신의 처량한 신세로 인해 많이 울었을 겁니다. 아무 방비도 없는 자신을 누가 해치지나 않을까 싶어 두려웠을 것입니다. 배는 고팠을 것이고, 몸은 아팠을 것입니다. 그렇게 울다 지쳐 잠시 잠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그 때, 주님의 천사가 그를 찾아와 묻습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8절)

하갈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엉겹결에 대답합니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8절)

여기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다. 하갈은 이방인이요 또한 종입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아브람과 사래와는 차원이 다르고 계급이 다릅니다. 아마도 하갈은 집에서 사래와 아브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과 상관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하갈을 찾으신 것입니다. 하갈은 자신을 찾아온 분이 누구인지 알고 얼마나 놀랐을까요? 자신은 그 하나님과는 영 상관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를 찾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의 사정을 물으십니다. 하갈은 너무도 감격하여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9절)

이 대목에서 하갈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위로하러 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불의한 주인을 벌하기는커녕 그 주인을 두둔하고 그 주인에게 복종하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갈의 흥분은 한 순간에 배신감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말을 잇습니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10절)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다시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은 사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갈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낳을 아들의 이름을 알려주시면서 덧붙이십니다.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11절)

하갈은 제 발로 다시 사래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갈 용기와 이유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는 타국에 혼자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혼자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고 계셨고 고난 중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하갈로 하여금 일어나 오던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그리고 그 민족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하갈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하갈이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형편 때문에 광야로 쫓겨 나갔을 때, 그는 하늘과 땅에 홀로 내버려진 것 같았을 것입니다. 하갈에게 있어서 광야는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끝없이 이어진 황토색 광야 그리고 사막은 말 그대로 절망을 상징하고 죽음을 상징합니다. 실상, 하갈은 그 광야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가 실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렇기에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광야 즉 절망과 죽음의 땅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간절해지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주인이 믿는 그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지만, 하늘을 향해 호소했을 것입니다. 누가 있으면 좀 나와 보라고! 하갈이 사막 한 가운데서 고통 가운데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신을 향해 호소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찾은 것입니다. 그 순간, 절망과 죽음의 땅이었던 광야는 희망과 생명의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하갈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형편이 어땠을까요?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래의 학대가 더 심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갈은 그 모든 모욕과 학대를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따로 믿는 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견딜 수도 있었고,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을 참아내고 용서할 수도 있었습니다. 광야는 이런 곳입니다.

4.
이번 순례 여정 중에 요르단의 최남단에 있는 아카바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사막을 여행할 예정이었습니다. 전날의 강행군으로 인해 그 날에는 조금 늦게 출발하게 되어 있어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집사님 한 분과 따로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아주 우연하게 만들어진 자리였습니다. 일상의 대화로 시작한 저희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고, 그 집사님은 어릴 적 마음 아팠던 이야기보따리를 끌러 놓으셨습니다.

그분의 허락을 받고 그분의 이야기의 일부를 나눕니다. 방금 전에 소개한 하갈의 이야기 그리고 광야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전라북도의 한 시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교장이셨고 6남매의 막내로 자랐습니다. 집사님은 불행하게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에 아버지가 숨어 있었는데, 숨은 곳을 알아내려고 인민군들이 어머니에게 지독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집사님은 어머니가 꼭 살아서 돌아오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재혼을 하십니다. 소년은 어린 마음에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잔치 중에 행패를 부렸고, 그날로부터 새어머니와의 길고 긴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형들은 모두 도시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어머니가 들어온 다음부터 아버지는 그 소년에게 집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소년은 공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었는데 부모님이 고등학교 진학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동일했습니다. 너는 집에서 농사 지으라는 것입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친구가 당시 소년이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사다 주었습니다. 소년은 아버지 몰래 원서를 써서 학교에 보냈고, 시험 날에는 버스를 타고 가서 시험을 치룹니다. 당시에는 사흘 동안 시험을 보았는데, 첫 날 시험을 마치고 와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다음 날, 쌀 한 말을 자루에 싸서 아들에게 지워줍니다. 그 도시에 친척집이 있으니 그 쌀을 가져다주고 그날 밤은 그곳에서 자고 셋째 날 시험까지 보고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둘째 날, 쌀 한 자루를 책상 옆에 두고 시험을 치룹니다. 다 마치고 나서 친척집으로 가려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집에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가 있었는데, 자신에 비해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그 아이를 생각하니, 신세 지기 위해 쌀자루를 들고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은 쌀자루를 옆에 두고 학교 교정에 한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어둑어둑 해지자 수위가 와서 나가라 합니다. 학교를 나오니 갈 데가 없습니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간 곳이 열차 역이었습니다.

추운 밤, 열네 살 소년이 역 대합실에 쌀 한 자루를 옆에 놓고 생각합니다. 어디로 갈까? 이 길로 서울로 갈까? 그래서 되는대로 살아볼까? 한 편으로는 겁이 났고, 또 한 편으로는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수하는 길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곧 가출이였고 탈선이었습니다. 그러면 인생은 영 망가지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갈까? 하지만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집안의 문제아로 살기 싫었습니다.

그 때, 소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새어머니로 인해 너무도 괴로울 때, 소년은 교회 전도사님을 찾아가서 불평을 했습니다. 새어머니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여 결혼을 시킨 분이 그 전도사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어쩌자고 저런 사람을 새어머니로 보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고 따졌습니다. 그 때, 전도사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어머니가 그렇게 몸이 불편하고 아파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새벽기도회에 나오셔서 기도했어. 너무 안타까워서 내가, "몸이 불편하니 그만 나오셔요"라고 말씀 드렸더니, 네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내가 열 살짜리 아들을 두고 가야 하는데, 하나님밖에 누구를 의지하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네 어머니가 너를 위해 그토록 기도하셨어. 그러니 하나님이 분명히 네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너를 책임져 주실 거야. 그러니 참고 견디거라.

아, 그 절체 절명의 순간에 그 대화가 떠오른 것은 천사의 음성과 같았습니다. 그 대화를 기억하는 순간, 소년에게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내 어머니가 생명을 바쳐 나를 위해 기도했다면, 그 하나님이 나를 그냥 두시겠나? 전도사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내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이 아닌가?"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하고 피곤에 지친 몸이었지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대면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열 네 살의 어린 소년은 아침에 지고 나온 쌀 한 자루를 다시 짊어지고 어둠 속에서 집으로 향합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늦은 밤에 집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답니다. 하지만 그 날부터 그분은 더 이상 가출과 탈선을 옵션에 넣지 않고, 어머니께서 죽도록 매달려 기도했던 그 하나님을 믿고 온갖 역경과 싸우며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도 했고 유학도 했으며 미국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 칠십에 그분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하십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갈을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하갈의 이야기와 닮았지요? 저는 요르단 남부에 있는 와디 럼(Wadi Rum) 사막을 걷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 내내 하갈의 이야기와 그 집사님의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5.
저에게도 광야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인생의 광야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저를 찾아오셔서 저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고 또한 약속해 주셨습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인생길에서 만나는 고비마다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저를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순례길이 끝날 때까지 저를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제게 남겨진 앞길에도 광야와 사막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광야에서 만나주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저는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제 순례길의 마지막 지점까지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저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광야 이야기가 있으시지요? 광야에서, 그 절망과 어둠의 땅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있으시지요? 그 이야기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하갈의 이야기와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려 드린 이유는 여러분의 광야 이야기를 생각해 보시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기억하신다면, 지금 여러분이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해도 혹은 길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 있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과거에도 광야에서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이제도 만나주실 것입니다.

혹,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한 번도 없다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그 험한 골짜기를 지나 오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몰라서 그렇지, 여러분이 그동안 거쳐 온 광야와 사막과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겸손히 물러 앉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을 찾을 때입니다.

하갈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하갈은 사래의 집에서 자신이 고통당할 때도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셨고 인도하고 계셨음을 알았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그동안 자기 혼자의 힘으로 해 보기 위해서 몸부림 쳤던 것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 이후로 하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그 같은 세계관의 변화가 오늘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혼자서도 잘 해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혼자서는 못합니다. 주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그분과 함께 해야만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은 사막이나 광야가 아니라 푸른 초장 맑은 시냇가에 살고 있습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누리는 행복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에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순례 여행 중에 하루는 아주 좋은 환경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다들 너무 좋다고 감탄을 하자, 어느 교우께서 그러십니다. 좋기는 하지만 취하지는 말아야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의 메모장에 새겨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에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에 취하는 순간,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뒤흔들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큰 돈 들여서 멀리 광야나 사막을 찾아 여행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눈 감고 하나님에게 눈 뜨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뜰에 나가 하늘 아래에 무장 해제하고 서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실은 광야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극장의 주인공처럼 살고 있다 해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면 하룻밤에 끝나고 마는 연극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가 빛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어둠이 되고, 우리가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재앙이 됩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면 자주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나님이 전부이심을 잊지 않도록,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달렸음을 기억하도록, 자주 광야로 나갑시다. 하나님을 얻으면 광야가 푸른 초장이 되며, 하나님을 잃으면 푸른 초장도 사막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얻으면 다 얻습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광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이며,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때를 자주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광야에서 하갈을 찾으신 주님,
광야에 설 때마다
저희를 찾아주신 주님,
저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십니까?
오, 주님,
저희는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
높임 받아 주소서.
아멘.

김영봉 목사 / 와싱톤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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