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신학을 역행하는 무속 교회
자기 신학을 역행하는 무속 교회
  • 신성남
  • 승인 2014.03.23 19:48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든 무속 종교의 뿌리는 기복신앙
   
 
  ▲ 신성남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근세기에 들어 개신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유럽 교회들이 쇠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동안 사실상 국교나 다름없이 그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던 미국의 교회들 또한 일부 변질된 복음의 약발이 다하여 갈수록 활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도처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건강한 교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현대 개신교는 밖으로는 세속주의의 거대한 도전을 받고, 안으로는 기복주의를 극복하지 못 해 서서히 퇴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지금의 속도로 교인 감소가 계속 진행된다면, 다음 세대에는 교회를 지키는 신도가 과연 얼마나 남을지 크게 우려가 되는 상황입니다. 아마 전방위적으로 종교적 대공황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급속한 양적 성장과 타락은 세계 교회사에 특별부록을 하나 별도로 추가해야 할 정도로 매우 독특합니다. 선교 초기에는 순수했던 교회가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냉전을 거치고, 그리고 경제 부흥기를 거치는 동안 점차 그 처음 사랑과 감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변질과 기복적 성장

본격적인 변절이 시작된 것은 불과 한 세대 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의 사회적인 변혁은 이런 변질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습니다. 가시적 성과를 보인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교회의 외형을 바꿀 정도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배고프던 시절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형 교회들의 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천막살이 하던 어느 교회가 그 출발의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도들이 열심히 헌금하여 목 좋은 자리에 대형 건물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일마다 반복된 신명나는 복 노래에 민초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대미문의 2부, 3부, 그리고 4부 예배가 계속 추가되었지만 그래도 도리어 자리가 부족했습니다. 대박이 터진 것입니다. 아울러 무슨 몇 박자 축복이니 뭐니 하는 듣보잡 유행어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꼴뚜기들이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서도 고기를 얻어 먹을 수 있다더니, 머리 좋고 내공이 높은 한국인답게 잽싸게 '복사 신공'을 발휘했습니다. 그 결과 도시마다 대형화의 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호황이 온 것입니다. 건물만 세우면 자리가 채워졌습니다. 이러자 목사직이 제법 먹고 살만한 직업으로 인식되고 심지어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덩달아 신학교 지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당연히 은행도 돈을 잘 빌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빚 내서 교회당을 짓는 비상식이 유독 한국에서만은 아주 자연스러운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보통의 경우 교인이 늘어서 건물을 확장하는 게 정상이건만, 이 신바람나던 시대엔 거꾸로 교인을 늘이기 위해 먼저 건물을 키우는 희한한 일이 다반사였고, 또한 그런 과도한 성장 욕망이 '믿음'이란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었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건물을 키우고 나니 이젠 밀린 빚도 갚아야 하고 또한 자리도 더 채워야 해서 더욱 열심히 복을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교회에서는 그 '복'이란 말을 빼면 아예 설교가 안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십자가의 '복음' 대신에 맘몬적 '기복'이 교회의 안방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내에 무속적 기복신앙이 깊히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게  된 하나의 과정입니다. 여기에 추가로 미국산 '성공주의'가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도 아마 부인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기복신앙에 길들여진 교인들

현재 세계 개신교 대부분의 교파들은 신학적으로 '복음주의'라는 긍정적인 연대 속에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는 '복음'으로 위장된 '기복신앙'이 도리어 정통 신학을 압도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세속적 복'이 ' 영적인 복'을 밀어낸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사실 이 대목에서는 교파 구별이 무색하고 교단 차이도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멀쩡하던 외국 교단들도 한국에 오기만 하면 점차 이상해집니다. 장로교는 '기복적 장로교'로 흔히 변질하고, 감리교는 '기복적 감리교'로 변색됩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교단이 들어 오든 결과는 비슷합니다. 그래서 실제 자기 신학의 바른 가르침마저 역행하며 엉뚱한 기복 행위에 몰두합니다. 이러니 이름만 보수, 진보, 또는 정통이지 실제 교인들의 삶은 거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멀쩡하던 분들도 교회만 나가면 이상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를 무당이나 교주처럼 모시며 오로지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 결과 루터든, 칼뱅이든, 웨슬리든, 그리고 그 어떤 신학이든 그저 "복 많이 받아 잘살아보자"는 이 소박하고도 단순무지한 한국형 '비나이다 신앙' 앞에서는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 신학  따로 삶 따로인 '따로 국밥'이 된 것입니다.

더구나 60억 원이 넘는 목돈을 과시한 어느 대형 교회의 한 세습 목사는 "본래 가난하고 불우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예수를 잘 믿어서 부자가 되어 잘산다"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부를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도들은 또 부러운 눈길로 아멘을 열창합니다. 이러니 저런 동네에서 무슨 예수님의 '가난한 삶'과 '십자가 정신'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단지 기름기 흐르는 중세적 '성직주의'가 야하게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정말 심각한 문제는 삶에 지치고 배고픈 서민들은 물론이고, 더욱 큰 부자가 되고 싶었던 상당수 중산층도 모두 이 기복 신앙의 가여운 희생자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패한 종교는 신도들을 우민화하며 그 종착역이 반드시 기복으로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죄로 타락하여 소경이 된 인생들에게 만사형통과 만수무강이란 복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단 이 기복이란 고질병에 감염이 되면 교회는 반드시 성공주의와 성장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귀족화,  대형화, 그리고 종교화의 유혹에 양심까지 내어주며 바리새인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이쯤 되면 가난한 사람들도 눈에 안 보이고, 사회 정의도 관심없고, 그리고 억울하게 압제받는 사람들도 경시하게 됩니다. 오직 돈과 복과 명예와 높은 자리만이 크게 보입니다.
 
맹신은 욕심에 기인한다

그런데 맹신은 단순히 무지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심 때문에 생김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말만 믿는 것이 맹신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도들의 이런 순진한 욕심을 가장 잘 이용하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바로 '귀족 목사'들입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처럼 교회에 충성하고 복을 빌어 모두 무병장수하거나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다 부자가 되어 건강하게 살고 있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아프고 가난한 분들이 많습니다. 경건한 목사님들도 중병에 걸리고 신실한 장로님들의 사업도 자주 망합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무조건 모두가 건강하고 부자로 사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그런 유혹을 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빈부나 신분에 관계 없이  현재 자신이 선 그 자리에서 신자답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바른 성도라면 사도바울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2)."라고 자족하는 자세를 가져야 마땅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물론 어쩌다 간혹 돈을 열심히 바치고 부자가 된 분들이 더러 있기는 하겠지만 이는 단순히 확률적인 결과이고, 요즘 상당수의  신도들은 복과는 전혀 관계 없이 양의 탈을 쓴 종교 상인들에게 앵벌이만 당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신도나 목사가 한마음으로 헌신과 헌금의 동기가 그처럼 불순한데 과연 진정한 복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들이 설치한 덫에 걸려 종교라는 이름의 뽕을 한번 맞으면 맹신을 벗어나기 매우 힘들고 나이 들어 노인이 될 때까지  주머니 용돈마저 털리며 '주님를 위한 고난'이 아닌, 전혀 쓸데 없이 '사서 고생'을 하며 살게 됩니다.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보십시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대를 이어 틈만 나면 자기 종교의 사원을 찾아 한평생 돈을 열심히 바치지만, 과연 그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복으로 변질된 종교에 충성하는 신도들의 전형적인 일상입니다. 하여튼 세상의 모든 무속적 종교는 예외 없이 기복신앙이지요.

그런데 일부 교회들이 지난 수십 년을 이런 식으로 양들을 기만하고도 과연 무사할 리가 있을까요. 때가 차니 점차 그 거짓된 목회의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복 타령 목사가 유죄 판결을 받고, 공금 횡령 목사는 감옥에 가고, 성추행 목사는 짤리고, 거짓말 잘하는 목사는 징계당하고, 그리고 몰염치한 세습 목사들은 국민들의 강력한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회의  이런 부끄러운 모습들은 마침내 전체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불신으로 이어져 급격한 교세 몰락을 촉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 퇴보의 주범은 기복신앙

동시에 그 맹신이라는 난치병의 부작용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감염되면 다음과 같은 비정상적인 증상이 흔히  발생합니다. 기복 설교에 환호하고, 교회 세습이 예뻐 보이고, 공금 횡령도 좋게 보이고, 성추행도 대수롭지 않고, 교회 장부 숨겨도 관심 없고, 강도사 경력 날조해도 모른 척하고, 교권 독재해도 박수치고, 삯꾼 목사도 짝사랑하고, 교회 정관을  파괴해도 멍청히 바라만 보고, 그리고 표절 정도는 그냥 간단히 눈 한번 살짝 감아주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요즘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일부 교회들에서 만연하고 있는 유행성 맹신 질환의 진정한 정체입니다.

참된 성도들은 속이 타고 안타까워 눈물로 기도하건만, 이 맹신도들은 그저 담임목사의 무속적 선창에 따라 오로지 주여 삼창이나 아멘 그리고 할렐루야밖에 모릅니다. '박수 무당'과 '박수 부대'의 완벽한 궁합인 셈이지요. 하여튼 이들 중 상당수는 성실하게 일한 만큼 잘살 생각은 별로 안 하고, 종교적 미신에 의존해서 복을 듬뿍 받겠다고 예배당을 성황당처럼 신성시하며 지극 정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고 참다가 지쳐서 이젠 이런 망칙한 꼴은 차마 더 이상 못 보겠다고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이 급증하고 있습 니다. 그러니 이분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교회를 떠난다고 함부로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그 덕분에 이제 한국교회는 총체적인 우민화와 맹신화를 거쳐 급속히 나락의 길로 향하고 있습니다. 유럽 개신교가 무려 500년에 걸쳐 이룬 흥망성쇠의 장구한 역사를 거룩한 한국교회는 단 100년만에 당차게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문제는 잘 알지만 그 해결의 길이 너무 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자조적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개신교가 과연 무엇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득권의 단맛에 심취한 중대형 교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회개하고 그 망국적인 기복 설교를 멈출까요. 아니면 맹신도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기복신앙을 버릴까요. 한 해 수백여 개의 무인가 신학교에서 만 명 이상의 목회자들이 마구 양산되어도 최소한의 통제조차 불가능한 이 암담한 현실에서 바른 회복을 기대하기란 정말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더욱 웃지 못 할 일은 그나마 이런 맹신도들이 공교회를 굳건히 지키고 있어 적어도 한 세대 정도는 더 외적 붕괴를 늦춰 줄 수 있다는 기막힌 현실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한국 무속 교회의 비극적 역설입니다. 즉 외적 성장을 주도한 것도 본래 기복신앙이고, 급속한 몰락의 주요 원인도 기복신앙이고, 그리고 그 몰락을 잠시 늦추고 있는 것 역시 이 기복신앙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남은 그루터기가 새로운 희망

그러나 헤롯성전처럼 무너질 것은 빨리 무너지고, 세울 것은 다시 세우는 것이 옳습니다. 중세 교회처럼 부패한 교회가 더 흥해서 뭘 어쩌자는 것입니까. 지금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건전하고 바른 교회를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의 각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는 더욱 소중히 가꾸고, 양복 입은 무당이 안방을 차지한 교회는 그 무당을 속히 몰아내고, 그리고 이미 강도의 소굴로 변절한 교회는 즉시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교회의 그루터기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기복적 성장에 집착하지 말고 순수한 복음을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인내하고, 주고, 그리고 나누는 것임을 세상에 진솔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필자는 성도들 모두 무조건 가난하게 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연보를 적게 내자고 호소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봉사도 대충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목회자들과 함부로 맞서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열심히 일해서 잘살고, 연보 많이 하고, 땀흘려 봉사하고, 그리고 수고하는 직분자들에게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이런 귀한 것들이 불순한 종교인들에게 역이용 당하여 거꾸로 우리 신앙의 본질을 삼키고 우상이나 맹신이 되게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는 이미 차고 넘치게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 외에 무슨 대단한 복이 더 있다고 이 맘몬적 기복주의에 굴종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언제 단 한번이라도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복"이라고 하신 적이 있었던가요. 도리어 부자에게 화가 있다고 저주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6:24)." 그런데 이런 분명한 말씀을 보면서도, "예수 믿으면 잘산다"는 어떤 설교자들의 생거짓말이 도대체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성도에게는 사업이 어려워도 복이고, 흥해도 복입니다. 키가 작아도 복이고, 커도 복입니다. 자식이 좀 부족해도 복이고, 잘나도 복입니다. 교회 생활이 힘들어도 복이고, 평안해도 복입니다. 못 먹어도 복이고, 잘 먹으면 더욱 감사한 복입니다. 만일 이를 부인한다면, 그는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각종 프로그램과 종교적 열심이 난무하는 수려한 교회들이 차고 넘치건만, 정작 그 속에서 예수님의 가난한 삶과 그 중요한 의미는 점점 잊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십자가 복음을 따르는 진정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사람이 만든 관습적 틀에 무심코 안주하는 기복적 종교 생활을 하고 계시는지요.

기복신앙은 사도들이 전해준 바른 복음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
  
신성남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겸손자 2014-08-28 15:03:44
오랜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을 많이하면서도, 기성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고있음에, 그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건만, 이 글을 읽고 속이다 후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교회 열심히 다니고, 기도 열심히하고, 헌금생활 특히 십일조 떼먹지말고 잘하고, 봉사 열심히하고, 교회에서 주어진 직분에 헌신하고...등 등,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는?? 다니엘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어디로 가고, 가정 행복하고, 자식 잘되고, 건강하고, 사업 번창하고,복 받기위해 다니는 교회라며는 다른 종교와 틀린것이 무엇이 있을까? 호세아 선지자의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라는 말씀이 생각나며, 맹신의 신앙생활을 덮고 좀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하게하는 정말로 좋은 글이군요.

바두기 2014-04-01 01:45:04
전 JongSoo Yoon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물론 기복신앙이 잘못이라는 데에도 십분 공감합니다. 흑백논리로 한가지가 옳으면 다른게 그른게 아니라 이건 균형을 잡아야 할 문제입니다.

아이가 사탕을 사달라고 조른다고 "넌 내가 호구로 보이냐?"고 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커도 갖고 싶은게 있으면 부모에게 간청할 수도 있고 조를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그걸 직접적으로 들어주어도 또 거절해도 다 아이를 위한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와의 신뢰관계 안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탕을 안주셔도 여전히 날 사랑하시고 돌봐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부모가 자기 말을 안들어준다고 해서 부모를 부인하거나 집을 나간거나 할 때이겠지요. 또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양아들이 되거나 어떻하면 부모님의 돈을 더 많이 빼먹을까 하고 궁리만 한다면, 거기에 부모자식의 신뢰관계가 없고 그저 돈으로 연결된 관계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이땅에서 잘 먹고 잘 살 궁리로 교회를 다닌다면 정말 윗글의 제목처럼 무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아들에게 "너 아이스크림 먹을래?"하고 물었을때 "괜찮습니다. 전 그것땜에 아버지 아들이 된 것이 아니옵니다"하고 정중히 거절한다면 좀 머쓱할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아빠 나 저거 사주면 안되?하고 솔직하게 물어보는 아들이 더 귀여울 것 같습니다. (물론 아들의 나이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원하는게 있으면 하나님께 간구하세요. 그건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들 때문만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간구를 안해서 받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열심히 간구하고 응답받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세요. 직접적으로 안주셔도 날 위해 안주셨겠거니 하시고 감사하세요.

한강 2014-03-30 08:19:21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JongSoo Yoon님은 자식이 잘하면 복을 주고 잘못하면 저주를 합니까? 레위기 26장,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저주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에 오면 징계라고 표현됩니다. 아버지의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상도 주시고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들은 반드시 신약의 관점으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님처럼 잘하면 복을 받고 잘못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이해하시는 것은 신약적 재해석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구약 이해입니다. 그것은 곧 유대교입니다.

DK 2014-03-29 08:04:36
아래 JongSoo Yoon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당신이 원하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잘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