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울리는 '신문고' <또 하나의 약속>
영화로 울리는 '신문고' <또 하나의 약속>
  • 최은
  • 승인 2014.03.27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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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포스터.  
 

억울함이 이 땅에 가득하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한국 영화의 대세가 된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개봉된 실화 영화들의 내용만으로도 대한민국의 미시 근현대사를 다시 써볼 수 있겠다 싶다. <살인의 추억>(2003)부터 <실미도>(2003), <그놈 목소리>(2007), <추격자>(2008), <도가니>(2011), 그리고 최근의 <26년>(2013), <집으로 가는 길>(2013),< 변호인>(2013)에 이르기까지, 공사를 넘나드는 범죄와 폭력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이 영화들은 저마다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를 찾을 수 없거나, 찾았어도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한다. 이들에게는 책임 있는 수사관이나 변호인, 통역인이 필요하고, 최소한 자신들의 사연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누구나 수사관이 되어 미결사건을 파헤칠 수 없고, 사법고시에 도전하거나 프랑스어에 능통할 순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나아가 함께 울어주는 일 까지도. 이 시대 영화는 어쩌면 가장 쉽게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당혹스러워진다고 말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거나 주먹을 불끈 쥐게 되고 더러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싶기 때문이다. 영화 보기의 경험이 법률 개정으로 연결된 <도가니> 같은 예가 없지 않으나, 분노 외에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실제로 냉소와 좌절을 낳기도 한다. 과연 소수의 상영관과 개봉 전 외압설에 시달리던 <또 하나의 약속>은 또 하나의 ‘도가니법’을 역사에 남길 수 있을까? 영화는 이 시대에 무슨 일을 더 해낼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멍게와 울산바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20대 초반의 윤미(박희정)는 수원의 진성 반도체에서 일한 지 2년 여 만에 백혈병을 얻었다. 투병중인 윤미에게 인사과 이보근 실장(김영재)이 찾아와 퇴사를 권하고, 윤미는 백지 사직서에 지장을 찍는다. 산재를 신청하지 않는 조건으로 4천만 원의 치료비를 주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그 와중에 윤미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 중 유사한 희귀질병을 얻은 이들이 여럿이며, 회사가 이를 은폐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부터 약자들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된다. 윤미의 부친 상구(박철민)와 노무사 유난주(김규리), 다른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연대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故 황유미 씨와 그의 부친 황상기 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영화이다. 그런데 그것은 영화의 비유를 따르자면, 수많은 ‘멍게들’과 ‘큰바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울산바위가 왜 설악에 있는지 아느냐고, 택시운전사인 한상구가 손님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알려주기를, 조물주가 금강산에 놓을 최고의 바위를 뽑는다는 소문을 듣고 금강산을 향해 가던 울산의 큰 바위가 추위와 큰 덩치 탓에 더 이상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눌러앉아 그리 되었단다. 주저앉은 것은 울산바위만이 아니다. 어릴 때 유충으로 바다를 떠돌던 멍게는 살 만 한 바위를 찾으면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식물’이 되기로 한다. 그간 조류와 위험을 감지하는 일에 바삐 사용하던 뇌와 신경계 조직은 소화를 시켜 없애버린다. 가만히 있어도 먹이가 떠내려 오는 안전하고 풍요로운 곳에 살자면 뇌 따위는 필요가 없어지는 모양이다.

영화의 초반과 중반에, 각각 두 차례씩 반복되는 이 두 이야기는 <또 하나의 약속>에서 중요한 유비(analogy)로 작동한다. 문제 일으키지 않고 조용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었던 윤미네 가족부터, 진성의 근로자들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또라이’로 만들면서 영화는 “또라이가 아니면 그들과 싸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어온다. 언제까지 멍게처럼 큰 바위처럼 거기 얹혀 살 거냐고. 당신의 뇌는, 신경조직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 질문은 모처럼의 감각으로, 꽤 아프다.

‘또라이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기계복제시대 예술작품으로서 영화가 예술의 사회적인 기능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한바탕 눈물과 춤과 웃음으로 제의적인 절차를 마무리하고 일상을 변함없이 살아가도록 하는 기존의 예술양식에 비해, 보여주고 전시하는 것에 불과한 사진적인 예술로서의 영화는 오히려 ‘기계화된’ 현대인의 일상을 직시하게 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힘을 지닌다. 그래서 벤야민이 보기에 영화는 굳이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나로 말하자면, 영화의 예술적인 만듦새는 그래도 중요하고, 이 고단한 세상에서 어떤 영화는 여전히 ‘제의적’이어도 좋겠다고 믿는 쪽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통찰은 실화를 다룬 일련의 한국영화 사이에서 <또 하나의 약속>이 갖는 의미를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냉정하게 말해서, <변호인>이 제의적인 가치가 뛰어난 영화라면, <또 하나의 약속>은 전시가치가 돋보이는 영화이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아직 현재인 일에 대해(재판의 항소심이 진행중이다), 따라서 향수가 아니라 ‘실천’(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한두 사람의 또라이가 아니라 집단 서식하는 멍게군단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실천으로 기능했던 <도가니>와 비교하더라도, 이 싸움은 훨씬 고되다. 윤미네 가족의 적에 비하면, <도가니>의 악인들은 차라리 만만하고 힘없는 편에 속할 지경이다. 적어도 그들은 국회의원과 국가의 세 아래 있었다. 반면 진성그룹은 이미 최고권력 위에 군림해 있다. 이보근의 말마따나, 이 나라에서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 아니던가.

그렇다면 ‘땅에서부터 호소해 오는 아우의 핏소리’(창 4:10)같고 억울한 이들의 신문고 같은 이 영화의 외침은 어떻게 ‘나랏님’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슬프고 좀 비루하지만, 어쩌면 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는지 모른다. 그들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상은 표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어차피 우리에겐 표면에 불과한) 그들의 본질을 공격하는 것. 10억을 통쾌하게 거절했던 상구의 가족들처럼 말이다. 평범한 우리에게 10억의 유혹이 찾아올 리 만무하나, 이 작은 ‘상업영화’를 위해 8천 원을 기꺼이 지불하는 일에서부터, 법 개정을 위한 서명에 동참하거나 때로 대기업의 상품이 주는 편리함을 거부하는 일까지, 갓 시작된 이 싸움을 거드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국가가 국민을, 자본이 소비자를 두려워하도록 만들면 된다.

흠, 내 휴대폰의 약정기한이 오늘로 1년 하고도 10개월 하루 남았다.

최은 / 영화예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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