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예배를 바라보는 신학생의 고언
추모 예배를 바라보는 신학생의 고언
  • 미주뉴스앤조이
  • 승인 2009.06.0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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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예배를 둘러싼 논쟁을 보며

▲ 드류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5월 27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예배를 했다.
I. 들어가는 말

지난 5월 27일 드류대학교(DrewUniversity)에서 '故 노무현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추모 예식'이 드류대학교 신학대학원 한인 학생회와 유니온신학교 한인 학생회 공동 주관으로 거행됐다. 추모 예식 이후, 인터넷 상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죽은 비(非) 기독교인에 대한 추모 예식이 기독교에서 가능한가?' 하는 논쟁이 시작됐고, 추모 예식을 준비한 당사자들 또한 동일한 질문을 공개적으로 받았다. 본 글은 이러한 일련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드류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예배와 예전의 역사와 신학을 연구 중인 두 명의 목회자가 작성했다.

신학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돕고 섬기기 위해 있는데 때로는 '도전'과 '자극'을 통해 기능한다. 기독교 2000년 역사가 이러한 순기능과 역기능을 반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들이 바라기는 이번 추모 예식을 계기로 촉발돼 조명되는 '예배와 예식에 대한 관심'이 목회적 돌봄과 선교적 차원에서 교회와 신앙 공동체를 돕고 섬기는 순기능이 되기를 바란다.

II. 몸말

1. 추모 예식이란 무엇인가?

공식적으로 한국 기독교에서 영어의 'Memorial Service'에 해당하는 용어는 '추모 예식'(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혹은 '추모식'(기독교대한감리회)이라고 표기한다. 과거에는 '추도 예배' 혹은 '추모 예배'라고 표기했다. 그렇지만, 새 예배서는 일반 예배 (General Service, '주일 예배'와 '매일 기도')와 특정한 상황과 목적으로 드리는 의식을 구분하기 위해 '예식 혹은 상황 예식'이라 표기한다. 예식은 예배와 비교할 때, 보다 실용적이며 순서와 형식에 있어 유연성이 있는데, 새롭게 출간된 기독교대한감리회 새 예배서는 기독교 예식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예배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기독교 예식은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어떤 행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형식이나 절차다. 그러므로 예배와 예식을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장례식이나 결혼식은 누가,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행하느냐에 따라 예배가 될 수 있고, 단순한 기념행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새 예배서, 2002, p.13).'

장로교 통합 쪽의 예배서도 예식과 예배와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예식은 한결같이 예배 행위로 이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출생, 결혼, 죽음, 임직, 건축 등 삶과 직결되고 교회 생활과 관계된 모든 예식이 예배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언제나 예배의 정신은 신앙과 경건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표준 예식서, 1997, p. 6).'

지난 5월 27일 드류대학교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예식을 '故 대한민국 16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추모 예배'라고 표기했다. '추모 예식' 혹은 '추모식'을 '추모 예배'로 표기한 이유는 관례적으로 한국 교회에서 '예식'을 '예배'로 표기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장례 예배·입관 예배·발인 예배·결혼 예배·입당 예배·건축 예배·입주 예배·개업 예배·봉헌 예배 등등 -한편 각 교단의 새 예배서는 이들 모두 장례 예식·입관 예식·발인 예식·결혼 예식·건축 예식·입주 예식·개업 예식·봉헌 예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예배와 예식은 구별된다. 예식은 성도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필요가 있을 때 교회가 유연성을 발휘하여 제공하는 목양적, 선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 모두 영어로 그런 예식을 목회 예식(pastoral rites) 이라고 표기한다. 관례상 'service'도 사용한다. 장례 예식(funeral service)이 가장 좋은 예의 하나이다.

따라서 '추모 예배' 표기는 '한국 기독 언론에서 통상적으로 표기하고 있는 용어를 함께 쓰자'는 판단과 '한국 교회의 관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사용됐음에도, 명백히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추모 예식을 준비했던 위원들의 실수에서 비롯됐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예배 예전학의 역사와 신학을 전문 분야로 선택해 수학중인 필자들이 간과한 부분이다.

이 실수가 큰 논쟁의 단초를 제공했기에 용어를 선택함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따라서 '추모 예배' 보다는 '추모 예식' 혹은 '추모식'이 정확한 표기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이제부터 '비기독교인을 위한 추모 예식(추모식)이 기독교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필자들의 연구와 소견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2. 기독교 추모 예식의 역사

▲ LA에서 열린 분향제. 한 동포가 벽면에 글을 남기고 있다.
기독교 예배 역사 속에서 지켜져 내려온 '추모 예식'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추모와 비슷한 개념인 'Anamnesis'이다. 이 용어는 단순히 기억 혹은 추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구속의 역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구원사를 기억하고, 지금 현재에도 현존하는 것을 믿고 증언하며, 나아가 말씀 속에 앞으로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약속을 기억하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을 '주일 예배'와 '매일 기도' 를 통해 기억·회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추모하며, 앞으로 있을 약속을 고백·신뢰하는 믿음의 삶을 신앙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간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초대교회 예배에서부터 순교당한 믿음의 선진들을 추모하는 예식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순교당한 초대 교부였던 폴리캅에 대한 추모 문헌으로부터 시작해 어거스틴의 고백론에 나타난 그의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추모의 글들을 살펴 볼 때, 추모 예식은 초기 기독교부터 행해진 예식이다. 그렇지만 추모 예식 속에서 순교당한 교부들 혹은 추모를 받는 신자들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 추모 예식 속에서 오직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셨다. 다만 그들(추모 대상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행하였던 거룩한 행적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회상하고, 예식에 참여하는 신앙 공동체 또한 그분들의 믿음을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하는 예식이었다. 이러한 예식은 천주교와 개신교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 존속해온 예식 전통이다.

이러한 신자에 대한 추모의 예식 전통은 'All Saints Day'라는 예식으로 천주교 뿐 아니라 미국 성공회(ECUSA), 연합감리교회(UMC), 미국 장로교회(PCUSA), 미국 루터교회(ELCA)와 같은 개신교 교회들에서도 1년에 한 번씩 드려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추모하는 대상도 성인 혹은 성자 –이 용어가 천주교에서 사용되는 것이어서 거부감이 든다면, '우리의 믿음의 본이 된 선진들'–뿐 아니라 'All the baptized', 즉 세례를 받고 사망한 교인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사망한 교인들–까지도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연합 감리교회의 예식서인 'The United Methodist Book of Worship'을 보면,

'All Saints (November 1 or the first Sunday in November) is a day of remembrance for the saints, with the New Testament meaning of all Christian people of every time and place. We celebrate the communion of saints as we remember the dead, both of the Church universal and of our local congregations. For this reason, the names of persons in the congregation who have died during the past year may be solemnly read as a Response to the word (The United Methodist Book of Worship, p.410).'

라고 기술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된 'the communion of saints'란 개념은 사도신경에 있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 사도신경과 한국어 번역을 보면 같은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한국 개신교의 추모 예식

▲ 한국은 예로부터 조상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한국 선교 초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이를 우상숭배로 여겼을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한국 개신 교회에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전통 그리고 북미 교회 전통에서 존속해 온 이러한 형식의 추모 예식이 없다. 그 이유는 한국 개신 교회의 추모 예식은 서구 교회의 성도 중심 즉, 신앙 공동체 중심의 추모 예식이라기보다는 가족별 추모 (이것은 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를 우선했기 때문에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추모 예식이 시작 된 것이다.

참고로 학자들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이 거의 대부분 죽은 자들에 대해 교회가 배려하는 전통을 몰랐거나, 한국의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겼기 때문에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드류대학교 신학대학원 예배·예전학 안덕원 교수의 '한국 감리교 추모 예식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서 추모 예식은 선교사나 교단에서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1897년 정동제일 감리교회 평신도였던 이무영 성도가 비기독교인이었던 자기 모친의 기일에 어떻게 하면 기독교적으로 효도와 전도 차원에서 예식을 행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고안해 낸 것이 그 시초이며, 아펜젤러 선교사가 발행했던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September, 1897)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나온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예는 선교지 교회 예식들에서 쉽게 그리고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예식에는 소위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토착민들의 문화·전통·상황, 그리고 그들 고유의 얼과 정서가 많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교단과 교회 인준에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한국 감리교의 경우 1934년에 이르러서야 교단에서 추모 예식을 정식으로 인준해 예배서에 활자화 된다. 한 가정의 비공식적 예식에서 공식적인 문서로 활자화 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47년이 걸린 셈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는 대부분 예배 예식서에는 추모 예식에 대한 내용이 활자화 됐다. 한국 개신 교회 교단마다 추모 예식이 예식서에 들어온 시기는 조금씩 상이하지만, 각 교단들이 출판한 예식서들 속의 추모 예식들은 신자와 불신자를 위한 추모 예식을 따로 구분해 놓거나 신자와 불신자를 위한 기도를 다르게 만들어 놓는 등, 불신자들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 개신교 예식서들이 추모 예식 과정에서 종교간 충돌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협조를 구해 무리 없이 진행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목회적 돌봄의 필요에 의해, 그리고 기본적으로 선교 지향적인 상황 예식의 성격상 비기독교인을 위한 추모의 기도나 예식을 여러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예식서들은 오랜 수정과 보완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고 지속적인 신학적 토론 끝에 활자화 된 것이다. 그러므로 비기독교인의 추모 예식에 대해 시정되어야 할 요소가 있다면, 그 예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서구의 대부분의 교회들과 한국의 예장통합·기장·기감·기성 등 주요 교단 본부와 대화를 나누어야 할 사안이다.

4.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추모 예식의 가능성에 대한 신학적 고찰

그렇다면 '어떻게 믿지 않고(비기독교인) 사망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추모 예식이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필자들의 소견은 아래와 같다.

(1) 추모 예식은 '고인을 예배하는 시간과 장소'가 아니다. 이 예식 속에서 영광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배는 영어로 'Worship' 혹은 'Service'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께 그 성품과 존재하심과 일하심에 합당한 가치(Worth + Ship)를 돌려드리며, 그러한 가치를 지니신 분을 호렙산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결단하는 거룩한 시간과 장소라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그러한 주님께(을) 혹은 주님의 말씀과 뜻을 봉사한다(섬긴다)는 의미에서 'Service'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 예배의 대상은 당연히 삼위일체 주 하나님이시다. 예배는 주님이 주시는 떡과 잔을 신앙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시간과 장소로 비유할 수도 있다.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 주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배에 참여하는 주체는 산자와 죽은 자를 포함한 모든 만물이다. 예배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떡과 잔, 평화의 음식을 신앙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시간과 장소'로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밥상 공동체'라고 일컫기도 한다. 예수는 당시 비유대인들인 이방인들, 오늘날로 말하면 비기독교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고, 그를 배신했던 가룟 유다와 떡과 잔을 나누었다. 그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교회와 성도들을 목양하라고 부탁했다. 더욱이 예수는 유대인들이 '개'로 취급한 이방 야만인, 사마리아인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선민'과 '비선민'이라는 선을 그어 선민의 안전지대를 확보하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교만을 경고한다.

최초 교회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Remember me!)'라고 단 두 마디를 외친 강도 한 사람이, 예수와 함께 최초로 낙원에 들어간 사람이었다는 것을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이 모든 상황이 예배 주체의 포괄적 성격과 관련 있다. 예배의 주체는 범위와 한계가 없다. 모든 만물이 예배의 주체다.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역사와 함께, 역사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만물을 선과 악으로 구별하지 않으시고 예배의 자리로 모든 만물을 차별 없이 초청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모 예식이 '고인을 예배하는 시간과 장소'라는 혹자의 전제와 해석은 그 의미상 어색하고 부적절하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히려 이 예식 속에서 영광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2) 추모 예식은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감사와 성찰의 희망 예식'이다.

한국의 성도들이 추모 예식이라는 용어를 친숙하게 듣는 경우는 명절 때, 돌아가신 부모님 혹은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주님께 드리는 희망 예식을 지칭할 때다. 다시 말해서 추모 예식의 관심이 돌아가신 가족 구성원이 기독교인이었느냐 혹은 비기독교인이었느냐에 있지 않고, 돌아가신 가족, 그러나 사랑했고 그리워했던 가족들의 삶과 추억을 회상하며 드리는, '그리움을 담은 감사와 성찰의 희망 예식'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또한, 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연옥에 대한 교리가 없다. 개신교 추모 예식은 그 예식을 드림으로 죽은 자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예식을 드림으로 인해 믿지 않고 죽은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인 가족이 고인이 된 분을 추모하며, 그 예식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비기독교인 가족들도 함께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도록 초청받는다.

보통 각 교단의 추모 예식을 보면 고인을 기리는 추모의 시간이 추모사와 추모의 시간 정도 이며, 나머지는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 예배의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추모의 시간이라는 것도, 고인에게 절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고인의 유언을 듣거나, 고인의 살아생전 추억들을 가족 구성원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 혹은 고인의 유품 소개, 후손들을 향한 교훈의 시간 정도다. 

(3) 기독교 예배와 예식시, 하나님의 은혜는 인효론 (人效論, ex opere operantis)적이지 않고 사효론 (事效論, ex opere operato)적이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사효론과 인효론의 논쟁이 나온다. 이것은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의 논쟁이었다. 이 문제는 3세기 중반 노바티안파와 키프리안의 재세례 논쟁에서 출발한다. 아직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이라 이 시대의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배교자들이 있었다. 문제는 이 배교자들이 준 세례가 유효한가가 쟁점이었다. 이 쟁점을 놓고 카르타고 교회와 로마교회는 논쟁에 휩싸인다. 그리고 4세기 초 도나투스파와 어거스틴의 논쟁의 결과로 사효론이 정식 교리로 받아들여진다.

카르타고 교회의 도나투스파들은 이 배교자들이 준 성례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나투스파의 입장은 교회가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기에 배교자들을 파문시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 준 세례만 유효하고, 배교자들이 준 세례는 무효이며, 배교자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인효론(人效論)이라 하며 라틴어로는 'Ex opere operantis' 라고 한다. 
 

▲ 드류대학교 학생들이 추모 예배에서 상록수를 부르고 있다.
이에 맞서 어거스틴은 성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거룩한 예식이므로 번복될 수 없으며, 이것을 번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례에 의심을 갖는 것이다. 그 성례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한 절차에 의해 거행되었다면, 집례자와는 관계없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사효론(事效論)이라 하며 라틴어로는 'Ex opere operato'라고 한다. 이 논쟁의 결과로 사효론이 서방 교회의 정통교리가 되었고 천주교 뿐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교까지도 이 교리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사효론의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추모 예식 혹은 추모식에 함께하는 참석자들을 향해 은총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위로하시며 교제해 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과 은혜는 설사 고인이 비기독교인이었다 하더라도 참석자들과 집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고 정당한 절차로 진행된 예식이기에 기독교인의 추모식과 동일한 은총과 은혜가 참석자들에게 베풀어진다.

5. 기독교 예식의 존재 이유

혹자는 '왜 성경에 없는 상황 예식들이 기독교 예배 안에 존재하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각 나라의 언어가 다르기에 예배는 각 나라와 민족, 부족의 언어로 표현되고, 기독교 예배의 본질은 바뀌지 않으나 서로의 문화가 다르기에 문화에 적응해(Inculturation) 예배의 요소와 내용, 그리고 그 형식들은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한편, 같은 문화권 내에서 조차도 세대별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현대 기독교 예배는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표출되는 예배와 예식들로 나타난다.(좋은 예로 이민 교회 안의 1세들과 2세들의 차이를 생각하시면 된다) 이처럼 다양한 예배와 예식은 그 형식은 다를지언정, 예배의 대상이 온전히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 바른 예배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목회적 돌봄과 선교 과정에서 비기독교 국가의 문화, 전통과 기독교 국가의 문화, 예배 전통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 특정한 목적을 위한 상황 예식들이 요청됐으며, 이것을 기독교에서 기독교 예배와 예식 안으로 그 목적을 승화시켜서, 어떤 목적의 의식이든지간에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는 예배/예식으로 발아시켜 왔다. 예를 들면, 돼지머리 놓고 고사를 지내는 전통을 기독교 개업 예식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공경해 드리는 조상 제사가 기독교 추모 예식 혹은 차례 예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소통의 과정들이 일고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상황 예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국 교회 예배 예식 전통이 모두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필자들은 생각한다.

앞서 언급하였듯, 추모 예식에 대해 한국의 여러 교단의 예배와 예식서는 비기독교인에 대한 추모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 많은 한국의 교단들이 아무런 신학적 근거도 없이 그냥 사람들의 혹은 문화적 상황에 대한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예식이라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

III. 나가는 말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예배와 예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들이 미국에 와서 공부해, 지역 이민 교회를 섬기며, 경험한 것은 한인 이민 교회 예배와 예식의 획일성과 대조되는 미국 교회의 예배와 예식 전통의 다양성이었다. 한국 교회의 현실도 재외 한인 이민 교회의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한국 교회는 보수적인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각 교단을 막론하고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에 가까운 예배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독특한 한국 기독교 예배 문화와 전통 속에서 삶과 신앙이 형성되어온 한국 기독교인들 혹은 재외 동포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예배의 형식이 '진리 혹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며, 이번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예식 이후, 인터넷 상에서 열린 포럼을 통해 그 가능성이 단지 예측이 아니라 한국 교회와 재외 한인 이민 교회의 현 주소임을 필자들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한편, 이 쟁점이 사이버 상에서 공론화 되면서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추모 예식을 비롯한 상황 예식'을 바라보는 여러 다른 주장들이 공존하고 있음 또한 확인하게 됐다. 바라건대 이 글을 계기로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양성을 띠고 있는 전 세계 기독교 예배와 상황 예식들, 특히 목회적 돌봄과 선교적 차원에서 거행되는 '비기독교인 추모 예식(추모식)'을 열린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한, 하나님만을 예배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형식과 내용 면에서 다양한 예배와 상황 예식들은 모두 기독교 예배와 예식이라는 공감대가 하루 빨리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에 형성되고 정착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글은 드류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 중인 김형락 (예배와 예전학 박사과정, Liturgical Studies), 김남중 (예배와 예전학 박사과정, Liturgical Studies) 목사가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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