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막둥이로 불러주오
나를 막둥이로 불러주오
  • 김기대
  • 승인 2014.06.2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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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사도 바울] 나의 아름다운 비밀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을 일컬어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친숙한 표현이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를 박해하던 순혈 유대인 사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목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헬라 식의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를 찬찬히 읽어보게 되면 ‘사울이 바울이 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는 조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도행전 13:8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에서 볼 수 있듯이 회심 이후에도 사울이라고 불린 적이 있으므로 사울이 회심한 후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바울로만 불렸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런 관용구는 성서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조차 있다.

그러나 어떤 이름이 어느 시점에 쓰였는가에만 주목하다 보면 당시의 사회적 철학적 맥락을 놓칠 수 있고, 그로 인해 ‘사울이 바울이 되다’라는 관용구를 마치 폐기되어야 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바울이라는 이름에 대한 철학적 작업(신학이 아닌)은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년)에 아주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은 로마서 1:1만을 연구한 이 책에서 ‘바울’은 프레노멘(praenomen, 이름)이나 코그노멘(cognomen,성)이 아니라 시그눔(signum) 즉 별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회심 이후 그의 이름이 시그마(S)에서 P로 바뀐 것은 단순히 한 글자의 변화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이름이 바뀐 것과 같은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한 문자의 단순한 부가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새로운 조화를 산출하고 있다. 그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 그리고 죽어야 하는 것으로부터 불사의 것을 산출하고 있다.”
(필론, ‘이름의 변경에 관하여’, 아감벤의 위의 책에서 재인용)

필론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개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아감벤은 바울의 개명에서도 한 글자의 차이가 세계관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글을 인용하고 있다. 사울은 명문가의 이름으로 그것을 지니고 있는 자는 아름다움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크기에 있어서도 다른 모든 이스라엘인들을 능가한다(사무엘상 9:2).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바울이라는 이름의 사용은 왕가에서 천민으로의 이행,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라틴어로 파우로스(paulus)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자’라는 의미다. 우리 말로 하면 막둥이 쯤 되는 말이다.

별명을 이름으로 택한 사람

결국 ‘바울’은 사도가 메시아적 소명을 받는 순간 부여된 시그눔(별명)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3:8의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은 회심 이후에도 사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라 바울이라는 별명을 공식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바울이라고 하는’에서 ‘이라고’(ho kai)는 당시 공식 이름에만 붙이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즉 명문가 선비 사울은 이제 스스로를 비천한 별명을 이름으로 대신하게 된다.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 같은 명문가 청년이 본명으로도, 호로도 불리지 않고 천민의 이름인 돌쇠 마당쇠로 불리기를 자처한 것이다.

이제 옛 사람 사울은 스스로를 사울이 아니라 막둥이 또는 꼬맹이로 불러 달라고, 그것이 본래 내 이름이라고(ho kai) 만천하에 공표한다.

아감벤의 지적처럼 바울 이후 우리의 이름은 모두 시그눔(별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명문가의 본과 멋있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다한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찮은 막둥이 같은 별명일 뿐이다. 막둥이 바울은 이제 소명을 통하여 자유인에서 메시아의 종으로 규정되며 그 순간 노예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을 상실하게 되었다.

바뀐 것은 종교 뿐이던가

그러므로 사울에서 바울로의 개명은 회심 이후 유대교적 세계관에서 그리스도적 세계관으로 바뀐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막둥이 바울은 스스로 이름조차 없는 천민이 되기를 원했으며, 낮아지고자 했으며, 이름이라고 하는 생물학적 소속에서 오는 우월감을 제거하려고 했다. 천민이 된들 무엇이 불편하다는 말인가? 유대교 선비로서 누리던 모든 혜택이 끊어져도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로마서 8:31)

이름도 성도 없이

주변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쓰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가부장적 문화를 극복해 보려는 좋은 취지이겠으나 가부장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족벌문화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백성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다. 더 거슬러 올라가 신분제가 와해되던 조선 후기 이전으로 가면 백성의 반은 성이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조부모가 되었건 증조부모가 되었건 비밀로 깊이 묻어 두었겠지만) 성이 없는 천민 조상을 두었을 터인데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있어도 노비의 후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동성애자로 차별은 받고 살지언정 노비의 후예로 살기 싫은 신분의 엄혹함이 우리 사회에 아직 흐르고 있는데 아버지 성이면 어떻고 어머니 성이면 어떤가? 거짓 하나만 달고 사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뭐 둘 씩 달고 사는가? 유니온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정)현경 교수가 성을 떼고 이름으로만 사는 것이 훨씬 멋져 보인다.

21세기에도 이러한데 2000여년 전 이름도 버리고 성도 떼고 막둥으로 살기로 다짐한 바울의 결단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바울은 함께 낮아지자고, 함께 바보가 되자고 우리를 부른다. 그런데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절대의 진리라고 가르치는 목회자들은 바울에서 다시 사울로 가려고 한다. 어떤 이는 왕가의 사람이 되어 군림하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은 선비가 되어 관념적인 설교만을 늘어 놓는다.

군주나 선비나 울지 말라고 다독 거려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피해자 시늉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도 피해자가 기꺼이 되겠다며 자기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울에서 바울으로의 개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를 담은 사건이다.

   
▲ 전쟁이 끝난 후 조셉은 부역자 감옥에 있던 친구 홀스터를 의사라고 속여 아내의 아이를 받게 한다. 전쟁 동안 그를 괴롭히던 친구였지만 조셉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영화의 한장면

나의 아름다운 비밀( 얀 흐르베이크 감독, 2000년)

1937년 체코의 어느 마을, 유대인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직원인 조셉 (볼레슬라브 플리보카 분)과 홀스트는 친구사이다. 사장의 아들 다비드(크손고르 카사이 분) 와 운전기사인 홀스트, 조셉이 차를 타고 가다 잠시 들판에서 함께 용변을 보며 장난을 칠 정도로 세 사람의 관계도 마을도 평화롭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사장 집안은 수용소로 끌려가고 홀스트는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조셉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겉으로는 우정이 지속되고 있는 것 같지만 회사 다닐 때와 권력의 위치가 뒤바뀐 두 친구 중 홀스트는 조셉의 아내 마리(안나 시스코바 분)에게 흑심을 품는다. 전쟁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43년 수용소를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온 다비드를 조셉은 위험을 무릎쓰고 자신의 집에 숨겨준다.

규칙 주의자에서 바보로

다니던 회사도 그만 두고 아이도 없는 조셉은 정확한 규칙주의자다. 특별히 자비심이 있어서 다비드를 숨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도리이기도 하고 전쟁 초기에 희망을 가지라고 다비드에게 말했던 약속 때문에라도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다비드는 자신 집에 숨겨둔 보석의 위치를 조셉에게 가르쳐 주는데 독일인 새 사장이 다비드가 살던 집으로 이사 온다는 말을 듣고 밤에 몰래 그 집에 갔다가 숨어 있던 다비드를 만나게 된다. 주인이 돌아올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랫 동안 비어있던 유대인의 집에 상당량의 보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것이 아니기에 탐을 내지 않을 만큼 조셉은 원칙을 중시한다. 그날밤도 혹시라도 새 집주인이 숨겨둔 보석을 발견할까 걱정이 되어 자신이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라도 돌려줄 생각으로 그 집을 찾아 갔던 것이다.

조셉은 다비드가 보호의 댓가로 보석을 주어도 받지 않는다. 그냥 건조하게 숨겨줄 뿐이다. 반면 아내 마리는 보석도 탐나고 두렵기도 하지만 이왕 숨겨주기로 한 이상 남편 보다 더 자상하게 다비드를 돌본다. 조셉은 보석은 받지 않지만 자신의 체취가 담긴 담요가 다비드에게 제공되는 것이 싫다. 반면 아내 마리는 누구의 담요인가 보다 가장 좋은 담요이기에 손님에게 최선을 다해 제공한다.

마리를 향한 친구 홀스트의 흑심은 점점 깊어져 수시로 집을 드나든다. 다비드를 숨겨둔 부부는 못내 불안하다. 게다가 다비드 아버지의 회사를 맡은 독일인 사장이 자식도 잃고 아내도 입원한 상태에서 이 집의 신세를 지려하는 피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한다.

유대인과 독일인을 한 집에 두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마리는 임신을 해서 방을 빌려 줄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동네 사람이 모두 불임의 원인이 조셉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데 거짓말이 탄로나면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이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숨겨준 유대인 다비드와 아내를 동침시키는 것.

전쟁은 끝나고 아이는 태어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에서 조셉과 마리는 요셉과 마리아다. 그 집 거실에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크게 걸려 있다. 다비드(다윗)는 아이의 혈통이지만 친권은 건조하게 아내의 임신 과정을 참아낸 조셉에게 있다. 공교롭게도 태어난 아기는 아들이다. 묘한 성서적 은유를 담고 있지만 그것보다 영화의 주제는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조셉이다.

그는 한 때 유대인 사장 밑에서 잘 나가던 간부 사원이었지만, 그래서 친구 홀스트를 사장 운전기사로 취직까지 시켜주었지만 전쟁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권력을 획득한 홀스터가 아내를 넘보아도 참아야 한다. 다비드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몰살을 당할 수 있는 상황도 감수한다. 마침내 유대인을 보호하다가 자신들이 곤경에 빠지자 아내와 다비드의 동침을 참아낸다. 아내의 임신 소식에 사람들은 모두 아이의 아버지가 홀스터라고 생각하며 조셉을 조롱하고 측은해 한다. 예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조셉이 모든 조롱을 참아낼 즈음 전쟁도 끝나고 아이도 태어난다.

아이의 탄생은 아내를 유혹하던 홀스터와 다비드를 보호해주지 않았던 이웃집 아저씨에 대한 용서의 시작이기도 했다. 바보 조셉은 모든 이름을 잃었다. 생물학적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친구도 더 이상 그의 이름이 아니다. 비록 소극적이라도 나치에 저항하던 그는 다비드를 보호하기 위해 부역을 한다. 이로써 ‘반 나치’ 라는 이름도 잃어 버린다. 원칙을 중시하던 그였지만 아내를 다른 남자와 자도록 했으니 원칙주의자라는 명분도 잃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새 생명이 탄생했고, 한 청년을 구했고, 이웃을 용서했고, 태어난 아이를 유모차에 데리고 다니면서 화해의 환상을 본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소중했다. 마찬가지로 사울이라는 허명을 버리는 순간 바울은 모든 것을 얻었다.

   
▲ 새로 태어난 아기와 함께 폐허 속에 서 있는 조셉. 폐허는 복잡한 속 마음을 은유한다.ⓒ 영화의 한장면

허명을 버리는 삶

기독교인이라는 호칭은 우리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고 있는가? 비정상이 정상을 지배하는 시대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착각하고 그 허명을 좇아 산다. 출세라는 허명을 위하여 아이들을 닥달하고 돈이라는 허명을 위하여 불법을 저지른다. 교회는 허명을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어떤 이들은 진보라는 허명 뒤에 숨어 속으로는 보수가 만들어 놓은 가치로부터 소외될까 전전긍긍한다. 보수가 허명을 넘어 거짓이 되어 버린지는 이미 오래다. 밤에 마을에 숨어든 다비드를 좇아 내려 했던 동네 영감은 종전후 갑자기 애국자 행세를 한다. 한국에서 애국이라는 허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일 수록 일제 강점기를 정당화하거나, 더 나가서 신앙화 해서 그 시기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애국심’을 보여준다.

영화의 원 제목은 ’흩어지면 망한다’(Divided We Fall)이다. 이 말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어록으로, 영어 깨나 하던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어록으로 유명해진 말이다. 무엇으로 우리는 뭉칠 수 있을까? 애국심, 진영논리, 대형 교회 소속감, 출신학교, 출신고향, 집안 배경 모두 허명이다. 사랑과 용서, 낮아짐이 우리를 하나되게 한다.

우리가 새롭게 취득해야 할 이름은 별명이 되어야 한다. 안디옥 교회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듯이 게걸스럽게 제 몫챙기기 보다는 손해 보고 허허 웃을 수 있는 사람, 이웃을 위해 희생을 즐겨하는 사람, 높아지기 보다는 막둥이가 되려는 사람, 정의와 평화를 위해 핍박을 받는 멍충이 막둥이 같은 별명이 그리스도인을 위한 진정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극적인 회심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사울이 바울이 된 것과 같은 변화’라는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계급적 역사적 특징을 담은 더 강렬한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

김기대 / LA 평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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