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대학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대학살
  • 양국주
  • 승인 2007.04.24 0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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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이민 세대 자녀들에게 정체성 훈련이 절대 필요

30년 전쯤의 일이다. 파리에 유학 중이던 일본 청년이 짝사랑했던 불란서 처녀를 살해한 후 토막 낸 사지를 냉장고에 보관했을 뿐 아니라 시신의 일부를 요리해서 먹기까지 했던 엽기적 사건이 벌어졌다. 때마침 불란서를 여행 중이었는데, 일본인으로 오인 받아 봉변을 당할 뻔했던 황당한 일이 있었다. 같은 동양계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목 받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유구무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캠퍼스 학살 소식을 처음 대했을 때는 ‘세상에 미친 놈 또 하나 나왔군!’ 하는 느낌이었다. 범인이 아시안계라는 대목에 가서는 ‘혹시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유난히 많은 한인 자녀들이 이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뀐 지금 조 씨와 같은 자녀를 둔 아비의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더욱이 조 씨가 사는 센터빌 버지니아는 필자가 사는 동네다. 20년 전 워싱턴에 이민 와 처음 둥지를 틀었을 때만 해도 한인 가정이 몇 집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을 장만할 요량이라면 너도나도 공격적인 ‘묻지마 투자’가 이루어지는 한인 타운이 되었다.

희생자나 가족이 느끼는 피눈물은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내 자식이 저지른 듯 무한 책임을 느끼게 됨도 숨길 수 없는 양심의 소리다. 사건을 놓고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원인과 결과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황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준비된 것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나도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을 오게 되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소외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며, 훗날 아이들의 정체성에 대한 염려도 많았다. 대학에 들어가면 신입생 때는 기숙사에서 일 년을 보내게 되고 2학년부터는 가까운 친구들과 방을 얻어 자취를 하게 된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양식을 먹다 보니 사지가 뒤틀릴 정도로 김치가 그리운 상태가 된다. 이 무렵부터는 미국 친구들을 의식하지 않고 김치를 먹고 수업에 들어 갈 정도로 담력도 생기는가 보다. 음식을 통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귀거래사를 읊는 셈이다. 내 아이의 경우에도 사귄 여학생 친구와 대학 시절 헤어진 모진 경험을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일 년 정도를 극심한 고통과 자학으로 보낸 듯했다.

이민 세대의 자녀들은 갖가지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피나는 정체성 훈련과 타문화에 적응을 해야 하는 갈등 속에 살고 있다. 한국에서 자녀를 기르는 노력보다 두 배, 세 배의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번 조 씨의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보다 더 위험한 사건이 언제나 일어날 가능성이 복병처럼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정체성이 부족한 2세를 기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간직하고 이민자로서 삶을 살고 있다. 조 씨의 부모라고 해서 아들을 그리 되도록 내몰았겠는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조 씨의 사진을 보며 양처럼 유순하게 생긴 아이가 어떤 지경에서 그리도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측은한 마음부터 앞선다. 한미FTA가 타결되었으니 망정이지 이 사건이 조금 전에만 터졌어도 한미FTA는 물 건너갔거나 죄스런 마음에 벌거벗고 내주었어야 할 위험스런 대목이기도 하다.

개인 간도 그러하거니와 국가 간에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위험요소가 있다. 갈등과 분노를 제대로 관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도덕적 불감증 상태에서 폭발시키는 사태란 생각조차 두려운 것이다. 도전적인 한국인의 성격이 여과 없이 노출된 시점에서 이러한 분노를 다스릴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자녀가 원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노력을 부모인 내 자신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해야 한다.

양국주 / 열방을섬기는사람들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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