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권력에 복종하라 그랬다고?
바울이 권력에 복종하라 그랬다고?
  • 김기대
  • 승인 2014.07.0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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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난 사도 바울]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한국에서 해방 이후  권력은 모두 불의했다. 이승만에서 노태우까지 이어지는 불의의 시대  말고도  김영삼은 정치 군인들에게 모든 것을 팔아 대통령이 되었고, 김대중 노무현은 보수 우익 진영이 보기에는 도무지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는 ‘불의’한 정권이었고, 이명박은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부자가 되고야 말겠다는 다시 말해 이명박의 화려한 전과 경력을 알고도 못본 척한 불의한 대중들과의 합작품이었다.  현재의 박근혜 정부는 당선부터가 의혹투성이었기에 정당한 대통령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더 권위적이 되었고, 경직된 권위는 세월호 참사를 낳았다.

1980년대 이후 노골적인 정권 하수인 역할을 자청한 보수  목사들은 로마서 13:1-7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잡는 친위대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었다.   1974년 11월 9일 한국 기독교실업인회에서 주최한 ‘국무총리를 위한 기도회’에서 당시 총리 김종필은 로마서 13장 1-7절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정부에 순종해야 하며 정부는 하나님이 인정한 것”이라는 발언을 함으로써 교계에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는데 뒤집어 보면  1970년대만 하더라도 유신정권은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후에는 정치인이 나서서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목사들은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

옥한흠 하용조 이동원의 인기 비결은?

옥한흠 하용조 이동원 같이 비교적 평가가 좋은 목사들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자주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고, 때로는 위로부터의 권위에 슬쩍 자신들의 목회직도 포함시켰다.

한국기독교 교회 협의회에서 활동하던 진보적인 목사들이 김대중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면서 이 구절에 대한 목사들의 인용은 잠시 주춤했다. 당시 권력을 잡은 기독교인들은 김대중 정부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를 향해 권세에 대한 복종 운운할 정도로 뻔뻔하지 못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지는 10년 동안 보수 기독교 세력들은 행여라도 정부에 도움이 될까 로마서 13:1-7을 꼭꼭 묻어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상이 줄어든 복음주의 리더들의 위기감은 한층 더 깊어졌지만 대놓고 대립각을 세울 정도의 배포는 없었다. 그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을 때 격이 떨어지는 김홍도 전광훈같은 이들이 ‘용기’있게 막말을 내뱉음으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열에 올라 선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리더들이 한국 교회에서 받고 있는 자그마한 인정이나 존경은 겨우 김홍도 전광훈 등 보다는 낫다는 수준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 ‘위로부터의 권세’를 다시 자기 편으로 세우고 싶어했던 옥한흠 하용조의 낯뜨거운 이명박 지지 설교는 한국 교회사에서 두고 두고 ‘명설교’로 남을 것이다.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 Cullman)의 말처럼 로마서 13:1-7의 텍스트 만큼 많이 남용된 예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설정(13:1-2),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권력(13:3-4), 양심에 의한 복종(13:5), 납세의 의무(13:6-7)로 구성된 문제의 구절들은 해석자의 의도에 따라 제 멋대로 읽혀져 왔다.

   
▲ 마지막 이별을 하는 미하엘 콜하스와 딸 사이에 부녀를 보좌하던 젊은 전도사가 서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종교를 상징한다.

바울의 정치 신학

바울 서신을 정치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요즘 트렌드인데 이 분야는 유대인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가 처음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콥 타우베스는 <바울의 정치신학> (그린비,2012)에서 로마서 13장의 권세에 대한 복종을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는 어쨌든 악한 로마 제국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말해 줍니다. 어차피 망해 갈 나라인데 반란이나 봉기를 일으켜서 뭐하겠느냐는 말이지요. [이 제국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봐야 소용없다. 어차피 그 모든 게 다 사라질 거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 긴 이야기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거죠. 정적주의인 겁니다.

 ‘뭐가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속담같은 논지인데, 그깟 망할 권력에 잠시 복종한다고 신앙적으로 배교하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야콥 타우베스는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해를 인용하면서 바르트가 12: 21을 13장에 갖다 붙이는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추켜 세운다.

바르트, 또는 타우베스 식으로 보면 로마서 13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12:21)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13:1)

타우베스의  말에 따르자면 “네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던 그 모든 건 결국 악이다.” 결국 악한 권세에 복종도 악일 수 밖에 없다.  복종은 선이고 권세는 악이라고 성서(또는 타우베스)를 오독해서는 안된다. 악한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어떻게 선일수 있는가?  그것은 침묵이라는 공범행위다. 그렇다고 초대 교회 신도들에게 악을 자행하라고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어차피 영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악일 수 밖에 없는) 정치적 복종을 잠시 보여주라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세상은 (로마같은) 제국 공동체나 (히브리인 같은) 민족 공동체를 넘어선  성령에 의한 공동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 바울이 이 구절을 집어 넣었다고 타우베스는 주장한다.   새로운 세상은 기존의 프레임에 같힌 복종과 권세의 대립항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라 선한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다. 결국 타우베스의 주장은 권세에 대한 복종은 한시적인 것이지 절대적 권위를 갖는 말씀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닌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던지지 말자.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볼 수 있는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욥기 8:7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있는 내용이지만 진리의 표준은 아니다. 그것은 욥에게 잘못된 충고를 하고 있는 빌닷의 말이다. 좋은 금언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니다. 타우베스가 이 구절과 로마서를 비교하지는 않지만  말하자면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한시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처세일 뿐 궁극적인 진리일 수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것을 정치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유럽 정신사에서 로마서 13

일본의 정치학자 미야타 미쓰오는 ‘유럽정신사에서의 로마서 13장’이라는 부제가 붙은 <국가와 종교> (삼인, 2004)라는 책에서 로마서 12:21과 13:8(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사이에 13:1-7이 갑자기 끼어든 ‘비바울적 삽입’이라는 일부의  주장을 소개하면서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누가 뭐래도 이것은 제 자리에 있는 구절이며 이 구절이 이후 유럽 정신사의 법, 철학, 신학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어 미야타 미쓰오는 오리엔트-헬레니즘 세계에서 지상의 지배는 신적 기원을 갖지만  그 권위를 하나님에 예속 시킨 바울은 이미 세속 권세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무조건적 복종의 텍스트로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로마 정부에 대한  잠재적인 비판을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은 무력한 현실에 던져져 있던 유대인들을 지탱시키는 신앙적 힘이 되었다.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13:2에 이르면 복종을 더욱 강조하는 듯하지만  1절에서 사용된 ‘세운다’는 단어는 당시 로마의 행정 질서에서 사용되는 비슷한 뜻의 다른 단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의도적으로  행정 용어와 다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로마 권세를 하나님의 권세와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명토박아 두었다는 것이다.

미야타 미쓰오 역시 야콥 타우베스처럼 이 텍스트가 국가 질서에 대한 교의적 근거로 간주되고 여기에 제시된 복종이 보편타당한 규범으로까지 과대평가되었다고 본다. 다시말해 로마서 13:1-7은 “법과 정의에 봉사하지만 인간의 구원을 과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자유를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국가”라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로서 ‘복종’이 주제인 구절은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야콥 타우베스와 미야타 미쓰오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 자신은 투항을 결정하고 부하들을 돌려보내는 미하엘 콜하스. 딸이건 부하건 그들 앞에서 그는  항상 무릎을 꿇는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아르노 팔리에르 감독, 2013)

말 중개 상인인 미하엘 콜하스(매즈 미켈슨 분)는 늘 다니던 길에서 갑자기 통행료를 징수하는 남작에게 그가 잘 키워온 말을 통행료 명목으로 빼앗긴다. 처음 당한 일이라 얼떨결에 말을 빼앗겼지만 참을 수 없었던 미하엘 콜하스는 말을 되찾기 위해 남작에게 하인을 보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비쩍 야윈 말과 남작에게 폭행 당한 하인 뿐이었다. 남작과 중재를 위해 대신 나섰던 아내마저 죽음으로 돌아오자 미하엘은 복수를 다짐한다. 독일에는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민중들의 손에는 루터가 번역한 성서가 쥐어져 있었다. 성서를 늘 손에 들고 있던 미하엘은 농민군을 조직한다.

항상 무표정한 미하엘은 죽은 엄마나 말 때문에 싸움을 하냐는 딸 리스베뜨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에는 미하엘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다. 왜 싸우는지 모르는 마음과, 정의를 위한 싸움이라는 확신이 그의 마음 속에 다 들어 있다. 왜냐하면 이미 남작의 가족을 죽였고, 규칙을 어기고 마을을 약탈한 자신의 부하를 공개 처형시키는데 아내의 죽음을 경험한 그로서는 집행을 하고도 그것이 정의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드니 라방 분)가 그를 찾아 온다. 영화 배경의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토마스 뮌처의 농민전쟁 이전으로 추정된다. 토마스 뮌처의 농민 반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목격한 농민들이 소규모 반란군을 조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마틴 루터 앞에 미하엘 콜하스는 전쟁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당대의 가장 떠오르는 인물이었던 마틴 루터의 달변 앞에 미하엘 콜하스는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놓아야했다.

마틴 루터와 로마서 13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은 여러 모로 토마스 뮌처가 일으킨 농민전쟁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루터는 초기에는 뮌처의 농민전쟁을 지지했으나 나중에는 입장을 완전히 바꾼다. 루터가 쓴 <농민과 살인, 강도단에 항의해>(1525)에는 농민군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첫째, 세속 권력에 대해 복종할 의무를 파기한 점

둘째, 강도와 살인 같은 폭동을 일으킨 점

세째, 이러한 행동을 복음의 이름으로 행한 점, 그리고 이 점이야 말로 최대의 죄다.

이 지적은 영화에서 루터가 미하엘에게 말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 실존 인물을 독일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소설로 쓴 것을 영화화 한 것인데 그렇다면 토마스 뮌처의 농민 전쟁의 선도 역할을 미하엘 콜하스가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에는 미하엘 콜하스를 보좌하는 젊은 전도사가 나오는데 아마도 훗날 그는 토마스 뮌처와 함께 했을 지도 모른다.

루터는 심지어는 농민 반란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않는 세속 권력을 향해 권력의 책임을 방기했다고 힐난할 정도로 세속 권력에 힘을 실어 준다. 교회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한 루터의 이같은 입장 선회는 교회사의 슬픈 장면이다.

이것이 개혁 이후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개신교인들이 맞닥뜨리는 모순이다. 위로부터의 권세인 교황에 맞섰던 루터지만 그는 교황의 자리에 국가와 근대법을 가져다 놓았다. 가톨릭이 여러 모순에도 불구하고 특히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때로는 세속 권력과 맞서는 듯한 행보를 보임으로써 소외된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는 반면 국가라는 세속 권력에 속한 개신교는 늘 허둥댄다. 진보적인 목사들은  로마서 13:1-4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고 하지만 납세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의 편을 들어 준다. 반면 보수적인 목사들은 로마서 13:1-4의 의미를 확대하면서 납세 문제는 그런 구절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회의 납세 문제가 국가와 종교, 저항과 복종이라는 보다 깊이 있는 차원에서 논의되기 보다는 기업형 교회와 CEO 목사를 향한 응징 수단 정도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아쉽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루터에게 굴복당한 미하엘은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 혁명의 의지도 상실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고작 남작에 대한 2년 징역형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이까지 왔던 미하엘은 남작이라는 세속 권력에 대해서는 도전했으나 루터라는 신흥 종교 권력에게는 압도 당했다. 그의 저항은 훗날 반면교사로서 영향을 주었을지라도 적어도 그에게는 실패한 저항이었다. 루터의 성서를 열심히 읽던 미하엘은 정의를 개인의 윤리 문제로 축소시키는 루터 앞에서 회개(?)하고 만다.

미하엘 콜하스는 세상에는 여전히 굴복해야 할 권세-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 우러나오는 신앙의 번민이라 할지라도-가 있고 한 개인이 그것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렇다면 제국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로마서 13:1-7이 권력에의 무조건 복종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한다 해도 어디까지 복종하고 어디에서 저항해야 하는가? 케제만은 “그리스도인의 복종은 더 이상 봉사가 될 수 없는 곳에서는, 늘 그리고 거기서만 끝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우리의 복종이 봉사라는 열매로 나타난다면 얼마든지 복종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넘어선 히틀러와 스탈린을 만난다면 복종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의 현실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복종이 유효한 시점인지, 그것을 넘어 다음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인지 의견이 다양한 것을 보면 케제만의 해석도 명쾌하지는 않다. 법은 강해지고, 정의는 실종된 대한민국을 참아내는 것은 바울 시대처럼 종말론적 인내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불투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로서는 미야타 미쓰오의 해석이 제일 그럴듯해 보인다.

비판적인 대화의 상대로서 공공복지나 불가침의 인권, 특히 사회의 소수자나 주변의 소외된 약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집단과 협력한다는 형태다. 그때 바울이 말하는 복종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규칙을 올바르게 지키고 합의에 근거한 민주적 결정을 만들기 위해 봉사할 것을 뜻한다. 또한 로마서가  말하는 ‘선한 일’이라는 사회적 과제에 인도되어 잘못된 정책  결정에 반대하는 시민적 불복종이나 비폭력의 직접적 행동을 취할 수도 있겠다. 아니 나아가 양심을 비판적인 행동의 근거로 세운다면 부패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조차 로마서 13장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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