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이 죽었다고?
유병언이 죽었다고?
  • 길벗
  • 승인 2014.07.24 17: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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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앉은 자와 구조된 자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떠했든 간에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숙연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다. 선한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은 말할 나위 없지만 악한 사람이라 해도 인생을 살아온 그의 궤적을 통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억지로라도 찾아내면서 마지막 예의를 갖추게 된다. 시인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있어서는 안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시구처럼(이 책에서 따옴) 모든 일(악인의 삶조차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번에는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예의를 갖추기는 커녕  죽음이 이렇게 희화화된 적이 있었던가!  세월호 침몰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이 경찰에 쫓기고 있고, 그의 은신처 근처에서 어떤 신원 미상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40여일 동안 시신의 신원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때에 그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걸 “아 ! 그 나쁜 X이 죽었구나”라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미안하지만 이제는 콧 방귀 조차 안나온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죽음을 우스개 거리로 삼는 이 ‘패악한 세대’를 만든 것은 정권과 그 하수인인 검찰과 경찰이니 우리를 탓하지 말라.  그냥 우스운데 어쩌란 말인가!

다시는 어리석게 울지 말자! 

몇 해전 수십명의 젊은 군인들이 석연찮은 ‘적의 공격’으로 죽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묻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면서 우리 이웃의 동생과 아들같은 젊은이들의 죽음을 슬퍼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슬퍼할 기회도 안주고 나서는 누가 이 짓을 했는지 모르냐고 윽박지르던 정부였다. 그 당시  어리둥절한 슬픔 속에서 목놓아 울지 못했던 국민들은 세월호 침몰을 보면서 목놓아 울었다. 다시는 어리둥절한 슬픔은 겪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번 사고를 따져들었더니 이번에는 그만 울란다.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오래 우냔다. 윽박지름이 통하지 않자 유병언씨의 죽음으로 모든 상황을 희극으로 전환시킨다. 아무리 이단 교주에 사고 선박회사의  실질적 주인이었다 할지라도 그 죽음을 희극으로 받아들이는 건 분명히 죄다. 그런데 죄여도 할 수 없다. 희극은 희극이다.

프리모 레비, <가라 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년)

유대계 이탈리아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환한 후 수용소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소설가로 변신한다. 이탈라아에서는 유명한 작가지만 우리 나라에서 프리모 레비가 유명해진 것은 순전히 서경식 교수(일본 도쿄 경제대학)의 덕이다. 서경식은 그의 두 형(서준식, 서승)이 군사독재 시절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에 얽혀 모진 고문 끝에 무기징역형을 살면서 인간 이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졌다. 그러다가 아우슈비츠의 모진 세월도 견뎌낸 프리모 레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로 날아가 그의 삶을 추적한 뒤 펴낸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4)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프리모 레비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주로 세 종류다. 무작위로 가스실로 끌려간 경우는 제외하고라도 야만의 시공간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을 터, 그래도 이겨낸 사람들은 주로 종교성 강한 사람, 공산주의자, 그리고 인간 (이성)에 대한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 세 부류의 공통점은 모두 다른 세상을 믿는 사람들이다. 종교인은 지금과는 다른 내세를 믿고, 공산주의자들은 현세와 다른 유토피아를 꿈꾼다. 인간에 대한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앞의 두 경우와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프리모 레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를 포함한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도 수용소 바깥 세상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밖에 나가면 이 기억을 반드시 남겨서 다시는 야만의 세월이 없도록 해야 겠다는 것이 그의 의지였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바깥 세상은 이성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은, 형태만 다를 뿐 야만이 지속되고 있었다. 서경식은 기억을 남기려 했던 프리모 레비가 결국은 그치지 않는 야만의 시대를 못 이겨 자살했다고 본다.

제목도 아주 시의적절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소설이 아니라 아우슈비츠 생활에 대한 그의 회고록이다.

라거(강제 수용소)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 지대의 협력자들이 살아 남았다. 나는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적자들은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우리는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콘(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끔찍한 모습의 세 자매 괴물, 스텐노, 에우리알레, 메두사. 그 중 메두사는 고르곤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는데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돌이 되었다고 한다) 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들이 바로 ‘가라 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96~97쪽 편집)    

세월호가 단순 선박사고가 아닌 것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침몰의 정확한 원인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는 시대의 증인이 된 가라앉은 자들의 모든 증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꽃다운 아이들의 죽음 속에 우리 사회가 의지해 왔던  허상들이 모두 담겨져 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아직도 보고라는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 구조에 선행했다. 사람들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예수께서 가르쳤는데  사건의 파장과  대통령의 위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세월호 사건이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  이런 권위주의적인 모순 말고도 유병언의 이상한 죽음으로 덮여버리려고 했던 그 무엇이 분명히 있다. 신자유주의의 모순도, 남북 이념 갈등의 모순도 다 담고 있다. 이 모든 기억을 희생자들이 먼 훗날, 아니 멀지 않은 날에 고스란히 증언할 것이다. 미안하다. 아직도 꿈꾸어야 할 미래들이 많은 너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가라앉게 해서.

 유병언씨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잠잠해 질 것이라고 믿는 나라를 ‘우리 나라’라고 말하는 우리도 참 불쌍하고, 창피하기는 하다.  유씨는 죽음으로라도 분명히 무언가를 증언할 것이다.

아우슈비츠 전 프리모 레비는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것 말고는 자신이 이탈리아 사람들과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던 그냥 이탈리라 사람이었다.그는 유대교 신자도 아니었다.  왜 그곳에 끌려간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못찾던 그는 대학시절 화학을 전공한 덕분에 아우슈비츠 실험실에서 일을 한다.

 1944년 11월, 공습경보가 울렸다. 실험실 책임자가 실험실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 셋은 나와 같이 가자”고 말했다. 레비는 그를 쫓아 방공호로 뛰어갔다. 그러나 벙커 입구에서 나치 보초병 하나가 그들을 막아섰다. 그 때 연구실 책임자였던 독일인이  “나와 같이 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들어가든지, 아니면 아무도 안 들어가”라고 말하면서 억지로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 레비는 “소박한 용기를 낼 수 있는 독일인들이 더 많았다라면 당시의 역사와 오늘날의 지형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속여도 속여도 백성들은 그냥 속아 넘어 갈 것이라고 믿는 권력자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창피하다. 이 창피함을 극복하기 위해 소박한 용기라도 내야 한다. 시위는 함께 못할지라도 특별법 서명지에라도 서명해야 가라앉은 자들이 언젠가는 우리를 위해 증언해 줄것이다.

길벗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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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용기 2014-08-01 23:44:39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배가 침몰했으면 했지, 그것에 왜 진상규명이 있어야 합니까?
배가 침몰할 요인이 이미 다 밝혀 졌는데, 왜 매번 무슨 나라가 진상을 규명합니까? 이게 진상을 규명할 내용입니까?
그리고 배가 침몰해서 죽은 학생들이 너무 많고, 꽃다운 나이에 죽은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들에게만 무슨 특별법을 만드는 것이 과연 나라의 훗날을 생각할때 옳은 일입니까?
그럼 비행기가 추락하면, 그때 또 무슨 특별법을 만드나요?
이건 좀 웃기는 일인 것 같습니다.
잘못된 제도를 고치고 처벌할 사람들 하면 되는 일이지, 무슨 유족을 위한 특별법을 만드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분들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아프지만 정말 대승적인 것은 그런 잘못된 법과, 사회 풍조를 바꾸는 것이지, 이건 무슨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아이들이 수학여행 가다 죽었는데, 왜 그들이 의사자입니까? 그 유족들에게 보상하고, 그들을 위로하면 되지, 그 가족들에게 대학특례입학을 해주어야 합니까? 그럼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는 학생들은 또 뭡니까?

님이 말씀하신 소박한 용기라는 말에 저는 그 특별법에 반대합니다. 요즘 같이 반대했다가는 돌맞는 분위기에 저도 소박한 용기를 내봅니다. 특별법도 상식적이어야지, 제가 보기에 인기에 야합한 어리석은 국회의원들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만든 법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들어도 훗날 악법이라 없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글을 쓰시려면 다른 것보다 특별법의 내용이 무엇이다 말씀하시고 쓰셨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