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눈에만 가려진 징조들
기독교인 눈에만 가려진 징조들
  • 김기대
  • 승인 2014.08.0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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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 쉘터'(Take Shelter) -재난 영화 보다 무서운 영화

곳곳에서 발생하는 소식들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말레이지아 여객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하면,  땅이 갑자가 꺼져 버리는 싱크 홀 현상도 나타난다. 치명적 전염병 에볼라의 발생이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 넣고, 중국에서는 대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불황은 극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각종 고시 합격에 집중된 청년들의 꿈이 ‘좋은 시절’을 살던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사람들, 한국 전쟁의 참화를 목격한 사람들, 보리 고개로 불리던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시대가 가장 아팠다고 하지만 꿈이 사라지고 부는 편중되고, 정의는 실종되고, 온갖 음모설만 춤을 추고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만 귀를 쫑긋 세우는 2014년의 세상을 정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냐고, 어디에 계시냐고 사라진 듯한 하나님을 목놓아 찾고 싶은 세상인데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의 현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하고  두 손 높여 찬양하며 즐긴다.

하나님을 잃은 처절함 속에 나온 묵시사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 포로 이후 ‘하나님 없음’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임재 공간으로 여기던 성전이 바빌론에게 훼파되었을 때 사람들은 세상을 창조한 과거의 하나님 보다 오실 하나님을 더 소망하게 된다.  창조주이면서 다시 올 그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지만 바빌론 강가의 집단 수용촌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하나님 사이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고 그 땅에서 묵시사상을 배워 온다.  나쁜 사람의 부흥과 착한 사람의 고통이라는 모순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옳다’라는 신정론으로 풀어 보려고 했지만 현실과 신앙의 괴리가 점점 깊어져가자 빈자리를 묵시 사상이 차지하고 들어온 것이다. 

묵시사상은 신자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지만 한편으로는 미래에 모든 해결책 떠 넘겨버리는 비윤리적이고 비겁한 사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악을 무찌르고 승리한다는 계시록같은 전통적인 묵시사상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바울에게  하나님 없음이나 창조와 종말 사이의 단절은 없었다. 바울에게도 물론 묵시사상의 기초가 되는 현세 부정과 비관이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24)

바울에게도 이 세상의 고난과 장차 올 영광이 대비되고(로마서 8:18),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다(로마서 13:12)는 전통적인 묵시사상과 유사성이 드러나지만 기본적으로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곧 종말론적 사건이다. 다시말해 이 세상에 살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다가올 세상이 경험되고 있다는 것이 바울의 종말론적 묵시사상이다. 이 세상이 악한 장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옛 세상을 극복하고 새 세상을 기다려는 과정에서 매일 죽는 삶을 통해 종말은 역사의 마지막 사건인 동시에 일상에서도 경험되는 사건이라고 바울은 설명하다.  따라서 바울의 묵시사상에 ‘하나님 없음’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 비겁한 묵시는 사라지고 현실과 맞서는 묵시가 등장한다.

기독교인 눈에만 보이지 않는 징조들 

현실이 어려울수록 묵시사상은 신학적 소망을 제시해야 한다. 1992년의 시한부 종말론 사건은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적(사탄)의 상실, 다가올 21세기에 대한 불안감을 생각한다면 기승을 부릴만한 충분한 조건은 갖춘 시대였다. 19세기말 미국의 경제적 부흥과 정신적 피폐는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Seventh-day Adventist Church)의 창시자 윌리엄 밀러를 통해 1844년 예수 재림설로 표출되었다.  

   
▲ 어두운 먹구름은 자연의 징조가 아니라 사회적 징조인데 커티스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단이 아닌 정통은 묵시 사상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 오늘 한국교회에서 묵시 사상은 개인의 죽음과 천국이라는 개인사에 집중되어 있다. 늙고 죽는다는 생물학적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기에 개인의 종말이 강조될 뿐 본래 묵시 사상의 출발점이었던 사회 역사적 모순에 대한 성찰은 없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와 다가올 세계의 모순이라는 묵시사상의 전제(바울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독교인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면 세상은 모순 투성이인데 기독교인의 눈에만 숨겨져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폐해를 보수 언론조차도 외치는 때에 교회는 거기에 편승해서 먹이 사슬의 상층부에 머무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모순을 외치는 것 자체가 불온한 일이 되어 버렸다. 권력자들이 온갖 거짓을 일삼아도 우리 교회에는 권력자들과 상류 인사들이 많다는 것을 설교시간에 자랑하는 시대에 악한 권세와 선한 권세의 대립을 극복한 묵시 사상을 어떻게 선포하겠는가?

시대는 수상한데 기독교인들의 눈에만 징조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종말의 징조들이 축복으로  포장되는 현실에 그들도 이상하기는 했나 보다. 재물과 권력을 칭송하는 세태를 징조로 삼자니 교회의 큰 손들이 두렵고, 뭔가 강한 묵시적 징조를 만들어야 했다. 마침 징조들이 조금씩 자기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다. 힘없는 성소수자들을 말세의 대표적 징조로  만들어 버리면 다른 거대한 징조들을 덮어버리기에 충분하다. 

테이크 쉘터(Take Shelter), 제프 니콜스 감독, 2013년

커티스(마이클 새년 분)는 친구 드와르트와 한 조가 되어 건축 회사에서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어느 날 퇴근 길에 드와르트가 자신의 아내와 채팅에서 만난 또다른 여자와 3인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농담을 하자 두 사람은 함께 웃지만 그것은 드와르트가 편치 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아픈 농담이다. 드와르트는 커티스에게 “너는 참 잘하고 있다”라며 행복한 가정을 부러워 한다.

집으로 돌아온 커티스는 귀머거리 예쁜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행복에 젖는다. 그의 표정에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이 맞나?’라는 자신감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어쨌든 미국 시골(오하이오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요롭지 않아도 행복한 삶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이다. 바느질에 소질이 있는 아내 사만다(제시카 챠스테인분)도 벼룩시장에 수공예품을 내다 판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좋은 아내다. 그녀가 돈을 모으는 것은 듣지 못하는 딸의 귀에 인공 달팽이관을 심는 수술을 해주기  위해서다.

그에게 잘하고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들은 날로부터 커티스는 악몽에 시달리는데 폭풍우가 몰아치고 그에 놀라 키우던 개가 무는 꿈에서부터 딸과 함께 괴물로부터 공격당하는 꿈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꿈이 밤마다 그를 괴롭힌다.  더 심각한 것은 꿈에서 물린 자리가 실생활에서도 쑤시고, 심지어는 공포에 눌려 밤에 침대에 오줌을 싸기도 한다.    

아이의 수술도 점차 다가오고, 사만다는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휴가 계획도 세우고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 커티스의 마음은 악몽 때문에 편치 않다. 이제는 낮의 일상생활까지도 심각하게 영향을 받을 정도로 그의 환영과 환청은 심해진다. 커티스는 그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종말의 징조같다고 느끼면서도 의학적 도움을 받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젊은 시절 편집증으로 요양소로 보내지기도 했던 어머니를 찾아가 유전적 요인을 찾아봐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는다. 그럴수록 커티스는 자신이 보는 환영이 단순한 환영이 아닐 수도 있다고 확신하고 마침내 빚을 얻어 낡은 대피소(shelter)를 더 안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수술비 걱정을 하는 아내로서는 빚을 얻어 대피소를 만드는 남편이 불쾌하다. 대피소가 완성된 후 커티스는 징후에 놀라 가족을 데리고 대피소로 피신한다. 이튿날 아침 대피소 밖의 세상이 궁금하지만 선뜻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부부는 옥신 각신 하다 커티스가 마침내 문을 열지만 세상은 본래 그대로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는 커티스는 그것 때문에 회사일을 등한히 하고 결국 해고 당한다. 해고는 의료 보험의 중단을 의미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딸의 달팽이관 수술도 요원해 진다. 태양 아래서  방주를 만들던 노아처럼 우려 속에 대피소를 만들던 커티스, 모리아산에 이삭을 바치던 아브라함처럼 가족까지 희생하는 커티스 그는 정신분열자인가? 시대의 징조를 발견하는 예지 능력을 가진 사람인가? 헌신적인 아내의 말에 따라 치료를 받던 커티스는 마음을 식히기 위해 가족과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그곳에서 커티스와 아내, 아이에게 환영이 아닌 진짜로 거대한 폭풍우가 몰려온다.   

공포는 자연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었다    

커티스의 정신분열적 환영은 사회 역사적 징조의 대체 환영이다. 시골의 중년 남자에게 사회구조적 모순을 분석하고 걱정할 역량은 없다. 그가 아는 징조는 성서가 말하는 종말의 상징으로서 자연 재해, 재난 영화가 보여주는 좀비나 새들의 습격 정도일 것이다. 이런 류의 징조들이  커티스의 의식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커티스가 대피소를 만들면서 회사 장비를 반나절 몰래 사용한 일은 당연히 잘못이지만 사장은 그러다가 사람이라도 치어서 사고라도 냈으면 어쩔 뻔 했냐고 커티스를 해고한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고소문화의 단면이다. 그밖에 경제 불황, 높은 보험료,  높은 유가, 벼룩 시장에서 푼돈이라도 벌려는 아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길가에 나 앉은 집기들이 커티스에게는 직접  체험되는 악몽이었으나 그는 성서가 가르쳐 준대로  영화에서 본대로 현실은 외면하고 악몽을 꾼다.  어쩌면 주위에서 사회적 모순에 대하여 이야기들을 많이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듣지 못하는 딸처럼 듣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 태풍이 두려워 피했으면서도 방독면을 쓴 우스꽝 스러운 모습이 커티스가 가진 공포의 성질을 은유한다.

 

커티스는 악몽의 유전적 원인을 찾기 위해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는 자신의 병이 단순히 정신적 악몽 따위가 아니었다며 증세가 시작된 1986년을 똑똑히 기억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방사능 누출로 인해 엄청난 손실과 피해를 입었던 해가 1986년이다. 영화에서는 자연 재해를 두려워하는 커티스가 대피소에서 난데없이 방독면을 착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체르노빌 사태를 빗댄 장면이다. 당시는 레이거 노믹스 시대로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 정책이 빛을 발할 때다. 당시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고, 중산층 붕괴를 예고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커티스가 느끼는 불안은 학습된 불안이다. 구체적인 불안의 대상을 경고하는 경고등인데 안타깝게 그는 학습된 불안만 두려워 했고, 착하기만 하는 신앙 좋은 아내는 의사의 치료에만 의지했다.

이제 대피소도 없는 바닷가의 휴가용 주택에서 재앙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그러나 커티스는  이겨낼 것이다. 피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함께 공포를 나누는 아내도 옆에 있다. 남편만 시달리던 공포의 실체 앞에  아내 사만다는 남편 보다 앞에서 맞선다. 그녀는 더이상 공포를 피하지도 않고, 남편을 정신병자 취급하지도 않고 남편보다 앞서서 헤쳐 나갈 것이다. 얼마전 대피소에서 밤을 지낸 후 아침에 부부는 서로 문을 열지 못해 미루었지만 공포의 실체 앞에서  힘을 모을 부부와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바울에게 묵시사상은 도피도 아니고 미래에 모든 해결책을 떠 넘기는 비겁함도 아니다. 공포처럼 다가오는 묵시적 징조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견뎌내는 일이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의 몫이다.움베르토 에코가 인류의 미래를 비극적 낙관주의로 표현했듯이 공포앞에 놓인 인류는 슬프지만 신앙안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이겨낼 용기가 생겨나야 한다.  하지만 영화제목처럼 피난처를 취하려면 피난처가 필요한 시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징조를 징조로 못보는 사람들을 고칠 방도가 보이지 않는 절망이 또 다른 묵시적 공포로 다가오는 세상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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