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보는 교회문화
거꾸로 보는 교회문화
  • 양재영
  • 승인 2014.08.14 13: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BF, B.O.A.T 2014 개최
지난 9일(토) 파사데나 장로교회에서 새로운 예배 문화를 추구하는 모임인 CBF(Center for Beauty and Faith)가 주최한 'B.O.A.T 2014(Beauty of Art & Truth)'가 열렸다. 기독교 미학과 예술을 토대로 교회와 신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열린 이번 컨퍼런스에 많은 이들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시도의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본지는 다양한 행사와 강의 중 CBF를 대표하고, 이번 컨퍼런스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이도환 목사의 문화강의를 지면에 옮김으로 ‘문화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돕고자 한다. <편집자주>

 

   
▲ 이도환 목사가 '다시 문화를 이야기하다'는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 뉴스 M

교회 안에 2, 30대의 청년층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청년의 4%만이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대학생으로 축소하면 2% 밖에 안 되는 실정입니다. 장로교 통합 교단을 예로 들면 전체 7500개 교회 중에서 중·고등부 없는 교회가 50%, 유치부 없는 교회가 70%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불교, 가톨릭과는 달리 사회에 대한 교회의 이야기를 않는다는 점에서 그 위기의 순간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많은 신학적 성찰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문화적 관점에 의한 성찰은 드물었습니다.

문화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일반적 것은 ‘문화는 human making이다' 라는 정의입니다. 혼자하는 것은 문화가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이라도 의미를 주고받고, 소통하는 것을 문화라고 합니다. 즉, 이 세상에 문화가 아닌 것이 없으며, 사람의 의도와 창조성이 들어가는 것은 모두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를 곧 세상이다’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문화가 세상이라면 교회와 세상의 관계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화신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역사 안에서 ‘교회와 문화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문화란 그 문화를 만든 사람들의 본질이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문화 안에 본질적 가치가 들어 있다는 것이죠. 아티스트가 만들어 낸 작품 안에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와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세습문화, 방주문화는 한국교회의 현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본질을 알고 싶으면 그 교회가 표현해 놓은 것,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됩니다. 그런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문화는 무엇일까요?

대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습 문화’입니다. 몇몇 교회는 심지어 교단을 탈퇴하면서 세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만들어 내는 것은 세습 문화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문화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젊은이들 1백만 이상이 참가하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기회균등의 가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에는 기회 균등의 가치 속에 능력을 바라보는 문화를 만들고 있는데, 교회는 세습 문화를 만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 예배와 강의 중 그림을 그리는 이문수 형제 © 뉴스 M

또 하나는 ‘방주 문화’로 하나님과 세상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세상과 어떻게 대적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이 방주 문화로 인해 교회는 이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고, 다가가야 하는가에 대한 공식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 위기의 가장 중요한 측면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만, 세상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물질의 선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물질이 악하다면, 성육신하신 주님이 악한 물질로 오실 수 있었겠습니까?

칼빈은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극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감수성이 있었습니다. 우리처럼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감수성입니다.

방주문화로 인해 우리는 세상과 자연을 지그시 관조하는 시선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현재 교회 안엔 집회하고 부흥회하고 찬양집회하고 여름에 단기 선교하는 정도의 문화만 남아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미국 안에 참선과 명상하는 이들을 포함한 불교신자가 약 3천만 명입니다. 어떻게 미국 사람들이 불교에 심취하느냐에 대한 분석을 보면, 기독교의 언어가 너무 어렵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언어들이 너무 추상적이고,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돈 때문에, 일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데, 교회 안엔 그거와는 상관없는 영적 대화만 있으니, 나와 상관없는 종교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에 반해 불교는 생활과 밀접한 메시지를 통해 세상과 다가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의 ‘건축문화’를 보면 교회 안에 ‘경쟁문화’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필요에 의한 건축이 아니라 경쟁에 의한 문화입니다. 전에 “옆 교회에 큰 문제가 생겼다”라며, “조만간 우리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는 기대감에 기쁘게 웃으시는 목사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덧 이웃 교회의 아픔이 우리 교회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홀리 스피릿(Holy Spirit)이 아니라 홀리 스플릿(Holy Split)이 되었습니다. 이런 한국교회를 두고 ‘돈 많고, 고집 세고, 뚱뚱한 50대 졸부를 연상시킨다’는 말이 많습니다. 가치도 잃어버리고, 세상도 잃어버린 현실이 바로 한국교회의 상태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교회가 신뢰를 받고,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대표적 시절은 초대교회 때였습니다. 초대교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의 교회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 당시의 교회들은 그 사회가 풀지 못하는 신분의 차이, 빈부 격차 등에 대한 대안을 교회가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공적 신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추수 때가 돼서 추수하면 그 동네 가난한 사람, 과객, 고아를 위해 일부를 남겨 두라”는 메시지가 있는 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공적 가치입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너희들의 소유 안에는 가난한 자들의 몫이 있다’는 방식의 공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모델은, 친구들이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모습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병든 사람이든 함께 예수님께로 가는 것, 그게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영성 신학자들은 이런 ‘공적가치’ 부분이 기록된 성경을 찢어 내 보니까, 읽기가 불가능한 너덜너덜한 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공적가치를 빼면 말할 수 없는 책입니다.

초대교회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부자와 가난한자, 주인과 노예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이, 감히 밖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던 공동체였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초대교회가 보여준 모습들을 통해 공산주의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구한말 백정의 아들로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인 박서양은 백정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백정이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왔던 이들이 바로 개신교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도 그러한 선한 운동보다는 복음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한국 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지나친 복음에 대한 강조’라고 봅니다. 복음이 공적으로 표현되기 보단, 입만 사는 종교가 되었다는 겁니다.

   
▲ MCX의 '현대 음악 속의 예수' 공연 © 뉴스 M

“가치에 숫자를 맞추어라”

마지막으로 창의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창의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이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창의력이라는 것은 신학자들이 정확하게 풀 수 없는 단어입니다. 이 창의력이라는 단어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는 있지만 말로 풀 수 없는 신비로운 단어입니다.

십자가도 하나님의 창의력입니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우면서, 기존의 상태와 질서를 뒤집는 변혁이라는 의미가 창의력 안에 있다면, 십자가는 기존에 없었던 방식으로 기존의 방식을 뒤집어 버린 사건입니다.

우주창제도 아주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혼돈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절서와 조화를 만드신 것입니다.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있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 버리는 창의력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이 실천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지음 받은 것이 우리입니다. 미학 하시는 분들의 고민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 안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있을 텐데, 어떤 점이 유사할까?’를 고민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창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언제 가장 희열이 느껴집니다.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뭔가 만들어낼 때, 가장 희열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삼위일체가 보여준 세상과 연결의 방식을 우리가, 교회가, 아티스트들이 붙잡아야 할 언어가 창의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와타나베 이타루라는 분이 쓰신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루마리’라는 빵집을 통해 최대 이윤을 포기하면서 직원과 같은 월급을 받는 등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 분들은 기독인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 세상의 자본주의 가치 때문에 힘들어하는 상황을 보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이 땅에 창의적으로 실천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교인이 20명만 되면 그 다음에 교회를 분리합니다. 현재 분리한 교회만 5개입니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분리하지 않고 1백 명이 넘으면, 좀더 목회하기 쉽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숫자에 가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숫자를 맞추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더 많을수록 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20이 넘으니까 목회가 제대로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제대로 목회를 할 수 있는 인원이 20명이라 생각되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가치에 숫자를 맞추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독교적 가치를 세상 안에서 창의적으로 실천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의: 이도환 목사, 정리: 양재영 기자 / <뉴스 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