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라는 인생의 마약
성공이라는 인생의 마약
  • 최태선
  • 승인 2014.08.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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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사람들의 함정

로빈 마이어스 목사의 <언더그라운드 교회>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수도승이며 저술가이며 시인으로서 철저한 로마 가톨릭 정신과 전통에 서 있었던 분인에, 한번은 군산복합체의 핵무기 전략계획과 곤련하여 "멀정한 정신(sanity)을 비판하는 글을 썼던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글 제목을 "아돌프 아이히만을 기억하는 경건한 묵상"이라 붙였다. 홀로코스트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었던 나치 장교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것이 머튼이 쓴 글의 첫 부분의 배경이었는데,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멀쩡한 정신"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와도 상관이 있다.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나온 가장 곤혹스런 사실들 가운데 하나는 심리분석가들이 그를 검사하여 그가 완전히 멀쩡한 정신이라고 선언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데, 바로 그 사실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에 모든 나치들이 전신병 환자들이었다면 ... 아마도 그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정신병 환자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끔찍한 잔인성은 어떤 점에서 좀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처럼 침착하고 "균형을 잘 유지하여"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장교가 대량학살을 감독하는 행정업무를 책상에 앉아서 양심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더 끔찍하다. 그는 기민하여 징서정연했지만 상상력은 없었다. 그는 체제와 법과 질서에 대해 마음 깊이 존중했다. 그는 거대한 국가의 순종적이며 충성스럽고 신실한 장교였다. 그는 자신의 정부를 위해 매우 훌륭하게 복무했다."

머튼은 계속해서 분명히 아이히만은 잠도 잘 잤으며, 식욕도 왕성했고, 단지 그가 실제로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때만 "마음이 불편했던" 것처럼 보였는데, 심지어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조차도 아우슈비츠에서는 자기의 업무로 인한 결과들을 볼 때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명백했던 사실은 나치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자신들이 미쳤다고는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업무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또한 매우 애국적인 업무라고 믿었다. 머튼은 계속해서 "우리는 멀쩡한 정신을 정의감, 인간미, 사려 깊음, 타인을 사랑하며 이해하는 능력과 같은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의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존해서 세상을 야만성, 광란, 파괴로부터 지킨다. 그러나 이제는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란 정확히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른트의 글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 역시 재판을 받고 있던 아이히만을 보고 그가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5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주범이라면 무언가 특별하게 악한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라도 조금만 주의깊게 역사를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은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란 정확히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공감이 가는 귀한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사실에 공감을 표하고 있는 자신 역시 그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또 다른 깨달음입니다. 어쩌면 참된 신앙이란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망의 몸

신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 로마서 7장 후반부가 바울의 글이 아니라 후대에 누군가 덧붙인 부분이라고 배웠습니다. 특히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는 탄식 부분은 도저히 바울이 하는 말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체 문맥으로 보아 그 부분은 어울리지도 않으며 글의 흐름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물론 신학교 교수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그 은혜의 복음을 듣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눈뜸'입니다. 복음을 듣고 있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이 없다면 복음은 죄의 법에 사로잡힌 한 인간을 '거룩'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으로 위장한 '죄의 노예'는 사단이 원하는 최상의 시나리오입니다.(기독교 역사를 통해 또 오늘날 혼탁한 교회의 현실 속에서 그런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게 되는지요.)

사도 바울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이 올무로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입니다. 기껏 복음에 대해 눈을 뜨고 은혜에 흠뻑 젖었지만 그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위선적이고 사악한 인간이 되게 할 수도 있는 자아의 치명적인 결함을 보고, 승리의 찬가(8장)를 노래하기 전에 서둘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 처절한 절망감을 느끼기 전에는 제대로 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은혜는 자신의 실체를 성령의 조명을 통해 생생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공의 길을 달려갈 때 그것은 사상누각이 아니라 사단의 아방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사'들과 '목레기'들은 바로 그런 무리들의 행렬일 뿐입니다.

인간이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복음은 오직 사망의 몸에서만 피는 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새로운 발견이나 주장이 아닌 것은 주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절한 자기 절망', 그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출발점이요, 깊은 신앙으로의 터닝포인트입니다.

멀쩡한 정신을 가지 아이히만, 동네 이웃 아저씨와 같은 아이히만이 대량학살을 주도하는 모습에서 언제라도 죄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이히만과 똑같이, 그가 무슨 일을 하건 유대인 대학살과 같은 엄청난 범죄를 언제라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담고 있는 우리의 몸이 사망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삶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의 몸을 발견하고 탄식했던 그는 또 다시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의 밧세바 사건은 그러한 경계를 소홀히 했을 때 일어나는 인간사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왕들이 전쟁하는 시기에 다윗 본인이 참가하지 않아도 될만큼 나라가 부강해지고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사망의 몸의 올무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죄의 노예가 되어 한동안 범죄를 기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가 이전에 받고 경험했던 자신에 대한 처절한 절망과 자기 발견이 없었다면 그는 그 이후로 사울과 같이 영원히 죄의 법에 사로잡힌 사단의 하수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공한 목회자들이 사단의 올무에 빠지는 것은 성공이라는 인생의 마약이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허물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든 대형교회가 된 교회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 교회 목사에 대한 신격화가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망의 몸을 가진 인간을 거룩하게 만듦으로서 기독교의 비극은 잉태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누군가에게서 칭찬을 들으면 제자들을 불러 자신에게 하루종일 욕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불식간에 교만이라는 죄에 빠져 사망의 몸을 지닌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그는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경성하며 사는 삶의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의 현장을 떠나 조용한 곳을 찾으셨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를 '움부리아의 작은 예수'로 부른 것은 적절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그런 행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표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작은 예수'를 보았다고 말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은 자신이 사망의 몸임을 깨닫고 경성하는 삶을 사는 이들에 의해 오늘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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