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이야기] 쿠바에서 보내는 마지막 글
[쿠바이야기] 쿠바에서 보내는 마지막 글
  • 최명숙
  • 승인 2009.07.15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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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생태공동체 체험하러 페루로 떠납니다

▲ 해안 도로, 말레꽁. 아바나 시민들의 휴식처. 나에게도 언제나 좋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사진 제공 최명숙)
7월 초에 쿠바를 떠난다. 이번 글이 쿠바에서 보내는 글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말로 다하지 못할 고마움이다.

가장 먼저, 능력도 기술도 돈도 연줄도 없는 나를 이렇게 멀리 쿠바까지 오게 인도해주시고 늘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무모한 나를 걱정해서 강력히 반대했다가 끝내는 허락해주신 부모님과, 나를 믿고 지지해준 형제와 친구들, 지인들과 이웃들에게 감사드린다. 막 피어난 첫 연정을 남겨두고 씩씩하게 엄마를 따라나서 준 딸 혜령에게 감사한다. 말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여자친구를 1년이 되도록 잊지 않고 종종 이메일 써주면서 "거기서 괴롭히는 놈 있으면 전화해. 내가 혼내줄게"라고 말해준 꼬마 신사에게도 고맙다. 그 마음이 참 예쁘다. 우리나라 소식을 전해주며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도록 챙겨주신 목사님과 언니,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쿠바에서는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작은 일에 마음 써주고 챙겨주고 퍼 주신 분들에게 감사한다. 짧은 순간 스쳐 지나면서 나를 기쁘게 해주었던 쿠바 사람들의 작은 친절과 상냥한 인사와 칭찬들, 그들의 순박한 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특히, 정말 내가 봐도 얼굴이 붉어지는 글들을 귀한 지면을 할애하여 실어주신 <뉴스앤조이>에 감사드리고, 관대한 마음으로 봐 주시며 용기와 격려, 진정어린 비판을 아끼지 않으신 모든 독자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감정적이고 편파적이고 주관적인 글이었다고 자인한다. 그러나 나란 사람이 어차피 객관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고백한다. 앞으로도 나는 이 쪽 저 쪽으로 치우치며 여기 저기 부딪혀가며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점 충분히 감안하여 읽어주셨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넘치도록 은혜를 받았지만, 내 평생 이것을 다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갚을 것인가? 나는 평생 빚진 자일 수밖에 없다. 다만 나에게 고마웠던 분들을 본받아 내 능력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나 그런 일을 만난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는 것으로 조금씩 빚을 갚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맞교환이 있을 수 없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일대일 맞교환은 불가능한 것 같다. 진정으로 나에게 고마운 분들에게 밥 한 끼, 선물 한 꾸러미로 어찌 감히 그 보답이 될 것인가?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라 했으니 은혜도 돌고 도는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계속 빚지는 자로 살아가려 한다. 

▲ 출퇴근 길에 늘 만나서 인사하던 청소부 아저씨. 항상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었다.
쿠바를 떠나 페루로 간다. 페루에 있는 한 생태공동체로 들어가려 한다. 이제 그만 쿠바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디로 갈까 고심했었다. 원래 계획은 쿠바에 한 3년 정도를 머물렀다가 우리나라로 돌아간 후에 반드시 시골로 이사해서 농사일을 배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한글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고 딸애를 위한 교육 환경이 너무도 안 좋아 예정보다 일찍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페루나 콜롬비아 등으로 남미를 여행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작정 여행만 할 것이 아니라 뭔가 더 현지 삶에 밀착된 체험을 했으면 싶어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우연히 남미에 생태공동체들이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인터넷을 헤맨 보람으로 콜롬비아, 볼리비아, 페루, 칠레 등에 있는 20여개의 생태공동체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점점 파괴적이고 소비적으로 치닫는 삶에 대한 대안으로 결성된 이 공동체들은 직접 땀 흘려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하며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적인 삶, 그야말로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물론 농사는 유기농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쿠바를 올 때처럼 무작정 그 모든 생태 공동체에 이메일을 보내어 내 소개를 하고 그 곳에 들어가 일하며 농사일을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일한 대가로 숙식을 제공해달라는 것이었다. 서너 군데에서 답장이 왔는데 모두들 호의적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나를 받아주겠다고 한 곳은 페루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완전하게 허락이 난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쪽에서 볼 때에는 이 한국여자가 아무 데나 빌붙어 지내려는 기생충 같은 인간일 수도 있고 혹은 농사일을 그저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철부지일 가능성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나에게 일을 시켜보고 성실하게 해 내는가 아닌가를 봐서 허락을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로선 당연한 대응이다. 그쪽에서 보낸 편지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오랫동안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쓰여 있었다. 내가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기를 바란다는 뜻일 것이다. 나도 부디 내가 그런 인간이기를 바란다.

일 년 동안의 쿠바 생활을 정리해본다.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쿠바에 온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떠났던 것이지만, 쿠바를 소재로 하거나 쿠바 생활에서 영감을 얻어 글을 쓰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미 익숙해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곳에 나를 던져놓으라는 내 안의 명령이 나를 움직이게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곡을 두 편 썼다. 언제 그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는 자유롭고 신선한 도전이었다고 자족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불안하지 않은 무위의 삶도 경험해보고 싶었으나 천성이 과업중심적인 사람이라 그것만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한국에 비해 생활은 훨씬 단순하고 소박했었다. 소비와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와 상점들이 없으니 별로 사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었던 것 같다. 확실히 시장 경제는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안달하게 만드는 욕망들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멋 부리는 것을 좋아하고 쇼핑도 좋아하는 편이라 쿠바 생활이 괴롭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와서 지내보니 오히려 편안했다. 페루도 대도시는 여느 곳 못지않게 화려한 것 같던데, 다시 소비와 소유의 욕망이 나를 자극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필요한 것 이상 욕심내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갖고 싶다.

고작 일 년, 그것도 처음으로 해본 외국 생활이지만 매 순간이 '다름'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말, 습관, 예절, 사고방식, 문화의 엄청난 차이에 부딪히고 놀라면서 알아가고 적응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다르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차원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느 날 딸애가 스페인어를 하는 걸 들어보니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싸울 태세로 덤비는 것 같고 상대방을 누르려는 듯한 말투였다. 왜 그런가하고 살펴보니 쿠바 아이들이 전체적으로 그런 투로 말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그렇다. 전화를 걸면 너무 무섭게 대응을 해서 얼어붙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 주인집 할머니도 원래는 참 친절한 분인데 전화를 걸어본 사람말로는 너무 무서워서 대답을 못할 정도란다. 딸애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했을 뿐인데 결과는 사뭇 공격적인 말투가 되어버린 것이다.

받아들일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 이해해야 할 것과 분별해야 할 것, 섞여들면서도 물들지는 말아야 할 것, 시비는 가려도 비난하지는 말아야 할 것, 이런 것들 속에서 지혜롭게 처신하기가 참 어려웠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경우, 거의 모든 부분에서 한국을 비하하면서 외국 문화와 삶의 방식을 신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한국 것만을 고집하고 현지의 삶에는 전혀 섞여들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치우침 없이 너그럽고 열린 마음을 가지면서도 분별력을 잃지 않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 혜령이의 학교 생활. 이웃들이 따뜻하게 도와줘 무사히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정체성이라는 면을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확고하고 편견 없는 정체성이야 말로 낯선 땅에서도 잘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어디서 왔고, 왜 왔으며, 왜 여기서 살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알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지내다보니 그런 근본적인 의문들이 나를 괴롭힐 때가 많았고, 그럴 때면 썩 훌륭하지 못한 이 곳 환경과 사람들을 흉보는 것으로 나의 변명을 삼는 못난 모습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떠나라는 내 안의 명령을 따르며, 특별히 쿠바라는 나라를 선택했던 것은 내가 살아온 환경과 아주 다른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고,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라는 체제 때문이었다.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은 우리에게 사회주의란 정말로 낯설고 두렵기까지 한 세계였다. 하지만 반공 교육의 반대급부였을까, 나는 오히려 이상적인 기대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인간의 소유욕을 원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이성으로 재단된 사회주의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시스템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 쿠바를 떠나며 고마운 분들께 드릴 선물로 길거리 화가에게 그림을 샀다.
그러나 쿠바에서 일 년을 지낸 지금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결국 희망은 '사람'에게만 있다고. '시스템'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할 것 같다고. 개인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 즉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조적 문제인 것은 맞다. 그러나 사회 구조의 변화, 시스템의 혁신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고 치유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체제를 만들어 낸다 해도 개개인이 자율성과 능동성을 잃어버린 채 그저 떠밀려 다니는 데로 살아갈 뿐이라면 더 이상 그 사회에 생명력은 없다는 게 내가 이곳에서 느낀 점이다.  

혁명이란 거대한 힘의 전복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떤 강제력이 지배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그 강제력은 민중의 합의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세워진 그 강제력을 따르는 데 있어서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식과 성찰이 함께 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여러 번을 뒤집고 뒤엎어도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개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자신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마나 어려운가! 나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일은. 한참 뛴 것 같은데도 거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도  내가 할 일, 내 삶의 최대 의무는 나 자신을 성숙시키고 변화시키는 일이니 게을리 말고 계속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곱게도 밉게도 정들었던 쿠바를 위해 작은 기도를 올린다. 하나님, 쿠바가 더 잘 살게 도와주세요.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 말고, 국민들이 더 성숙해지고 맡은 바 책임을 다 하며 거짓말 하지 않게 해주세요. 거짓말하는 양심들이 찔림을 받게 해주세요. 소시민적 삶을 벗어나 공동체를 위한 꿈을 갖고 자신의 삶을 헌신할 수 있는 그런 쿠바인들이 많아지게 해주세요. 그래서 쿠바가 '사회주의'라는 특정한 체제로서가 아니라 '쿠바'라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쿠바의 혁명이 한 번의 혁명으로 그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진정한 혁명이 되도록 인도해 주세요. 제도의 혁명을 넘어서 양심의 혁명, 가치관의 혁명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 신선한 변혁과 전진의 중심에 쿠바의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게 해 주세요, 아멘!     

최명숙 / 희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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