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은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이순신장군은 구원 받을 수 있을까?
  • 양재영
  • 승인 2014.08.16 11:12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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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을 통해 바라본 신학적 문제제기
   
▲ 영화 '명량' 포스터 © 뉴스 M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배경으로 만든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의 기세가 파죽지세다. 최근 15일만에 누적관객수 1200만 명 돌파라는 기록을 만들어내면서 한국 영화사를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다. 이곳 미주 지역에서도 지난 주 LA 개봉을 시작으로, 8월 15일을 기점으로 미국 전역 30여곳에서 동시 개봉될 예정이다.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명량’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동양대 진중권 교수의 "명량은 졸작"이라고 폄하를 시작으로, SNS를 통해 다양한 반응과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선 ‘명량’의 시대와 세월호의 아픔앞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2014년의 현실이 닮았다며, 안전불감증에 의한 ‘대란’의 결과로 온 국민의 국가에 대한 무기력증으로 몰아간 현실이 2014년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과거 천안함 침몰 원인을 ‘좌파 군인 자폭 의혹’을 제기하며, ‘빨갱이 세력은 다 떠나야 한다”는 설교로 물의를 빚은 강남 순복음 교회 김성광 목사가 지난 10일 영화 ‘명량’은 ‘국민을 단결시키는 영화’라고 추켜세우며, “종북좌파들이 영화 <해적> 같은 영화를 보면 도둑놈들이 된다. ‘명량’ 이순신 영화를 봐야한다”라며, "청와대 대통령도 청와대 직원과 함께 이순신 영화를 봤다. 나라 민족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이순신, 이순신 영화를 보자"라며 목사들의 낙후한 정치적 줄대기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은 구원 받았을까?"

몇해 전 가톨릭 신자였던 일본의 소서행장과 이순신 장군의 구원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으며, 그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천주교도였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일본 예수교 보고서에 가장 뛰어나고 열성적인 신자였던 아버지를 둔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고니시는 가톨릭, 즉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비기독교인이었기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의 논란이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다는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과 같이 복음을 접할 수 없었던 분들의 구원론은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있을까?’즉 ‘이순신 장군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주제를 영화 ‘명량’ 흥행과 때맞추어 몇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 봤다.

남가주 교계를 중심으로 목회자들과 교수들에게 전화와 메일로 문의했고 좋은 의견과 조언을 받았다. 몇몇은 ‘민감하고, 별 의미 없는 주제’라는 이유로 입장표명을 거부했고, 의견은 제시하되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취합한 의견 중에 세 사람의 견해만 정리해 봤다. 구원론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들어보려는 취지로 준비한 기사이므로 댓글을 통한 다양한 의견제시는 환영하지만 이단 재판소와 같은 의견은 사양한다. (여러 오해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견을 제시해준 세 분께 감사드립니다. 따라서 편집부 판단으로 본 글의 취지와 상관없다고 생각되는 댓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

 

<김세윤 교수> (풀러신학교)

“일반 계시와 일반 은총의 범주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 풀러 신학교 김세윤 교수 © <뉴스 M>

이순신 장군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 문제는 원칙적으로 일반 계시, 일반 은총의 범주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분들이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주시는 계시에, 자신의 양심에 새겨주시는 참됨, 의로움, 선함에 대한 의식과 요구에 얼마나 순응하여 살았는가,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에 따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이때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두 가지 진리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다든 것이다. 둘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아둔하고 죄 많은 인간인 우리 누구도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느니, 또는 구원을 못 받을 것이라느니 지레 판정하는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하는 죄를 범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순신 같이 아무리 영웅시되는 인간도 (또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그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그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고, 또 얼마나 거스려 살았는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판정하실지는 더더욱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일반 계시, 일반 은총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에 대해 너무 좁게 생각하거나,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 문제 등과 관계하여 생각할 때는 그것을 사실상 무시해 버리는 경향을 많이 나타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아주 편협하게 인식하는 경향도 나타낸다. 하나님을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자신들과 같이 구원론의 몇 문장들을 복창하지 않으면 그냥 지옥에 보내는 무서운 분으로 인식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독선이 강하고 타인들에 대해 정죄하는 태도를 많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려 하지 말고, 다만 그들이 겨우 희미한 일반 계시와 일반 은총에 따라 사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한 은총을 덕입고 하나님의 환한 계시에 따라 삶으로써 구원을 확실히 받도록 열심히 전도 할 따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순신 같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의문이 생길 때는 하나님께서 의롭고 자비롭게 심판하시되, 그들이 겨우 일반 계시와 은총에만 의지하여 살았던 것을 감안하여 복음을 아는 우리보다는 더 너그럽게 심판하시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온전하고 환한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을 받아 이미 구원의 첫열매를 얻기까지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과연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의 문제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예수를 구주로 시인한다”는 등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 봉사를 오래 하여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된 사람이라도 구원을 이미 따 놓은 당상으로 여기는 것은 구원파적 신념이지 성경적인 신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목사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판검사가 되고, 사장이 되어서 도리어 자리를 이용하여 더 큰 속임수를 쓰고, 불의를 행하고, 약한 자들을 억누르며,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등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의 종 노릇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되, 독선과 우월감과 패거리 정신으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더 엄격하며 그들에게는 겸허하고, 측은히 여기며 너그러운 자세를 갖추고 해야 한다.

 

<김재영 목사> (ITS)

“성경적 기반이 희미하므로 말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ITS 김재영 목사 © 뉴스 M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교회가 없었던 시대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선 알수가 없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불가지론자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지 않은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주를 몰랐던 사람들의 구원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판결하실지 우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 민족에게는 훌륭할지 몰라도, 일본 사람들이 보기엔 훌륭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보는 훌륭함이나 높은 도덕성은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일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실 것이다.

또한. 성경도 이런 부분에 대해 아주 희미하게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로마서 1장에서 나오는 자연인의 양심의 문제도 구원론적으로 쓴 건 아니기에 뭐라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다시 말해 ‘이순신 장군을 모델로 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구원문제’는 토론이나 논쟁이나,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자기 조상의 구원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온 이야기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권위자가 된 것처럼 이야기하면 안된다. 개인적으로야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 좋겠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뭐하겠는가?

기독교를 전제했을 때에 성경적 근거가 되는 구절이 있거나 하면 좋겠는데, 이 문제에 대해선 성경적 기반이 너무 희박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모르는 일에 대해 안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정이철 목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천주교 등에서 주장하는 다원주의적 주장은 복음이 아니다” 

   
▲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정이철 목사 © 뉴스 M

죄사함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믿지 않은 어떤 사람도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사람이 설령 아무리 자선이 많았고, 아무리 애국심이 투철하였고, 다른 사람과 조국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지는 못한다.

인간의 아름다운 덕과 영웅적인 행위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도 남아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아름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남아있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선행과 덕행이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탁월한 인간의 도덕과 의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받지는 못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구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천주교를 왜 조심해야 하느냐면, 천주교는 기독교의 복음을 말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행을 통하여 우리가 다 구원 받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인데, 이게 인류에게는 대단한 평화의 소식이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심지어 부처를 믿어도, 다른 종교를 믿어도 선행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이러면,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장군,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다 구원받는 것이 된다. 그러한 소식은 인류에게는 아주 멋진 복음이다. 그러니까 천주교가 이렇게 환영을 받는 거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죄사함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메시아의 속죄의 피 제사, 십자가를 믿고, 그 십자가에 자기 영혼을 맡기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따라야한다.

도올 김용옥 같은 사람이 기독교에 반발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한신대에서 신학을 했기 때문이다. 도올은 안병무 교수에게 신학을 배웠는데, 그는 민중 신학자이다. 민중신학은 예수님을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투쟁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억압받고 사회의 그늘진 곳을 위하여 봉사하고 투쟁하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라고 가르친다.

나 같은 사람을 그들은 보수주의자 근본주의자라고 가르치는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흘림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올이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을 향하여 방송에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성호 이익 선생에 의하면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하던데..”그러니까 김수환 추기경은 “적어도 우리 천주교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지옥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참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면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라고 공영방송에서 했는데, 이게 오늘날 복음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정도로 지금 잘못된 종교다원주의 복음이 복음이 되고 있다. 같은 민족이고, 선조로서 존경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양재영 기자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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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2014-08-29 23:35:08
저는 몇년간 교회 분란을 겪으며 구원관이 흔들린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목사님께 알리지 않은 "팀장회의"를 하고 익명으로 교인 전체에 목사님을 헐뜯는 편지를 보내고 계속 나쁜 소문들을 퍼뜨리며 교인들을 선동하다가 어느 한 날을 기하여 교인의 반이 갑자기 예배에 나오지 않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벌써 3~4년 전의 일이네요.

그 사람들은 떠나서 새 교회를 세웠는데... 저는 그때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안의 불신자들"에 대해서 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주여주여 하지만 교회 안에서 희생과 결단의 순간이 오면 꼬리를 내리고 자신의 체면을 위해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 아무리 봐도 세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 같지 않은데, 그들은 또 교회를 세우고 봉사하며 또 싸우다가 찢어짐을 반복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 전통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일입니다. 과연 이들이 구원을 받을 믿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오랫만에 와서 참 좋은 기사 보고 갑니다. 세 목사님들의 의견이 다 일리있고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존경하는 목사님께 여쭈어 봤을때도 비슷한 대답을 들었었습니다.

제 눈에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보였던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언젠가 회개하고 참 믿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믿음과 구원에만 신경써도 힘든 판국에 남을 판단하고 그들의 구원에 대해 신경썼던 제 자신을 반성합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하두 이상하게 변해서 혼란이 컸었나봅니다. 어쨌든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진한 커피 2014-08-23 07:09:15
이순신 장군은 안타깝게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하고 범죄한 아담 안에서 출생하여 생을 살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아담이 온 인류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록 이순신 장군이 인간적으로 의로운 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받은 아담 안에 있었으므로 영생할 길이 없었습니다. 오늘 날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두 번째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으신 두 번째 아담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인류, 죄 사함을 받은 재 창조된 인류에 속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과 알 수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이순신 장군은 아타깝게도 타락한 아담 안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루이스 [3] 2014-08-20 12:26:21
그렇다고 마냥 불가지론적이지도 않다. 베드로나 바울 그리고 요한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다가 구원에서 배제된 것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의 사역’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알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자신의 몫이 될 것이다. 구원에서 여러 시제가 있지 않는가.
아는 것 한도 내에서 옳다 그르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것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분명히 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해한 잣대를 가지고 인간의 상황과 현실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물론 만인구원설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에서 배제되는 잣대를 선명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처럼 어느 누구라도 구원에 열려 있음을 선포하고 동참케 하는 것이 아닐까?

루이스 [2] h 2014-08-20 12:25:18
구원을 말할 때 지성을 가지고 상식을 가진 인간이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 장애인시설에 있는 정신박약아와 지체부자유아들은 도저히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죽어가는 신생아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사야에 등장하는 자들은 어린 양 어린 염소, 어린 사자, 어린 아이, 새끼, 젖 먹는 아이, 젖 뗀 어린 아이들이다. 이사야가 그리는 그림은 마냥 상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성이나 이해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모두가 구원에 참여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구원에 배제된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는 내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동일하게 복음을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김세윤 교수님의 일반 은총은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것이며, 그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자신의 분야에서 발한다.

요는 구원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참으로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구원 자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욘2:9)이기에 우리의 이해 범주로 잣대를 삼기에는 신비적인 부분이 많다. 레슬리 뉴비긴의 설명처럼, 주님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구원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 모두가 놀라워하는 마지막 날의 재판장은 하나님이시며 다른 어떤 이도 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자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은 “Is anything too hard for the LORD ?”(창18:14) 말씀하셨고,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란 질문에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고 대답하셨다. 뉴비긴은 ‘정말로 신중한 신학자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구원의 가능성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말에 공감이 간다.

루이스 [ 1] 2014-08-20 12:23:26
20-30십년 전 대학교 시절에 한 후배 여동생이 근무하는 장애인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렇게 심각한 아기와 아이들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억이 조금 가물 하지만, 태어나서 1달을 사는 아기, 1년을 견디는 아이, 머리가 커서 늘 누워있는 아이,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식사를 한 적이 없는 아이, 대부분이 중중의 장애를 가진 아기와 아이들이었다. 그 당시 후배의 여동생은 한 어린 아기를 10여일 간호하였는데, 그 아이는 결국 세상을 보지 못하였다.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겪어왔고, 또 겪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었다.

여러 마음이 교차하는 때에 후배가 질문을 하나 하였는데 이들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형, 이 아이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실까요?” 그 때 드는 성경구절이 이사야의 말씀이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해 됨과 없고 상함이 없는 그 나라가 올 것을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