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대신 사람을 보라
문제 대신 사람을 보라
  • 김기대
  • 승인 2014.08.1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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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 아담스(Patch Adams) - 로빈 윌리엄스를 추모하며

영화배우 로빈 윌리암스가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명문 사립학교의 교사로 자만심 가득한  학생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사로 열연한 <죽은 시인의 사회>(피터 위어 감독 1989), 학교 청소부지만 천재였던 청년이 자기 인생을 찾도록 도와 준 교수로 열연한 <굿윌헌팅> (구스 반 산트 감독, 1997)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늦깍이 의대생으로 연기한 <패치 아담스>(톰 새디악 감독, 1998)도 대표작 중 하나다. 그의 죽음을 접한 오바마 대통령은 “그는 외계인으로 우리 삶에 도착했다. 그리고 인간 영혼의 모든 요소를 고루 어루만지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우리를 웃게 하고 울게 했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항상 장난기 가득한 얼굴 뒤에 지독한 우울증과 파킨슨 병이 숨어 있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신들린 연기로 우리에게 눈물과 기쁨을 주던 그였지만 정작 자신의 문제는 풀지 못한채 우리와 이별했다.

패치 아담스- 상처받은 치유자

불행한 환경에서 자란 헌터 아담스(로빈 윌리엄스분)는 자살 미수로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는다.  정신병원에서 헌터는 환자들을 통해 삶의 의미와 유머를 배워나간다. 그곳에서 ‘상처를 치유하다’라는 의미의 ‘패치(Patch)’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정신병원에서 나와 늦깍이 의대생으로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성실과는 거리가 멀고 늘 장난기 가득한 행동으로 진지함이 떨어지는 듯하지만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한다. 괴짜 의대생 패치는 3학년이 되어서야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까지 치료하는 진료행위를 시작한다. 학교측에서 내린 경고조치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원에서 만난 한 기업가의  도움으로 의대생 친구들과 함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운다. 그러나 의사 면허증 없이 진료 행위를 한 것이 학교측에 발각되어 퇴학의 위험에 직면하고 사랑을 느끼던 좋은 동료 캐린(모니카 포터분)이 환자에게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모든 것을 잃은 패치는 다시 자살의 유혹을 받지만 처음과는 달리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선다.

길을 잃은 인생

“내 인생의 행로가운데서 내가 어두운 숲에 있음을 발견했다. 바른 길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는 패치가 독백한 단테의 시구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거나 알고도 가지않는 삶을 살다가 세상과 이별한다. 패치 역시 길을 잃고 자살을 하려다가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가는 길을 택했고 그곳에서 길잃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을 위한 치유자가 되려는 자신의 길을 찾는다. 우리의 길은 길잃은 사람들을 통해 발견된다. 이것이 바른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예수 밖에 없다. 그 역시 제 길을 찾기까지 30년의 세월을 준비했다. 바울은 자신이 가던 길이 누구보다도 옳은 길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눈이 멀고 갈길을 찾지 못했을 때 길이 보였고 그때부터 예수처럼 상처입은 치유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패치는 모든 사람이 편하게 갔던 길을 피한다. 늦게 들어간 의대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그는 남보다 앞서 달려갈 수 있지만 자신이 정신병자였다는 상처, 사랑하던 사람을 자신의 의욕 때문에 잃은 상처를 간직한 채 다른 이를 위한 치유자가 된다.

내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더라도,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은, 내가 마음 아프게 하는 그 사람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이런 편지를 쓴 것은, 내가 거기에 갔을 때에, 나를 기쁘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내가 마음 아픈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의 기쁨임을, 여러분 모두를 두고 나는 확신하였습니다. 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2:1-3)

바울에게 위로는 아픔에서 나온다. 자신의 아픔이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될 수 있고, 다른 이의 아픔이 바울 자신을 위로할 수 있음을 믿었다. 위로는 공감에서 나온다. 기도로도 안 낫는 가시가 있었기에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자기 자신이 다른 이들을 박해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가 당한 박해로부터 배울 수 있었고 그것은 예전의 박해자가 아닌 상처받은 치유자로 아픈 이들과 함께 한다.  서울대 경제학과 김병연 교수는 8월 14일자 중앙일보 시론에서 이렇게 쓴다.

한국인의 공감 능력은 바닥 수준이다. 2010년의 세계가치관조사에 따르면 한국 응답자의 40%만 관용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자녀 양육 시 가르쳐야 할 중요한 덕목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스웨덴의 87%, 미국의 72%, 일본의 65%에 크게 뒤졌을 뿐 아니라 이집트, 우크라이나, 중국보다 낮아 조사 대상 52개국 중 최하위 수준이었다. 또한 “사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중요하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정도로 볼 때 한국은 꼴찌에서 두 번째에 머물렀다. 반면 물질주의 정도를 보여주는 한 지표에서는 한국보다 일인당 소득이 높으면서 더 물질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나라는 없었다.

북한에 대한 공감을 가지자는 김교수의 주장이지만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북한에 대한 공감만이 아니다. 세월호 유족에 대한 공감도 점점 시들해지고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조차 있다. 이민자로 살아가며 다른 소수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무능과 죄악으로 치부해 버린다. 패치의 공감은 그가 아파본 데서 나왔는데 한의 민족이라고 불릴만큼 슬픔많은 우리는 왜 이리도 모진지! 패치는 공감도 전염성이 있다고 말하는데 우리에겐 전염되지 않은 것 같다.

문제 대신 사람을 보라

패치는 정신병원에서 트루먼 쉬프라는 유명한 기업가를 만난다. 그도 입원한 사람인데 항상 손가락을 펴들고 몇 개냐고 물어 본다. 갯수를 맞추면 어김없이 트루먼에게 바보소리를 듣는다. 궁금한 패치가 트루먼을 찾아가 정답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문제 대신 사람을 보라”는 대답을 들려 준다.

의사라는 직업은 병이라는 문제만 직면하고, 법조인들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상투어는 아무런 의미없는 말이 된 시대다. 교회에서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목사들의 충고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문제에서 사람을 먼저 보게 되면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핵심 쟁점이 되고 있는 수사권과 기소권도 사법 절차라는 문제에 집중하면 해결될 수 없다. 검찰은 기소 독점주의를 유지하고 싶을 터이고 사법경찰이라는 제도가 그들의 밥그릇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경찰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서 떨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차나 관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는 사람 중심의 사역을 했는데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많이 부족했다. 바울을 천거한 바나바였지만 마가의 문제를 놓고 계속 마가와 함께 여행하자는 바나바와의 의견대립으로 결별하게 된다. 성과주의로만 보자면 교회사 속에서 쓸쓸히 사라져간 바나바보다 바울의 전략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바나바를 내친 것은 바울의 실수였다.

   
▲ 패치 아담스는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어릿 광대의 모습도 마다 않는다. © 뉴스 M

후에 바울은 감옥에서 만난 오네시모를 통해 사람의 소중함을 깨우쳐 나간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오네시모는 자신의 친구이며 동역자이니 잘 대해주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물론 고대 노예제 폐지라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만큼 바울의 의식이 사회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했지만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호칭함으로써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동격임을 암시한다. 인간적으로 보든지 믿음으로 보든지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과 형제가 될만한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당시로서는 오네시모를 향한 최선의 찬사였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이윤과 성과가 우선시 되면서 사람은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졌다. 목회 분야도 모든 것들이 사역중심으로 되어가면서 사람이 실종되었다. 사람이 없어진 상태를 교회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말로 도피하려 하는데 그것만큼 무책임한 말은 없다. 하나님도 스스로 사람이 되었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라며 사람을 버리고 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린 도망자가 마을로 숨어 들어왔을 때 병사들은 그를 내어 놓지 않으면 마을을 몰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렸고 목사의 결정에 따라 어린 도망자는 병사들에게 넘겨졌다. 마을 사람들은 살아난 안도감에 축제를 벌이던 벌이던 밤, 천사가 목사를 찾아와서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다그쳤다. 천사는 소년이 바로  메시아였다고 알려준다. 목사가 메시아인지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었습니까?라고 억울하게 되묻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단 한 번 만이라도 소년을 찾아가 그 눈을 들여다 보았다며 너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마을의 생존이라는 문제에만 집중했을 때 목사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 우리도 사역현장에서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사람에 집중하다는 것은 사회의 각종 제약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 우리 또한 자유를 얻는다.

패치 아담스는 실존 인물인데, 그가 학생시절 만든 치료소가 모태가 되어 무료 ‘게준트하이트(Gesundheit)’가 설립되었고 많은 의사들이 이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기독교인은 누군가를 치유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상처가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약이 될 수 있고, 하나님 중심이라는 교리적인 선포에서 벗어나 이웃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고민을 함께 나눌 때 모든 장벽은 허물어질 것이다.

패치 아담스는 그의 퇴학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징계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제 증인인데 오늘 결정이 어떻게 내려지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사가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의사를 못하게 할 순 있어도 내 영을 지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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