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와 조용기는 힘이 세다
김홍도와 조용기는 힘이 세다
  • 길벗
  • 승인 2014.04.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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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의 몰래 읽은 책 [광신], [우상의 추락]

길벗(gilbert@www.newsnjoy.us) 의 <몰래 읽은 책>은 기독교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책들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제목이나 내용이 기독교인들 공동체내에서는 선뜻 꺼내 읽기 어려운 책들이어서 코너 이름을 이렇게 지어 보았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격려를 바랍니다. – 편집부 -

 

   
 
     
 

광신

지하철 역에서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과 같은 행위, 신앙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재단해 버려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믿음을 지칭할 때 광신이라는 말을 쓴다. 무조건 믿는 것이 맹신이라면 광신은 맹신에 행동까지 얹은 것이므로 더 위험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광신적 특징 때문에 항상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 가끔은 억울한 비판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들어 마땅한 소리들이다. 그런데 광신을 예찬(?)한 책이 나와서 눈길을 끈다.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영국에서 활동 중인 이탈리아 출신 철학자로 문화 비평과 사회 이론 분야에서 눈에 띄는 좌파 이론가다. 그는 <광신>(문강형준 역, 후마티타스)에서 우리가 회피했던 단어 ‘광신’을 현대의 담론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인간 이성을 신뢰하는 사회주의 이론가의 입에서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나 어울리는 광신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토스카노는“타협의 거부, 원칙의 긍정, 격정적 당파성은 현 상황의 급진적 변혁을 갈구하는 모든 정치의 계기들”이라며 광신을 새롭게 해석한다.

‘광신(Fanaticism)’은 서구에서는 일종의 병리현상으로 취급되지만 토스카노는 천년왕국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노예제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 아나키스트, 마르크스주의자 등을 광신자로 분류하면서 이들의 비합리적 행동주의가 변혁을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저자는 자유주의, 어슬픈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것을 슬쩍 외면하려는 위선자들을 엄중히 경고한다.

토스카노가 모든 광신이 옳다고, 바꿔말해 이성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 자유주의와 결합해 점잖은 그러나 비겁한 현대인들로 만들었던 부분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칸트를 광신자라고 불렀던 니체의 비판을 소개한다.누구보다도 이성을 강조했던 칸트에게 이런 비판은 매우 경멸스러운 것이지만 여기서 그가 사용하는 광신이라는 말의 유연성이 발견된다.

“덕은 투쟁속에서 드러나는 도덕정 성향이지 성향에서 완벽한 순수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담긴 성스러움이 아니다”라는 칸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인간의 오성과 이성을 이야기한 점잖은 철학자가 아니라 꽤 과격한 선동가로 새롭게 다가온다.

결국 토스카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열정을 잃어버린 현대인에 대한 경고다. 그동안 현대인들은 이성 , 계몽 등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지켜야 할 진리를 놓쳐 버렸다. 진리를 선택해야 할 순간 내가 그 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광신>을 통해 묻고 있다

조용기씨와 그의 아들이 배임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아도, 김홍도씨가 종북타령을 그치지 않아도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 세력은 든든해서 사회 여론 한 가운데 보란 듯이 서 있다. 교회 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땅밟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꽉 막힌 예수쟁이가 아니라 열린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비판할 줄만 알았지 그들만큼의 열정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그들에게 지는 이유다.

 

 

 

 

 

 

   
 
     
 

우상의 추락

니체는 “본래 이 세상에는 단 한 명의 기독교인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라고 비아냥 거렸는데, <우상의 추락> 저자인 미셸 웅프레는 이 말을 “본래 이 세상에는 진정한 프로이트학파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1939년 9월 23일 런던에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운명을 달리했다”로 비틀었다.

계몽주의 이후 체면을 구긴 상태에 있던 기독교에 결정타를 날린 세 사람은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드다. 니체는 신을 죽였으며,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만들었다. 그랬던 니체와 마르크스가 요즘 다시 신학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니체는 신만 죽인 것이 아니라 모든 형이상학적 전제를 배제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적(?)들도 함께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대화가 가능해진다. 유대기독교 전통과 유물론의 대화를 시도했던 발터 베냐민 덕분에 21세기 유럽 철학자들은 이 대화를 혁명의 담론으로 끌어내는 데 몰두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문제다. 비전공자가 보아도 심할 정도로 프로이트는 꿈과 섹스로 인간과 역사를 풀어내려고 한다. 유일신 사상과 남근 콤플렉스를 연결짓는 그에게서 새로운 위기를 함께 풀어나갈 기독교의 파트너로서 공감대를 찾기는 어렵다. 정신과 의사들에게 프로이트의 저작들은 바이블이며, 문화 평론가들의 평론 속에 프로이트가 몇마디 들어가주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는다. 하기야 섹스 과잉의 시대에 프로이트 이론만큼 성에 그럴듯한 기능을 준 사람은 없지 않은가?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과 함께 우리 시대 위험한 사상가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미셸 옹프레는 프로이드의 이론이 거짓과 환상 위에 건축됐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들이 엄마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없애야 하는 식으로 상징화시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하지만 옹프레는 이것은 프로이트 자신의 유아적 소원이었을 뿐이라고 폄하한다. 프로이트에게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선뜻 도전하기에 두껍고 어려운 책이다.

프로이트 학파의 반대가 두려워 번역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프로이트는 무서운 우상이다. 그런데 옹프레도 역자 전혜영도 성역에 도전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번역에 얽힌 후일담이 한국 교계에 있는 우상들을 생각나게 한다. 김홍도 조용기는 힘이 세지만 그들을 섬기는 추종자들은 괜히 안스러워 보일 때가 많아 동정심까지 갖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이들은 김과 조의 추종자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데 스스로들은 교양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며 산다.한국 교회의 숨겨진 우상 그들이 과연 누구일까? 독자 여러분의 추측에 맡긴다.

 

 

 

길벗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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