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은혜와 신자의 자살
구원의 은혜와 신자의 자살
  • 정이철
  • 승인 2014.04.16 16: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찬송하게 하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알려진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혼율이고 또 하나는 자살율이다. 이혼율을 집계하는 방식은 매우 복잡하여 정확한 이혼율을 산출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이혼율이 세계 제일이라는 통계에는 오류가 담겨져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자살율을 집계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자살은 누가 보아도 이견이 없는 명백한 사건이므로 통계상의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없으니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세계의 여러 나라보다 높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이전에는 충격적인 자살 소식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불신자들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성도들의 자살과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이름이 알려진 목사의 자살 소식도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살 소식이 많아지면서 또 하나의 딱하고 불편한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 자살한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운명에 대한 말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라도 자살이라는 끔찍한 죄악인 자살로 생애를 마쳤으니 구원을 잃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더욱 더 큰 슬픔을 당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비록 자살이 심각한 죄악이기는 하나 은혜로 얻은 구원이 취소되어 다시 지옥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는 인터넷 싸이트를 보면 자살했으니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투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자살하였다고 하여 다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강조하는 신학

자살한 성도는 다시 구원을 잃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주장하는 내용은 나름대로 타당한 신학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 꼭 자살이라는 한 가지의 죄로만 국한시켜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자. 자살은 죄인들이 범할 수 있는 많은 죄악들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자살했으므로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주장을 좀 더 일반화시키고 폭 넓게 말하자면 죄악을 범하고 회개하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죄악이 구원을 상실되게 만든다는 신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러한 신학의 출발은 첫 사람 아담의 타락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신학적인 주장을 하면서 교회사에 등장한 최초의 인물은 펠라기우스였는데, 그는 타락한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에게 유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구원의 소망을 가지지 못한 타락하고 완전히 부패한 존재라고 믿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구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펠라기우스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그 이후의 사람들은 조금 씩 특징을 달라하였으나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가능성을 높이 보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려주면 인간은 스스로 믿음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수 있는 선한 행위를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철저하게 회개하고, 스스로의 의지로서 선을 행하여 실제적으로 삶이 의로워짐으로서 구원을 얻고, 의로운 삶이 지속됨으로서 구원이 유지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사상을 간단히 줄여서 말하면 ‘행위구원론’이다.

행위에 의해 예비되는 성령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신학이라고 하여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성화되어 구원을 얻고 유지한다는 신학은 얼핏 생각하면 성령의 역사하심이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쪽에서도 신앙의 완성과 구원을 위해 성령의 임재하심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신학에서는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임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행위를 강조하는 신학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성령의 임재가 인간의 선택, 철저한 회개, 인간의 간절한 기도, 금식, 선한 행실에 의해 예비된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서 회개하고 선한 행실을 실행함으로 실제적으로 성화되고 의로워진다고 가르친 존 웨슬리는 신자의 그러한 삶을 계속 유지하면 어느 순간에 성령이 임하여 ‘완전한 신앙’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비록 웨슬리는 행위에 의해 성령이 예비된다고(끌어당겨진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으나, 이후 그의 제자들은 성령의 임재와 인간의 행위를 더욱 긴밀하게 연관시켰다. 금식, 회개, 기도 등의 행위에 의해 성령의 임재가 준비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을 더욱 강조하여 행위구원론을 완전했다고 평가되는 찰스 피니는 인간에 의해 일정한 신앙조건이 형성될 때 드디어 성령의 임재와 부흥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과 사랑에 속하는 문제이다. 사람의 노력, 정성, 행위에 의해 성령의 임재가 기계적으로 준비된다는 가르침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만일 그런 이론을 따라서 역사하는 성령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의 성령이 아니라 사탄이 조작하여 만들어 내는 ‘다른 성령’일 것이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다른 영’이 만들어 내는 유사한 성령의 역사, 즉 ‘미혹’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또한 많은 교회들이 참 신앙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자신을 구원하고 다시 자신을 죽이는 인간에 대한 신학

이러한 신학에 의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자신이 스스로 믿음을 선택하여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믿음에 합당한 의로운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계속 유지한다. 구원의 영속이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는다. 만일 성도가 믿음을 잃거나 죄에 빠지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떠나간다. 그러면 당연히 천국을 잃고 다시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인간을 구원하고 다시 지옥에 던져 죽이는 주체는 인간 자신이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받은 성도일지라도 자실을 비롯하여 다른 심각한 죄를 범하고, 이후 그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여 의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 가장 잘되는 신사도 교회인 ‘큰믿음교회’의 목사인 변승우 씨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고 힘주어서 가르치고 있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정확하게 이쪽 신학에 근거를 두고서 하는 말들이다.

인간의 선택과 행위을 강조하는 이러한 신학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서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정통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후에 세미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로 다시 등장하였다. 세미펠라기우스주의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펠라기우스 사상을 다소 긍정하였다. 타락한 인간은 원죄의 유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을지라도 여전히 상당한 수준의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능히 스스로 힘으로 구원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사상이 중세 로마교회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이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다시 확립하였다. 존 칼빈의 종교개혁은 당시 교회 속에서 잠들어가던 어거스틴이 은혜의 신학을 다시 되살려내어 구원이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알미니안이 등장하여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예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실 때 누가 믿음을 선택하고 누가 끝가지 믿음을 거부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궁극적으로 믿음을 선택할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믿음을 선택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주체는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고, 그렇게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다시 타락하고 죽으면 구원을 상실한다는 것이었다.

알미니안의 영향은 받은 존 웨슬리에 의해 행위구원론은 더욱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웨슬리는 원죄가 유전된다는 사실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선행하는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질 때에 스스로의 의지로서 믿음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구원의 길을 선택하는 주체는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신자라도 도중에 타락하여 믿음을 버리고 죽으면 또 다시 구원을 잃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쳤다.

행위구원론은 개혁주의 교회 속에서도 나타났다. 개혁주의 신앙전통에서 자랐으나 후에 웨슬리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찰스 피니에 의해 행위구원론은 더욱 더 강화되었다. 찰스 피니는 초창기에 대중전도 집회에 힘쓰다가 후에 미국의 Ohio 주 Oberlin의 한 신학대학의 교수가 되어 원죄가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전가받은 하나님의 법정적인 의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선을 행함으로 실제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찰스 피니가 주장하여 널리 퍼진 행위구원 사상을 ‘오버린 완전주의’라고 부른다.

행위구원론에 오용되는 성경 말씀

인간이 스스로의 결단과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다시 죄악을 범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신학이 근거로 드는 대표적인 성경의 말씀들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말씀 세 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5,6)

구원의 시작과 구원의 지속이 인간의 의지와 행위에 기초한다는 주장은 주로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이 근거로 제시되면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고 항상 깨어 근신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이 행위구원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 말씀들을 기록한 성경 저자들의 사상 속에서 구원이 결국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통하여 얻어지고 유지된다는 사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말씀들의 진정한 의미가 신자의 행위에서 구원이 비롯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라면 구원에 관한 성경의 다른 더 많은 말씀들과 상충되어 버린다. 결국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선택으로 말미암는 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반대로 구원이 인간의 선택과 종교적인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 두 가지가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일부분이 아닌 전체적인 내용 속에서 구원이 인간의 선택과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은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종합하여 볼 때, 행위구원론이 근거로 제시하는 이런 말씀들이 강조하는 것은 신자가 알면서도 범하는 죄악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들이다. 신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이 신자가 다시 범하는 죄로 인하여 취소되어 다시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자살과 다른 죄악들

자살해도 천국에 가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은 참으로 듣기에도 딱하다. 결코 자살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자살은 분명히 심각한 죄악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스스로 파괴하는 죄악이므로 자살은 더욱 더 심각한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신자가 자살로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여 다시 지옥에 떨어졌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 사회의 자살률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잔혹하게 말하면 자살하려던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영원히 당할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서라도 자살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진리를 왜곡시킬 수는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을 뿐이지 결코 사람의 선택이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친다. 자살뿐 아니라 다른 그 어떤 인간의 선한 행위들과 악한 행위들이 구원과 영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조금 어색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신자가 자살하면 다시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성도들, 목회자들, 신학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왜 자살만 따로 떼어서 더욱 더 강조하는가? 하는 것이다. 남을 죽이는 살인죄와 다른 많은 죄악들도 심각한데, 이상하게 자살에 대해서 더욱 더 가혹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자살한 신자가 다시 지옥에 떨어졌다는 말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남을 죽인 신자들이 구원을 잃고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고는 강조하지는 않는 것 같다.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그릇된 신학적 관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다시 지옥가게 만드는 수많은 죄악들이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이 범할 수 있는 많은 죄들이 있음에도 유독 자살에 대해서만 더 혐오하고 경멸하는 자세는 편향되었다고 여겨진다. 자살뿐 아니라 다른 모든 죄악들, 그리고 죄악을 범하고서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는 우리들의 모든 행위들을 동일하게 취급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하는 신학에 의하면 다시 타락하고서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다가 죽음을 맞으면 모두가 지옥에 가기 때문이다. 자살하여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1분, 1초도 얻지 못하는 영혼들이나 심각한 다른 죄를 범하여 타락한 상태로 10년을 살면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고 살다 죽은 사람들의 경우가 결국에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살 하나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말고, 행위구원론 신학이 신자를 다시 지옥에 가게 만드는 것으로 경계하는 모든 죄악들을 함께 묶어서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대한 성경의 말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만을 구원의 근거로 믿는 신학에서는 신자가 자살했다고 하여 다시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단 자살뿐 아니라 완전히 성화되지 못한 신자들이 지상에서 범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악들이 신자에게 주어진 구원을 취소하지는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 어떤 죄악도 신자에게 주어진 구원을 취소하여 다시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지게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요약해 보자.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롬 3:23, 5:12). 하나님은 우리들이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누리도록 선택하셨다(엡 1:4). 선택된 자들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이 이끄신다(요 15:16). 선택된 자들이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다(롬 5:6,8). 택하신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먼저 역사하시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 즉 하나님의 선물을 받게 하신다(엡 2:8).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예정된 영혼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신다(요 18:9).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 법정적 의인이 된다(롬 5:19).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 십자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최고의 법정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완전히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롬 8:1). 최고 법정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므로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롬 8:4). 마귀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롬 8:15)들에게 죄 있다고, 또는 구원을 누리기에 부족하다고 조소하거나 정죄하지 못한다(고전 5:17).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며 친히 돌보시는 보혜사로 성령을 파송하여 세상에 있는 신자들을 친히 인도하시고 돌보신다(요 16:7).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임하심은 곧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을 선포하는 인치심이다(엡 1:13).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으므로 신자는 영원한 구원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롬 8:15). 신자들에게 주어진 구원은 영원히 취소불가능한 구원이다(롬 8:38,39).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의 내주하심은 신자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던 것으로 간주되게 한다(갈 2:20). 동시에 이미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확증하여 준다(고전 15:20,21).

이것이 오직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은 기독교의 구원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은혜에는 인간의 자질, 선행,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신자들의 품성이나 인격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따라서 구원이 임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된 모든 과정을 자세하게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온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서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렘 33:8,9, 겔 36:22,23).

행위구원론은 시계추 신학

물론 정당한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도 신자의 변화된 삶과 성화된 인격과 삶에 무관심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신학의 신자의 성화는 행위구원론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행위구원론에서는 성화를 구원의 근거로, 또한 구원지속의 조건로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신학에서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성화는 구원받은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믿음의 열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게 되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가 구원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화는 하루 이틀 걸리는 과정이 아니고 일평생 지속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사는 동안 지상에서는 완전한 성화에 도달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행위구원을 이야기하는 신학에서는 전혀 다르다. 도덕적, 종교적 행위로 말미암아 실제로 성화되어 구원을 얻고, 계속 성회되어가다가 어느 순간 완전한 성화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런다가 죄를 범하면 순식간에 난파되어 다시 지옥의 밑창으로 떨어져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 행위를 중시하는 이쪽의 신학은 이처럼 극과 극을 오르내리고, 천국과 지옥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오두방정을 떤다. 만고불변의 진리인 성경에 기초하지도 않고 성경에 들어맞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신자의 자살 소식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

그렇다면 신자의 자살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이미 구원얻은 신자는 무슨 일을 해도 다시 지옥에 가지 않게 되었다고만 강조해야 할까? 아이면 인생의 고통이 너무 힘들어 질 때에는 자살도 생각해 볼만한 하나의 해법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자살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죄악이다. 신자가 자살했기 때문에 다시 지옥에 떨어졌다는 말이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진리에 왜곡한다는 것이지, 절대로 자살을 미화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는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가르쳐도 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상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째, 우리의 생명은 나의 것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즐거움을 얻으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실 때, 특별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을 닮은 인격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수 있는 자질을 가진 고귀한 하나님의 것이다.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힘써 가르쳐야 한다.

둘째, 자살을 떠올리게 되는 굉장한 고통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본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고 즐거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해야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괴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특히 괴로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진정한 신앙이라는 사실을 잘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심각한 가난, 고통스러운 질병, 이길 수 없는 큰 아픔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성도의 진질한 신앙이 드러나는 최선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살다가 자살이 떠오르는 괴로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구약성경의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 보신 후 훗날 반드시 더 큰 위로와 격려를 주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평소에 가르쳐야 한다.

셋째, 구원 받은 신자라도 자살의 함정에 빠지게 만드는 정신적 질병의 상태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되어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도 치매 등의 질병에 걸릴 수 있고, 우울증 등으로 인하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심각한 정신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런 가능성이 형성되는 신자들을 평소에 더욱 돌보고 베려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넷째, 누가 자살했기 때문에 다시 지옥에 갔다고 말하기 보다는 성령충만한 신자는 결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성령충만한 성경의 사람들은 굶주리고, 헐벗고, 매 맞고, 거처할 곳 없이 떠돌았을지라도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볼 때에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대부분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했고, 순교할지언정 결코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살로 인하여 충격을 받고 있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더욱 바람직하고 올바른 신앙이해와 자세를 가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다섯째, 지금까지 논의한 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는 자살 사례들과 직접 연관되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충격적인 소식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불신자들이기 때문이다. 혹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으나, 구원받은 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의 돌보심을 받으면서 살았던 진정한 성도였다고 보기 어렵다.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흔하게 나타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성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도록 방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구원받은 신자의 자살 사례는 전체 자살의 몇 %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를 진지하게 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많은 목사들이 자기의 느낌대로 성도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복음을 오해하게 된다. 자살을 경계하는 것은 좋으나,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영혼이 그 어떠한 일로 다시 구원을 잃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설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하고, 신앙생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대한 큰 오해를 야기한다.

정이철 목사 /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