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도 미안해서 떠났는데
행복하기도 미안해서 떠났는데
  • 김기대
  • 승인 2014.08.29 09: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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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뮤어 트레일 5박 6일 산행기(1)
   
첫날 나무 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마치 1박 2일 소풍을 온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 사진 김기대

2012년 개인사로도 목회적으로도 바닥을 친 적이 있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때, 사도 야고보의 순례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남프랑스에서 스페인 중부로 이어지는 810km의 도보 여행길)를 혼자서 30여일 동안 무작정 걸은 적이 있다. 하루 10불 정도의 알베르게라는 숙소에서 수십명의 땀냄새에 찌든 도보 여행객들이 함께 자다보면 고름이 나오는 물집 잡힌 발과 빈대 벼룩의 흉터만이 여행의 훈장처럼 남지만 계획했던대로 돌파구는 충분히 되었었다.

2014년 정치 사회적 현상이 나를 짓눌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고 묻게 만드는 어이없는 세월호 구조상황을 보면서 그들이 뭔가 거대한 것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세월호 특별법’을 수용하지 않겠구나라는 회의가 엄습하면서 현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게다가 피아를 구별못하고 분노만 가득한 몇몇이 세월호 추모 운동의 판을 흐려 놓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성에 대한 신뢰는 오간데 없이 사라진다. 본래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없긴 했지만 말이다. 시대와 상황이 나를 옥죄어 올수록 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신뢰하는 영낙없는 캘비니스트(Calvinist)가 된다.

하지만 세월호의 아픔과 가슴먹먹함은 순간순간 드는 생각일 뿐 일상에서 나는 여전히 행복하고 쾌활했다. 가수 장기하의 노래처럼 별일없이 사는 듯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라고 되묻는 나의 삶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행복하기도 미안해서 돌파구가 필요했다.

존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 오래전 부터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산티아고 길과 달리 전문적인 산행 실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야 갈 수 있는 길, 마침 경험이 풍부한 인솔자를 만날 수 있었다. 미 서부의 뼈대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탐험하고, 자연 보호를 위한 시에라 클럽을 창설했던 존 뮤어(1838~1914)의 사후에 그가 탐험했던 길을 이어 존뮤어 트레일이 생겨났다. 남쪽으로는 북미 최고봉인 마운틴 위트니(14,494피트, 4,417미터)에서 북쪽으로는 요세미티까지 이어지는 210마일(358킬로미터)의 구간으로 사람들은 중간에 음식을 공급받아 가며 20여일을 걷는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나 체력적으로 준비가 안된 사람들은 구간별도 나누어서 몇 해에 걸쳐 종주한다. 후자에 속한 나는 5박 6일 60여마일(96킬로미터)로도 행복을 죄스러워할 충분한 고행길이 될 듯해서 별다른 예행 연습도 없이 덜컥 따라 나섰다.

   
물위에 그림자가 비추어서 Shadow  Lake이라고 불리는 곳@ 사진 김기대

제 1일 (LA에서 Mammoth 거쳐 이름 모를 호수까지)

도보시간 4시간,  거리 7마일 (11킬로미터), 최고 고도 9,240피트(2,700미터)

LA에서 오전 6시에 모여 스키장으로 유명한 맴모스를 향하여 달렸다. 일행은 산행경험이 풍부한 인솔자 김시환씨와 그의 아내 김명자씨, 그리고 나와 김미향 집사(평화의 교회)  남자 2명 여자 2명이다.  김시환 씨 내외는 나보다 연배이지만 산행경험이 많았고 나보다 젊은 김집사도 여성 혼자서 곳곳의 산을 타고 나홀로 캠핑을 즐기는 사람이다.  나이도, 경험도, 남성의 체력적 우월함도 내세울수 없는 상황, 다시말해 내가 제일 ‘하치’였다.  두렵기는 했지만 아직은 들떠있다. 맴모스 스키장 입구에 있는 레인저 스테이션에 가서 퍼밋을 받는다. 존뮤어 트레일은 여름 시즌 동안 한정된 인원에게만 퍼밋을 내준다. 물론 트레일과 연결되는 곳곳의 캠핑장을 이용한 하이킹 산행객들은 부분적으로 트레일의 일부를 즐길 수 있지만 본격적인 트레일 코스를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퍼밋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신청한 퍼밋을 레인져 스테이션에서 확인받고 스키장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레즈 메도우(Reds Meadow)를 향한 버스에 올라탔다.

주차장에서 인솔자가 짐검사를 했다. 트레일은 짐과의 싸움이므로 짐을 줄여야 한다며 김집사에게 그녀의 1인용 텐트를 차에 내려 놓으란다. 그러면 그들 부부가 가진 2인용 텐트 하나, 나의 2인용 텐트 하나, 어!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인솔자의 말, “남자끼리 자고 여자끼리 자면 되지 텐트를 하나 더 뭐하러 가져가요”한다. 내 생각이 많이 음란(?)해 졌었구나 하는 반성의 시간. 나도 몇 개의 짐을 내려 놓았는데 그래도 배낭의 무게는 30파운드(13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듯 했다.

레즈 메도우라는 곳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첫 걸음 항상 가볍고 자신 만만하다. 오후 2시반에 시작된 산행은 4시간 동안 7마일 정도를 걸은 뒤 이름 모를 호숫가에 텐트를 쳤다. 인솔자는 전체 일정을 고려해서 좀 더 갔으면 하는 생각인 듯 했으나 고도가 높아질 수록 숨이 가빠와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행동식(조리 과정없이 그냥 먹는 끼니)이라고 인솔자가 이름지은 식사로 저녁을 대신했다. 무게를 고려해 준비한 캔에 든 햄이 아니라 비닐 포장이 된 햄을 넘기는데 미식거린다. 본래 그런 음식을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 느끼한 햄을 그냥 먹는 데서 온 현상이다. 눈치를 챈 음식 담당 김명자씨가 라면이라도 끓여 들일까요 했지만 안그래도 민폐형 산행 실력을 보여 주었는데 음식까지 정해진 메뉴를 어길 수 없다.

음식(찌꺼기도 포함)은 반드시 곰통(Bear Can)이라는 밀폐된 용기에 담아 텐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어야 한다. 이미 트레일 입구에서 멀리 걸은 길, 정해진 캠핑장이 있을리 없다. 그냥 물만 있으면 텐트치고 자야 한다. 곰의 공격을 긴장하면서 잠자리에 든 시간이 오후 8시 잘 일 말고는 할 일이 없다.  좁은 2인용 텐트 안에서 안지도 얼마 안되어 서먹서먹한 사내 두 명이 몸을 부대끼며 잠을 청한다.

   
트리니티 호수. 나무와 산, 물이어서 삼위일체인가? @ 사진 김미향

제 2일 호수의 길, 아름다우면서 힘든 길

도보시간 8시간,  거리 11마일(18킬로미터), 최고 고도 9,840피트(3,000미터)

늦여름의 산 속 기후를 착각했다. 존뮤어 트레일을 걷는 것 자체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진 않지만 준비하는 동안 장비값이 만만치 않았다. 어차피 캠핑을 위해 구입해야 할 것들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이미 있는 장비를  가벼운(값비싼과 동의어) 것으로 새로 장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낭도 텐트도 모두 최경량으로 바꾸어야 한다. 아내 눈치가 보인 나는 가벼운 슬리핑백은 사지 않고 산티아고를 걸을 때 사용했던 슬리핑의 내피(라이너)를 가져갔다. 이게 실수였다. 스페인의 9월 그것도 실내취침 때 문제가 없었던 장비로 8월말 시에라 네바다 심산 유곡의 밤공기를 견뎌 낼 수 없었다. 앞으로 4일 밤을 더 추위에 떨어야 한다. 돈 없어서 비싼 슬리핑 못 산 티는 내지 말아야 한다. 춥지 않았냐고 묻는 동료들에게 괜찮았다고 답한다. 조그만 교회 목사라고 너무 없어 보이는 건 싫다.

오늘은 곳곳에 호수란다. 이번 코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라는 것을 믿고 오전 7시
쯤 2일차 산행을 시작했다.

오후가 되니 또 지쳐왔다. 그림같은 호수들이 이름도 외기 힘들만큼 계속되었지만 몸이 힘드니 감동도 경이도 귀찮다. 그렇구나! 여행에서도 피곤 때문에 감동이 사라지는 법인데 그동안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이름으로 억지 감동을 유도하지 않았는지 회한이 밀려왔다.

호수에 흩어져 있는 돌섬들이 미국 캐나다 국경에 있는 따우전드 아일랜드(Thousand Island)를 닮았다 하여 같은 이름이 붙은 호숫가에 텐트를 쳤다. 어젯 밤 이름 모를 호숫 가에는 우리 팀밖에 없었으나 경치 때문인지 주변의 여러 군데서 산행객들이 텐트를 치고 있다. 물도 풍부하고 아름다운 지역이다.

   
가넷 호수. 산위의 하얀 부분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빙하다. @ 사진 김기대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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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 2014-08-29 20:18:45
훌륭한 여행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가봐야하는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뉴욕 근방에도 애팔래치안 종주 코스가 있습니다.
지인중 한 분이 권해서 저도 생각중인데 목사님의
여행기를 계속 필독하여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