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잃은 아비의 진실 찾기
자식잃은 아비의 진실 찾기
  • 김기대
  • 승인 2014.09.05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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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의 계곡], 바울에게 정의는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

죄를 용서받았다는 칭의의 개념은 야곱 테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 이후 정의의 개념으로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 테드 제닝스는 <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에서 정의(Justice)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 내적인 또는 개인적인 올바름(Rightiousness)의 문제로 전환되었다고 아쉬워 하면서 전환의  근원을 정의와 칭의를 분리한 종교개혁기로부터 찾는다.  

구약성서에서 정의란 옳은 일을 한 사람에 대한 보상을 의미하는 보상적 정의, 즉 율법에 기초한 정의였다. 그런데 제닝스는 바울과 데리다를 비교하면서 진정한 정의는 선물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과 주고 받음의 관계로부터 나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대가없이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것을 데리다의 ‘환대’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정의는 (율)법적 조항으로 규정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환대 즉 서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이제 여러분은 거짓을 버렸으므로,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실을 말하십시오.”(에베소 4:25)

사도 바울에게  거짓을 버린 사람의  태도는  이웃과 더불어 진실을 말하는 일이다. 율법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을 말하도록 만들어진 규정이라면 이제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이웃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법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0:34-35)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좀처럼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기소권과 수사권을 주자는 조항인데 반대측에서는 기존의 법률체계를 흔드는 일이라고 하고 유가족 측에서는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이 조항만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법률체계로만 보자면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2000년전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법밖의 정의로 해결해 내었다. 그런 식으로 바울을 독해하려 애썼던 데리다는 “정의는 법의 외부이면서. 법안에 함축되며, 그 실현을 위해서는 법의 힘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법은 법안에서 해결될 수 없기에 (새로운) 법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고 그때 비로서 진실규명이라는 정의는 완성된다.

환대란 외모(조건 상황)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서슬퍼런 군사 정권 시대도 아닌데 정의와 용기를 다시 되새김질 해야 하는 시대로 회귀한 지금 정의를 위해서 가장 시급한 일은 다른 이들의 받아들임이다.

여기 자식잃은 아비가 환대를 배워나가는 영화가 있다.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 - (감독 폴 해기스, 2007년)

헌병 상사로 퇴역한 행크(토미리 존스 분)는 참전용사들이 모두 그렇듯이 국가관에 충실한 사람이다. 길을 가다가 성조기가 잘 못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바로 잡아주고야 말 정도의 애국자다. 국가를 사랑한다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거대조직인 국가에 기대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바로 ‘힘’이다. 그는 남성다움을 강조한다. 그것이 누구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비극에 아내를 끌어들이기 싫어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이다.

   
▲ 아들의 시체를 확인하는 마이크의 부모, 수잔 서랜든은 슬픔을 내면으로 삭히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가부장 제도가 마치 남성의 그릇된 권위를 대신하는 말처럼 쓰이지만 그는 아내에게 군림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을 주요 결정에서 배제하는 남성성이 진리인줄 알고 사는 사람이다.  스스로들 폭력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다고 해서 가부장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백인으로서 그는 멕시칸도 엘살바도로 사람도 모두 무시하는 힘의 숭상자다.  반면 가슴을 모두 드러낸 토플리스 차림의 웨이트리스에게 “부인”(ma’am)이라는 경어를 사용할만큼   개인의 올바른 삶이 결국은 좋은 사회의 토대가 된다는 건전한 보수층의 전형이다. 이제는 ‘가스통 할배’라는 말로 표현되는 대한민국의 참전 군인들에 비한다면, 조그만 힘만 있어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희롱하는 대한민국의 남성들에 비한다면 그의 남성성은 바람직하지만 남성 중심주의자라는 점은 피해갈 수 없는 존재다.

남성이라는 족쇄에 같힌 주인공

그의 남성다움은 군대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나 큰 아들을 전쟁에서 일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들도 군대에 보낸다. 그 역시 베트남 참전 용사다.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남자가 되다는 이유에서 였다. 어느날 이라크에 참전했다가 미국으로 귀환한 아들이 부대를 이탈해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화를 받는다. 행크는 아들이 미국으로   귀환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더더욱  탈영신고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 부대를 찾아가 헌병출신 답게 사건을 하나 하나 추적해 간다. 아무리 퇴역 군인이라도 수사에 직접 나설 수는 없던 차에 지역 경찰 에밀리(샤를리즈 테론 분)의 도움으로 둘이서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그러다가 아들 마이크가 토막난 채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된다.

행크는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매우 침착하게 그가 믿어왔던 남성다움을 잃지 않고 사건을 좇아가면서 아들의 유품에서 발견된 동영상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그 동영상에는 군인다움도, 이라크의 정의를 위해서 참전했다는 명분도 없다. 두려움 섞인 욕과 뭔가 사고를 낸 듯한 장면이 좋지 않은 화질의 동영상으로 끊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환대를 배워 나가다

행크는 자신이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에서는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었다고 기억할지 모른다. 군인들도 품위(?)가 있었고 교육을 비롯한 대민 봉사도 열심히 했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베트남에서 이라크에서 물론 그런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제한된 기억은 좋은 것만 기억한다. 행크는 자기 아들을 비롯한 이라크 미군들이 애국심은 커녕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혼란에 빠져든다.

   
▲ 퇴역 헌병 행크와 시골의 여자 경찰 에밀리는 서로의 약점을 통해 환대를 배워 나간다.

싱글맘으로 아들을 혼자 키우는 에밀리 형사는 행크를 불러 저녁을 먹인다. 에밀리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행크는 에밀리의 아들에게  다윗이 골리앗을 엘라의 계곡에서 물리친 책을 읽어 준다. 행크는 책을 읽어주는 동안 다윗의 승리만 강조한다. 오랫 동안 전쟁의 경험 속에 있던 그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의 주제는 승리다. 그러다 사건을 추적해갈수록 그는 엘라의 계곡에서 자신이 숭상해 왔던 국가라는 거대 권력 또는 남성이라는 권력 앞에 점점 약해져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십자가의 약함이 나온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다윗의 설교도 승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왜 하나님이 다윗이라고 하는 여성스럽고 약한 존재를 그곳에 배치해 놓았는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골리앗이라는 괴물을 이긴  다윗의 교훈은 승리가 아니라 약함이다. 아들 마이크는 이라크에서 전화를 걸어 아버지에게 "여기서 꺼내주세요"라고 말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아들의 나약함만을 탓했었다. 동시에 영화에서는어린 소년 다윗을 전쟁터에 내 보낸 것이 정당했었는가도 묻는다. 감독은 용감한 다윗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렇게 몰아간 이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 다만 영화 속 행크만이 승패의 구조 속에서 다윗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행크는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정의는 힘에 의해서 완성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우쳐 나간다. 정의를 세워나가는데 도움을 준 이들은 싱글맘 에밀리(아내와 오랫동안 살아온 그에게는 싱글맘이라는 상황이 비정상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수치스럽게 가슴을 드러내놓고 먹고 살아야 하는 토플리스 차림의 웨이트레스, 보신주의에 찌든 지역 경찰들이었다. 두 아들을 군대에서 잃게 만든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슬픔을 절제하는 아내, 이전까지 자신의 보호대상으로만 알았던 아내도 큰 도움이 되었다. 군인 남자 행크, 다윗의 승리를 힘의 승리로 확신하던 행크는 이제 다른 이를 받아들이며  그가 다른 이에게 받아들여지며 진실 규명이라는 정의를 찾아 나간다. 국가라는 거대조직의 폭력적 후원자인 군대를 믿고 살아온 그가 이 조직안에서 정의는 이룩되지 않는다는 진리 또한 터득한다.   

가해자는 오직 국가일뿐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난 뒤 범인이었던  동료병사는 “지옥에 적응하기 위해선 괴물이 되어야만 했다”고 덤덤히 말한다. 살인을 저지른 뒤 그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온 본능은 배고픔이었다. 사건을 숨기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죄책감도 없이 그들은 피해자의 카드로 허기를 채운다. 그는 당시  마이크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더라면 가해자와 피해자만 바뀌었을 뿐  이라고 포기한 듯 이야기한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귀환하면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믿는 국가, 그러나 이후에도 매일 50명씩의 참전군인들이 후유증과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전쟁터보다 전쟁 이후가 더 지옥임 셈이다. 마이크가 미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는 지옥에서 빼내 달라는 자신의 외침을 용기없는 행동으로 치부한 아버지와 연락하기 싫었다.

 행크는 미국적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사건의 진실을 캐기까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성조기를 바로 잡아 주었던 그곳을 지나친다. 이미 저녁시간이 되어 국기가 내려온 시간, 그는 성조기를 거꾸로 게양한다. 국기가 거꾸로 게양되었다는 것은 국가적 조난을 의미한다고 가르쳤던 그가 의도적으로 거꾸로 매단 이유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금 조난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행크가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진실을 밝히는 장면이다. 

 ISIS(Islam State in Iraq and Syria)의 공격으로 이라크가 다시 전쟁터로 변할 전망이다. 수니파가 중심이 된 ISIS가 시아파가 정권을 잡은 이라크 정부를 공격하자 시아파의 후견인을 자처한 이란도 이라크를 돕겠다고 나섰다. 미국은 다시 공격 카드를 만지작 거리고 사이가 좋지 않던 이란과 미국은 ISIS문제로 협력할 분위기다. 국제 정세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수가 없다.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적 폭력은 폭력의 당사자들 때문에 긴 싸움이 될 듯한다. 지금 상태에서 진실 규명을 위해 가장 애쓰는 사람들은 유가족들이다. 누군가가 ‘계몽적 유가족’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금전적 보상에도 의사자 지정에도 그들은 휘둘리지 않고 사건의 진질 규명을 위해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기존의 대형 사고 유가족처럼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계몽적 활동을 하고 있다. 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보상적 정의는 진실을 밝히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결코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울지 않겠다는 유가족 측 대변인 유경근씨의 말은 영화 끝까지 울음을 참아 내던 행크를 닮아 있다. 

 

그 아빠 엄마들도 사고 이전에는 행크처럼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국가라는 거대 조직을 존중하려 했고, 작은 이익 앞에서 옳음을 외면하고 비겁하게 그릇됨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행크가 싱글맘 에밀리를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혼남인 유민아빠 김영오씨에게 보수 언론은 화살을 던졌다. 그랬던 그들이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무슬림 강경파건 모두 국기를 거꾸로 달아야 할 조난의 상태에 처해 있다. 이 조난상태를 누가 구해낼 것이고 누가 진실을 밝혀낼 것인가?

인간의 이성을 숭상했던 지난 세기의 희망은 사라졌다.  이성이 아직 살아있다고 믿던 시절, 메시아적 개입을 처음 이야기했던 발터 벤야민이 요즘 다시 각광받는 현상도 우리의 희망이  거대한 폭력에 의해 막혀있기 때문일 게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개념을 통하여 정의는 무력함으로부터 완성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무력함이란 거대 조직- 당시로서는 로마나 유대교의 법체계- 에 기댈 수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무력감이므로 패배감과는 다르다.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은 메시아의 충실성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의 타자에 대한 사랑, 곧 환대다.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이 우리를 환대할 때 정의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 되고야 만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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