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봄의 법칙’은... 없다!
‘바라봄의 법칙’은... 없다!
  • 강만원
  • 승인 2014.09.05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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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원 ⓒ <뉴스 M>

이른바 ‘바라봄의 법칙’을 성경의 진리나 기독교의 교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마음속에 큰 뜻, 이른바 욕망을 가득 품고 원하는 대상을 ‘바라보면’ 마침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라고 감히 단언한다.

그리고, ‘바라봄의 법칙’에 따라 성공을 이룬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을 꼽으면서, 다음 문장을 바라봄의 법칙을 증거하는 성경의 뚜렷한 근거로 제시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13:14-17)

조엘 오스틴의 잡서 '긍정의 힘'과 더불어 조용기의 '바라봄의 법칙'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을 호도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탐욕의 ‘기복 신앙’으로 이끄는 대표적인 견인차다.

물론, 거친 인생을 살아가면서 끝내 절망하지 않고, 거센 시련 앞에서도 언제나 ‘긍정하는 삶’, 험한 인생길에서도 늘상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서 무턱대고 세속의 타락한 욕망으로 몰아붙이는 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있게 텍스트의 의미를 살펴보면 ‘바라봄의 법칙’은 결코 성경 본래의 메시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긍정의 힘’이 오롯한 영성서가 아니라 심리적인 자극과 처세, 그리고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서인 것처럼, ‘바라봄의 법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상관없이 세속적인 성공주의를 한껏 부추킬 뿐이다.

바라봄의 법칙을 ‘전가의 보도’로 내세우는 자들의 섣부른 주장에서 우리는 성경 메시지의 심각한 일탈을 발견한다. 만약에 ‘바라봄’이라는 말이 단어의 형식에서 언뜻 느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말한다면 ‘바라봄의 법칙’은 모름지기 성경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이며, 소망을 품은 자이며, ‘사랑하는 자’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은사는 때가 되면 없어질망정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하리라” 라고 고린도전서에서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바라봄의 법칙’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소망, 이를테면 ‘천국 소망’이나 ‘영생 구원’과 같은 영적인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변질된 복음, 이른바 탐욕의 ’다른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다.

오순절 교단에서 흔히 듣듯이 “영혼이 잘되는 것과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건강하리라”는 속된 ‘삼중축복’의 주문처럼, 바라봄의 법칙은 개인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을 위한 주문呪文이며 성경 메시지의 엄연한 왜곡이다.

‘바라봄의 법칙’과 동일한 제목의 책들과 설교, 그리고 수많은 강연에서 우리가 세상의 육적인 축복과 달리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영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과연 보거나 들었던 적이 있는가?

기껏해야 ‘바라봄의 법칙’을 신주처럼 받들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면 언젠가 물질은 넘치고 건강은 증진되며, 남다른 지위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속된 바람이 아니던가? 이렇듯 ‘차고 넘치는 축복’을 제시하는 바라봄의 법칙은 결국 기도와 기대 그리고 소망을 통해서 자신의 개인적이며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라는, 허튼 주문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보면 당연한 주장이며 성경의 메시지에 부합하는 내용처럼 보일 수 있다. 주께서도 분명히 “구하라. 그리하며 모든 것을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간절히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은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에게 차라리 기도응답의 인과율처럼 당연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축복의 메시지’로 단정짓는 성서구절을 해석하면서 줄곧 놓치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즉, 세상의 복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먼저’라는 말은 축복(강복)의 전제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의미한다. 요컨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한 다음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바르게 깨달은 사람은 바라는 대상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삶의 가치관과 더불어 신앙의 목적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적인 것을 원하되,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을 원한다” 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다시 주목하라.

‘바라봄의 법칙’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가치인 ‘거룩한 영성’에서 벗어나서 소위 ‘고지론’, ‘청부론’과 함께 인간의 세속적인 탐욕을 부추키는 ‘번영신학’으로 우리의 신앙을 하릴없이 세속의 욕망으로 이끈다.

만약에 성경이 실제로 '바라봄의 법칙'을 지지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이성의 거센 반론을 뒤로 한 채 ‘바라봄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순종일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은 이성의 신념 이전에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러나 처음에 제시한 텍스트와 더불어 바라봄의 법칙을 지지하는 본문의 배경과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가 인간의 육적인 욕망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 말씀하신 ‘본래의 의도’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그의 사사로운 욕망을 들어주시기 위한 ‘특별한 은혜’가 아니며,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고있던 하란 땅에 비해서 더 넓고 더 기름진 땅을 ‘바라보면서’ 기나긴 욕망의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유프라테스 강 북쪽 지류에 위치한 하란은 땅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들과 소아시아를 잇는 당대 교통의 요지로서 무역이 성행했던 풍요로운 땅이다. 사실상, 세상의 재물과 사회적 자산을 넉넉히 소유한 아브라함이 가족과 더불어 부자로 살 수 있음에도 그는 모든 기득권과 개인적인 욕망을 버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믿음의 선구자로서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본문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동사의 시제에 주목해야 한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금’ 보여주신 땅을 바라보며 욕망을 좇아 먼 길을 떠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보여 줄’ 땅을 향해서 그는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떠났을 뿐이며, 다만 말씀에 의지해서 미지의 길을 떠났을 뿐이다. 다시말해, 아브라함이 떠난 시점은 아브라함에게 아무 것도 제시되지 않은 때다. 다시 처음의 본문으로 돌아간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전후 문맥, 다시말해 성경해석을 위한 상황적인 배경(situational context)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산에 올라가서 두 눈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라고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시점은 아브라함이 마음속에 넓고 기름진 토지를 열망했던 때가 아니라, 조카 롯에게 비옥한 땅의 선택권을 모두 넘겨주고 자신은 척박한 땅에 홀로 남아있던 때로서, 오히려 재물에 대한 욕심을 주저없이 버린 시점이었다.

아브람이 기름진 땅에 욕망이 있었다면 조카 롯에게 땅의 선택권을 넘기지 않았다! 바라봄의 법칙에서 허투루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불같은 ‘욕망’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재물의 욕망을 버린 아브라함의 순전한 희생과 재물관을 보시고나서 그를 부르셨고.., 그에게 다른 곳에 가서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라고 넓고 기름진 ‘새로운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을 위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요컨대, 성경의 본래 메시지는 바라봄의 법칙에서 주장하는 축복과는 전후관계가 엄연히 다르다. 아브라함(아브람)이 넓은 땅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품고 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둘러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뜨거운 기도를 들으시고 축복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욕망이나 ‘축복기도’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명령하시자 아브라함은 영문을 모른 채 ‘말씀’에 순종했던 것이며, 온전히 순종했던 그에게 하나님은 기름진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을 주신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땅을 소유하라시며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신 것이 아니라 ‘천하만민’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서 소중한 사역을 맡기신 것이며, 심층적인 의미에서 땅은 상징일 뿐 그 자체가 축복의 실체가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정작 그를 기다리고 있는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 아니라, 수년째 지독한 가뭄으로 땅이 메말라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그는 가나안에서 비옥한 땅을 소유한 주인으로서 호사스럽게 살았던 것이 이 아니라 잠시 이방의 땅에 머무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신이 소유한 것이라고는 훗날 가족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 ‘막벨라 굴’을 가까스로 얻었을 뿐이다. 그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세상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며, ‘바라봄의 법칙’을 통한 물질의 축복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조용기 목사가 저술한 ‘4차원의 영성’을 보면, 한 장(chapter) 전체에 걸쳐서 ‘인간적인 욕심과 꿈에서 하나님의 꿈으로 바꿔라’라는 제목으로 ‘바라봄의 법칙’이 지향하는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바라봄의 법칙은 인간의 단순한 육적 욕심이 아니라 성경의 검증을 거쳐서 하나님 뜻에 합당하도록 영적으로 조정되고, 일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문제의 핵심은 바라봄의 법칙이 실제로 추구하는 대상과 적용이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시는 진정한 축복으로서 영적인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기복주의와 성공주의에 천착한다는 것이다. ‘바라봄의 법칙’, 또는 유사한 제목의 간증서들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가치관은 ‘긍정의 힘’과 마찬가지로 출세를 위한 심리적인 자극과 동기부여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속에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바라봄의 법칙’의 저자가 쓴 글이다. “오직 주의 은혜를 바라봄으로 나는 마침내 청와대 경호실 차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라는 자랑스런(?) 간증에서 과연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사명감과 거룩한 가치관을 읽을 수 있는가? ‘공학박사로서 사상 최초로 청와대에서 경호실 차장까지 올라간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서 바라봄의 법칙이 지니는 효용성을 증거한다는 말인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보다 출세할 수도 있고, 보란 듯이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라봄의 법칙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공의 욕망을 품었던 자에게 주시는 물질적 보상이 성경적 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은혜’의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는 세상의 일시적인 출세가 아니라, 천국시민으로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영원한 영적 승리가 아니던가?

만약에 세속적인 성공이 ‘은혜’의 명백한 증거라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라시는 주의 말씀과,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으며, 종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는 주의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는 많은 재물을 주시기도 있지만, 어떤 자에게는 ‘의도적으로’ 힘든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이유인즉, ‘때로는 고난이 유익’이기 때문이며,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믿음을 도구 삼아 출세를 꿈꾸는 자는 결국 세상의 성공이 신앙의 가려진 목적이며, 하나님의 은혜마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축재의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성공이 삶의 목적이며 자신이 축복의 중심에 있는 ‘바라봄의 법칙’은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온전한 그리스도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복을 구하는 교인들에게 헛되이 성공주의를 부추키며 끝내 타락과 멸망의 길로 이끄는 ‘탐욕의 복음’에 지나지 않는다.

‘바라봄의 법칙’의 주창자인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서 보듯이,

“세상의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라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큰 뜻을 이룰 수 있다. 부자를 꿈꾸는 자라야 부자가 될 수 있고, 대형 목회를 꿈꾸는 목사라야 목회가 크게 성공할 수 있다.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사실상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실패한 목사들로서, 그들은 열등감 때문에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바라봄의 법칙에 따라서.., 부자를 꿈꾸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거지 밥통이나 바라보며 늘상 초라하게 사는 자는 끝내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건 차라리 저주다! 이런 주장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주의 거룩한 뜻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단의 타락한 사설邪說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축복하신다.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손수 지으신 자녀들이 세상에서 복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세상의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수많은 은혜의 일부일 수는 있어도 결코 전체가 될 수 없으며, 세상에서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는 자가 사실은 진정한 은혜를 받은 자일 수 있다. 하나님의 큰 종들 가운데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세상의 축복을 무턱대고 부정할 이유도 없지만, 탐닉할 필요도 없다. ‘믿는 자는 세상이 보기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바울의 선언에 주목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을 품은 자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단언컨대, 탐욕의 주술에 지나지 않는 ‘바라봄의 법칙’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 오직 ‘순종의 법칙’이 존재할 뿐이며, 성경에 존재하는 유일한 바라봄의 법칙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는.., ‘예수 바라봄의 법칙’으로서 이른바 구원의 소망이 있을 뿐이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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