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의 산에 올라 통곡하라
레바논의 산에 올라 통곡하라
  • 김영봉
  • 승인 2007.04.25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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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버지니아 참사, 우리가 쌓은 죄악 한꺼번에 쏟아진 것

버지니아 공대 참사 소식을 접한 후 새벽에 기도하며 묵상하던 중에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우라"는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수 세대를 거치면서 쌓아 올린 죄악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악을 담는 항아리가 있는데, 죄악이 쌓이고 쌓여 넘칠 지경이 되면, 마침내 그 항아리가 뒤집어져 한꺼번에 그 죄악이 쏟아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아리가 비워지면 다시금 죄악이 그 항아리 안에 모이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모두 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항아리가 가득 차서 다시 넘어지면, 한꺼번에 드러난 죄악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생기고,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축적된 죄악이 한꺼번에 쏟아질 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쌓은 죄악입니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은 지난 몇 세대 동안 우리가 쌓아 올린 죄악의 항아리가 넘쳐 쏟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어느 학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인 이민자들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미국이나 한국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인류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행하여진 죄악이 쌓이고 쌓여서, 어릴 때부터 상처받고 짓눌리고 질식되어 외롭고 소심하게 자란 조승희라는 한 청년을 통해 쏟아져 버린 것입니다.

굳이 조승희 군이 아니었어도, 버지니아 공대가 아니었어도, 우리 인류가 그 동안 쌓아 온 죄악의 항아리는 어디에서든 누구를 통해서든 쏟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발생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죄악의 항아리가 넘쳐 쏟아져버리면, 너무나도 아름답고 맑고 거룩한 영혼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 앞에서 우리는 ‘왜, 우리입니까’ ‘왜, 우리나라입니까’라고 절규하지만 대답은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거룩한 희생을 통해 인류의 정신과 영혼이 정화되고, 한 동안 인간의 죄악은 항아리 안에 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화된 인류의 정신과 영혼이 다시 타락하여 죄악의 분량을 채울 때까지 말입니다.

인류가 쌓은 죄악으로 언제,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우리가 사는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것을 두고 한탄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민 교회를 섬기고 있는 한인 목회자 중 누군가 이런 비극과 위기 앞에 마주해야 했다면, 그 책임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도 불평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민족에게든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면, 그 일이 우리 한국 민족에게 ‘떠맡겨졌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기도하다 보니, "주님, 이 일이 저에게 맡겨진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겸손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이 문제를 마주하겠으니, 용기와 지혜를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주어로 놓지 마십시오
 
이 질문을 던지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발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왜 이런 비극을 주셨냐’고도 묻지 맙시다. 우리는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그렇게 묻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습관을 고치십시오. 그것이 유대인들이 지켰던 원칙입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출 20:7)는 십계명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은 대화 중에 ‘하나님’이라는 말을 최대한 피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지도 않은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게 될까봐 조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말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사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인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많이 해야 믿음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어떤 목회자는 거의 모든 문장에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그 자신도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다른 사람도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겼는데, 왜 ‘하나님이 병을 주셨다’고 합니까? 자기 욕심껏 사업을 확장하다가 파산했는데, 왜 ‘하나님이 내게 시험을 주셨다’고 말합니까? 자기 욕심대로 아이를 닥달하다가 아이가 비뚤어졌는데 왜 ‘하나님이 시련을 주신다’고 말합니까?

이번 일도 그렇습니다. 제발 하나님이 이런 비극을 주셨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어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지금 이 일로 가장 가슴 아파하는 분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정도로 죄악의 분량을 가득 채운 우리를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은 수많은 부모들과 함께, 하나님은 아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과 근심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모두가 제 정신을 차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실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쌓은 죄악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조승희 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행한 잘못을 말하는 겁니다. 조승희 군에 대한 진단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그들이 모두 동의하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조승희 군이 이런 극악한 행동을 한 것은 오랫동안 그의 내면에 축적된 상처와 원한과 분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조승희 군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조승희 군의 경우는 특히 악화되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렵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조승희 군과 마찬가지로 내면에 악마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으로 자녀의 버팀목이 되십시오

우선 이 사건은 우리의 자녀 교육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요청합니다. 아마도 생각 있는 부모라면, 지난 한 주일 동안 자신의 자녀에 대해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내 아이는 상관없어"라고 생각한 분이 있다면, 당신과 당신의 자녀가 가장 위험할 수 있습니다.  “상처 없는 아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청소년 사역자가 하는 말입니다. 

"상처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상처를 얼마나 줄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또한 그 상처가 그 아이를 더 성숙시키고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돌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민자들마다 "왜 이민 오셨습니까"하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자녀 교육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한번 진지하게 자문합시다. 정말 우리의 삶의 목적이 자녀 교육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십니까. 우리가 바라고 찾는 교육이 정말 ‘좋은’ 교육입니까. 혹시나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교육은 ‘좋은 대학에 보내는 교육’을 뜻하는 것 아닌가요. 혹시나 우리가 생각하는 희생은 ‘돈 대주는 희생’이 아닌가요.

우리 부모들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마치 한국의 강남을 옮겨다 놓은 듯한 치열한 경쟁 환경 안에서 자녀들이 병들지 않는지 잘 지켜보아야 합니다. ‘좋은 교육’이 무엇인지, 분명한 가치관을 세우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아이를 몰아세우는 환경으로부터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학교와 사회에서 받는 상처와 부담과 아픔을 가정에서 치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아이 속에 천사를 키우고 있는지 악마를 키우고 있는지 늘 살피면서 사랑과 관심으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은 실로 얼마나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까. 그 그릇이 깨졌을 때 그 파편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는지요. 이번 기회에 아이들의 성적에 대한 기대감을 한참 낮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가정에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생활을 정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좋은 물건을 사 바치는 것으로 아이들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을 최고의 선물로 여기도록 생각을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숨 막히도록 닥달하고 몰아세우는 부모가 아니라, 더 편하게 숨 쉴 수 있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누가 500불에 총을 손에 쥐도록 만들었습니까?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구조에 대해, 그 심각성에 대해 우리의 정신을 깨우쳐 줍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고소당할 것을 가장 먼저 걱정해야 하는 우리 사회 구조가 문제입니다.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판단하는 기준이 언제나 ‘고소당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 이 사회는 정말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누구든지 신분증만 보여 주면 총기를 살 수 있다는 사회 구조도 문제입니다. 모두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이익 때문에 궤변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며 악한 제도를 그냥 두고 있는 우리 사회가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어릴 때부터 심리적인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자란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버렸습니다. 그 세계 안에서 혼자 즐기기 위한 도구를 찾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그 목적을 위해 아주 유익한 컴퓨터 게임을 개발합니다. 그 청년은 그 게임에 몰두합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와 만나 참된 인간 관계를 가지기를 갈망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따돌림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해석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에 침 뱉으며 모욕하는 것처럼 느끼고, 목구멍에 쓰레기를 밀어넣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는 게임을 즐기면서 혹은 폭력 영상물을 보면서, 언젠가 자신도 강자가 되어 자신을 모욕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꿈을 꿉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어디서든 총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법안을 마련해 주었고, 어디서든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습니다.

이런데도 혹시 아직도,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라고 질문하겠습니까. 그 청년을 자신의 세계 안에 가두어 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청년이 결국 바깥 세계와 연결되지 못하고, 홀로의 세계 안에 살아가도록 편의를 제공한 것은 누구입니까. 그가 다른 사람들의 무심한 행동을 모두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하도록 그의 마음을 병들게 한 것은 누구입니까. 그가 이상 증세를 보일 때, 고소되는 것을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진 제도를 따라 모두가 적당한 선에서 손을 떼게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 그가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증을 제시하고 500불에 총을 손에 쥘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조승희 군에게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조승희라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를 악의 화신(personification of evil)으로 만든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학교·교회·사회·국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조승희 군이 어쩌다 생긴 정신병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병적 문제로 인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제2, 제3의 조승희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자녀일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문제가, 창피해 하면서 ‘나는 아니다’라고 발뺌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레바논의 산에 올라 통곡합시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이처럼 지독한 악의 화신을 만들어낼 정도록 사회를 타락시킨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합니다. 나부터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은 바로 이런 때에 우리가 할 일은 회개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왕국이 망해 가는 것을 보면서, "예루살렘아, 너는 레바논의 산에 올라가서 통곡하여라"(20절)고 외칩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과 귀족들은 나라가 썩어가는 것을 나 몰라라 하고, 값비싼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하여 궁궐을 만들고, 집과 침상을 만들었습니다. 땅은 예루살렘이었으나 사람들이 사는 것은 이방 레바논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레바논의 산에 올라가서 통곡하라"고 외치십니다. 그들의 잘못된 삶에 대해 회개하고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 같은 아픔"(23절)이 덮쳐 올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이 경고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회개해야겠습니다. 속으로 병들어 가는 이웃을 나 몰라라 한 것에 대해,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 준 것에 대해, 사회적인 죄악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잘못된 제도를 고치는 일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타락한 문화를 정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했던 것에 대해 깊이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수입해 들인 레바논의 백향목을 두고 통곡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처럼, 우리가 잘 한다고 생각하며 행동해 왔던 것을 두고 통곡해야 하겠습니다. 통곡하며 깨어질 때 다시 지어졌던 베드로를 생각하며, 우리도 우리의 레바논의 산 위에 올라 통곡해야 하겠습니다.

* 이 글은 4월 22일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설교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보기 원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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