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나
북한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나
  • 양재영
  • 승인 2014.10.01 11: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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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엽 교수, 용서와 화해로 본 한국 역사
지난 27일(토) 정의 평화 제자학교의 첫 번째 강연으로 스프링 아버 대학(Spring Arbor University)의 이인엽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본지는 국제정치학 박사인 이인엽 교수의 강의를 통해 평화의 관점으로 한반도의 갈등을 해석하고 실천의 방향성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이번 강의를 정리해보았다. <편집자 주>

우리는 선과 악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종북, 친북, 반공, 친자본주의, 공산주의, 친미, 반미 등으로 단순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폭력적인 논리입니다.

교회에선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많으면 믿음이 없다는 식의 단순화를 추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너무 과감하게 단순화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며 폭력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단순화를 넘어보자는 것이 오늘 강의의 주제입니다.

먼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한국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 이인엽 교수 © 뉴스 M

우리는 보통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로 돌리기도 합니다. 또한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들의 책임을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외교 문서를 통해 보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주도적 역할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모택동, 스탈린을 직접 찾아가는 주도면밀함을 보였습니다. 사실 스탈린은 전쟁을 통해 균형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해 주저했다고 합니다.

또한 김일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박헌영입니다. 월북한 박헌영은 김일성을 설득해 ‘남한으로 침략하면 억압받고 있는 남한 민중들이 북한군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 남한을 빨리 정복하면, 미군은 주저할 것이고, 그들이 개입하기 전에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두 가지 다 오판이었습니다. 남한엔 보수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보수 세력이 많았으며, 북한이 침략하기 전에 미군은 유엔결의를 통해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둘째로, ‘남한과 북한 중 어느 쪽이 더 피해를 많이 봤을까요?’

피해라는 것은 쉽게 정리할 수 없습니다. 정신적 피해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질적 피해만을 놓고 봤을 때 북한이 남한의 두 배 이상이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남한의 사망자가 5십만이면, 북한은 130만 정도입니다.

북한의 피해가 큰 이유는 미군과 유엔의 공군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의 폭격이 북한의 두 배 이상의 피해를 일으켰습니다. 태평양 전쟁 전체보다 많은 양의 폭탄을 북한에 쏟아 부었습니다. 평양에 폭탄이 42만 8천개가 떨어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지도에서 도시가 지워졌습니다. 폭격을 하러 간 파일럿이 더 이상 남은 게 없다고 보고할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한 미군 관계자는 ‘북한은 백년이 지나도 다시 나라로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은 당해도 싸기에 우리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건 미국과 남한의 관점인데, 크리스천으로서의 관점으로 봤을 때 물론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지만, ‘북한의 모든 사람이 죽어도 싼가?’라고 물어봐야 합니다.

‘북한 사람은 모두 죽어도 싼가?’

크리스천은 ‘당해도 싸다, 전쟁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선과 악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평양은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크리스천도 많이 죽었습니다.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2001년에 9.11 테러를 통해 3천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었습니다. 그 사건이 미국 사람들에게 가져온 심리적 충격파는 엄청났습니다. 공포와 분노, 테러의 위협으로 미국의 외교 정책의 변화를 가져왔고, 부시 독트린, 네오콘 등이 정착되었습니다.

분명 슬픈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북한과 한국전쟁의 경우와 비교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그라운드 제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북한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예전에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은 이미 불바다를 겪은 나라입니다. 북한이라는 나라는 ‘전쟁의 불바다에서 태어난 괴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김일성은 모든 것을 미국의 탓으로 돌리면 되는 아주 쉬운 정치체제 속에 있었습니다. 박헌영도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사형되었고, 김일성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지 않는 세력은 북한 건국 초기에 거의 모두 숙청되었습니다.

북한의 3대 독재는 마치 사교 집단에서나 있을 법한 말도 안되는 일이며, 지지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동시에 왜 그런 악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 악과 싸우기 위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전쟁은 그 자체가 악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과 고통이라는 기억에서 태어난 국가가 북한입니다.

평양에 지하철을 타면 깊이가 1백 미터이며, 유사시 2백만 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방공 시설입니다. 북한엔 그런 시설이 많고, 3년 정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전쟁물자와 시설이 지하에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북한 군인의 80퍼센트 정도가 휴전선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은 바로 남한으로 들어와 북한에 가해지는 폭격을 피하려는 작전입니다. 이유는 한국전쟁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한국 전쟁 당시의 서울 © 뉴스 M

“악의 등장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받은 고통은 얼마나 큽니까? 한국전쟁 때 전 인구의 10퍼센트가 죽었습니다. 분노를 북한 정권에 대한 미움으로 돌립니다. ‘불공대천지원수’(不共戴天之怨讐), 즉 한 하늘 아래 함께 할 수 없는 원수라는 뜻으로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원수입니다다. 북한에 대한 미움, 원한, 반공 등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북한의 기독인들이 핍박 받고 남한으로 옮겨온 이들이 많기에 반공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의 고통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제니친의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 선(Line)이 있다면 그 선은 모든 사람의 심장을 뚫고 지나간다.”

선악을 나누는 것이 쉽기만 하다면 세상이 얼마나 쉽겠습니까? 우리는 악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악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히틀러의 등장은 독일 사람들이 지지한 이유는 1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 전쟁에 패배한 독일이 전쟁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엄청난 배상금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으로 고통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악이라는 것의 등장의 배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러시아 사람들은 푸틴을 지지할까요? 개혁 이후 고르바초프가 서구식 경제로 바꿨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외면당했고, 소련은 붕괴되고 이후 러시아는 엄청난 경제적 혼란과 마피아의 창궐을 경험했습니다. 그 기억이 독재자 푸틴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아편전쟁으로부터 중화민국 수립까지 백 년 동안 열방으로부터 착취와 공격을 받은 중국은 난징대학살, 국공내전 같은 대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가 일어났으며, 그들에 의해 독재가 자행되어도 국민들은 지지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원칙이 북한에도 적용됩니다. 일제경험, 한국전쟁 경험이 현 북한 체제를 인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보도연맹 사건을 아실 겁니다. 해방 후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좌익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들 중 과거 공산주의와 관련된 사람들이 정부에 보고하고 전향하게 했습니다. 그게 보도연맹이었습니다. 이후 전쟁이 일어났고, 그 명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려 20십 만 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빨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빨갱이는 그렇게 죽어도 되는 겁니까? 우리가 선악의 입장에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 반란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경찰과 서북청년단이라는 준 군사 조직이 양민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공산당에 당한 게 있기에 남한에서 복수를 저질렀습니다.

사람이 가장 잔인해질 수 있는 경우는 주변의 다른 사람이 ‘그들은 당해도 싸다’는 반응을 보일 때입니다. 한국 전쟁 중 서울의 주인이 네 번 바뀌었습니다. 바뀔 때마다 협조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고통의 순간이었습니다.

남한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복합적 감정이 있습니다. ‘종북 좌파’라면 치를 떠는 가스통 할배들의 미움의 근저에는 분노와 죄책감이 공존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한 방에 해결해주는 방법이 있는데 ‘빨갱이들은 죽어도 싸다’ 이 한마디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선과 악을 그어놓으면 매우 심플해집니다.

   
▲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와 부인 한네로레 콜 © 뉴스 M

독일과 러시아 전쟁 이후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연합군과 소련이 점령했습니다. 이때 동베를린 여성 중 9십 퍼센트, 2백만 명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과거 나치가 소련을 공격했을때 엄청난 사람들을 학살하고 굶어죽게 만든 과거가 있는데, 소련 병사들은 그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생각으로 독일 여성들에게 이런 잔인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동독이 공산국가가 된 후 소련의 만행을 일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복수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얼마나잔인해 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심지어는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헬무트 콜 독일 수상의 부인도 노년에 자살을 했는데, 과거 소련군 강간의 트라우마에 의한 우울증이원인이었습니다.

연합군에 의한 동경대공습으로 동경 자체가 거의 불탔고, 백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비행중인 미군 조종사가 사람의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계 역사 중 원자폭탄 사용한 나라가 미국이 유일합니다. 미국은 본토를 점령하기 위해, 미군의 인명손실을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합니다. 반면 일본은 이미 기울어 있던 상황에서, ‘두 가지 종류의 핵실험을 한 것은 아닌가?’, 또는 ‘소련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분명히 물어봐야 합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일본 사람들 모두가 죽어 마땅했고, 핵무기를 맞아도 싸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가?

“복수와 분노의 감정을 용서의 에너지로” 

복수란 폭력적인 방법의 소통입니다. 원수에게 당한 만큼 갚아주면서, 너도 내가 당한 고통을 한번 느껴보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런 잔인한 복수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내 고통에 공감하고, 사죄했을 때 그 고통이 풀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선 그러한 고통을 풀 기회가 없습니다. 그 원한을 풀 수 없습니다.

얽히고설킨 분노와 원한의 관계는 예수님의 복음과 용서를 통해 풀어질 수 있습니다. 북한이라는 원수를 봤을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우리가 한 단계 넘어서 우리가 받은 원한과 고통을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입니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의 죄와 고통이 마음속에 계속 흐르고 있는데, 그 분노와 원한이 용서의 에너지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북한과 남한을 비교해 봤을 때 ‘하나님은 누가 먼저 용서할 것을 기대하실까요?’ 저는 하나님이 남한에게 기대하실 것 같습니다. 남한의 교회는 영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부흥하고 경제적, 민주화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북한은 잘못된 선택에 의해 3대 세습, 교회 멸망, 인권탄압, 경제 붕괴 등의 어려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과 교인들이 탈북자들에게 돈 주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옥을 탈출해 원하는 남한에 왔으니까 된 것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현재 역으로 탈남하여 입북하는 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살려고 온 사람이 남한에 와서 자살시도를 한 경우도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만,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왕따 당하고, 사기 당하면서 사는 경우가 많은 데, 이미 북한 사람들도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탈북자를 돌 볼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북한과의 통일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을 주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북한. 억압적 독재가 자행되는 북한. 자식 삶아 먹고, 탈북자가 넘치는 북한. 이제는 북한을 신앙의 이름으로 품어야 되지 않을까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고통을 넘어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고, 화해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강의: 이인엽 교수, 정리: 양재영 기자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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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15-12-18 12:53:59
맞습니다~!!!! 탈북자들의 고통을 보듬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성공주의신앙내지 반공주의 악세사리로 내모는 극우보수성향의 목회자들 행위 이제는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