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는 삶으로 보여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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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영
  • 승인 2014.10.19 03:5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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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후 목사의 필라델피아 빈민 선교 이야기
   
▲ 이태후 목사 © <뉴스 M>

필라델피아 북쪽에 위치한 노스 센트럴(North Central)은 흑인 빈민가이다. 필라델피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동네이다. 90% 이상이 흑인이며, 그들 중 절반 정도가 절대빈곤층이다. 마약상들이 우글거리고 미국 내 가장 높은 살인율을 자랑(?)하는 동네이다. 하루에 몇 건의 살인 사건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몇 개의 교회가 있지만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목사는 없다.

지난 2003년부터 이러한 거리를 비를 들고 청소하는 한국 목사가 있다. 그는 서울대 미학과 출신의 소위 엘리트이며,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출세 가능성이 아주 높은 목사 중 한명이었다. 그런 그가 흑인 할렘가의 거리 사역을 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들어 왔을 때 저를 아는 분들은 하루 빨리 나오라고 적극 권면했습니다. 대낮에도 총소리가 들리고, 하루에도 몇 차례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는 지역이었죠. 이곳은 저희가 알고 있는 미국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인근 대학 오리엔테이션 때 ‘이곳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교육을 시킬 정도였으니까요.”

“거리에서 관용을 가르치다”

이 목사를 이곳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뉴욕 한인교회에서 사역하며 누릴 수 있었던 안락한 삶을 버린 동기가 궁금했다. 독신으로 흑인 할렘가의 단칸방에서 살며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사역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주소지가 곧 우리의 신앙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미국에 오신다면 어디를 방문하셨을까요? 아마도 거대한 빌딩 숲 뒤에 묻혀 있는 어두운 할렘으로 걸어 들어가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교수이며 빈민사역의 권위자인 매누엘 오르티즈 목사님은 필라델피아 동북부에 위치한 남미 이민자들의 동네인 Hunting Park에서 이미 십 수 년간 훌륭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전 그 교회에 출석하며 그 분으로부터 제가 하고 싶은 사역을 꿈꾸게 되었죠. 그리곤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사역이 아닌 단지 그들과 좋은 이웃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 목사의 노스 센트럴에서의 사역은 아주 단순했다. 그는 길거리를 청소했고, 동네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었으며, 여름마다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길거리에서 ‘섬머캠프’를 열어줬을 뿐이다. 이러한 단순한 사역 아닌 사역은 동네 주민들의 마음을 열었고, 2007년엔 그의 이야기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기사의 제목은 ‘거리에서 관용을 가르치다(Teaching tolerance in the Street)’ 였고, 부제는 ‘데이캠프가 북 필라델피아 아이들에게 안식처를 만들었다(Day camp creates safe haven for North Phila. Children)’ 였다.

“제가 이 지역 유일한 동양인 이었습니다. 처음 주민들은 길거리를 청소하는 저에게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문틈으로, 창문 뒤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죠. 아침저녁으로 골목을 청소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인사만 하기도 했죠. 찢어진 청바지에 티셔츠, 아니면 반바지에 슬리퍼 입고서 그들과 같이 밥도 먹었죠. 그들의 고민도 들어줬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니 주민들은 조금씩 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가 길거리를 지나면 마을의 갱이나 마약 판매상과 인사를 나눈다. 며칠 씩 집을 비우기라도 하면 그들은 ‘언제 오느냐?’,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이 목사를 ‘우리’(We)라는 울타리 안에 넣었다고 한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목사는 그 높은 장벽을 뛰어 넘어 빈민가의 한 일원이 되었다.

   
▲ 2004년 어느 봄날, 필라델피아 시경에서 마약 사범 급습을 했는데, 137건 중에 하나가 내가 사는 집 앞에서 발생했다. 이 사진을 찍은 지 5분 후에 집에 왔더니, 옆집 이웃들은 사진에 나온 그대로 있었고, 마약 거래자와 형사들은 이미 차에 타고 있었다. (사진 제공 이태후)

“암흑의 세계에 비췬 희망”

마을 주민과 긴밀한 사이가 된 계기는 역시 여름방학 때 아이들을 돌봐주는 ‘섬머캠프’를 통해서였다. 노스 센트럴의 아이들은 대부분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가있고, 어머니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 방치된 아이들이 많았다. 방학을 하면 딱히 갈 데가 없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곳 주민들은 대부분 아픈 과거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거리에 버려져 있었죠. 가족도 미래도 없는 암흑의 세계였습니다. 10대 초반에 아이를 낳고, 30대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저의 친구 마이클이 당시 ‘플레이 스트리트(Play Street)'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줬습니다. 돈이 없으니 길 양쪽을 막아 차량 통행을 막고 아이들이 뛰어놀게 하는 것이었죠. 시로부터 공짜 점심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한인교회를 돌며 모금과 자원봉사자를 모았습니다.”

처음엔 주민들의 반감도 많았다. 자원봉사로 온 한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이 목사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섬머캠프’는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목사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은 주민들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같이 뛰어 놀고, 성경을 통해 공부하고,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들은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동양인들이 여름마다 찾아와 함께 뒹굴며 놀아주니까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동네 흑인들이 한인들에게 가진 인식은 ‘자기 지역에서 돈을 벌어들여 좋은 동네로 이사 가는 흑인 착취자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접촉하면서 백인교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조금씩 이루어 나갔습니다.”

알콜 중독자 엄마가 아이들 음식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약 두목이 더운 날씨에 수고한다며 빙수를 가져왔으며, 동네 갱들이 캠프 안전 요원을 자청하기도 했다. 처음 20명으로 시작한 캠프는 200명까지 늘었고, 자원봉사자들도 백인, 흑인 등이 참가하며 다양해졌다.

“3년 만에 돌아온 고향”

“2006년부터 시작한 캠프가 2010년까지 잘 진행되었습니다. 2011년 7월 6일, 저는 캠프 준비를 다해 놓은 상태에서 급박하게 한국으로 출국했습니다. 제 비자가 말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몇 달 생각하고 한국에 갔는데, 영주권 문제가 꼬여서 거의 삼 년 만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3월 22일 뉴욕 JFK 공항에서 세시간을 달려 제가 살던 골목에 오자 멀리서 제 모습을 확인한 주민이 ‘이 목사님!’하고 달려왔고, 길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별로 바뀌지 않은 동네를 지키고 있는 이웃들을 보며 여기가 내 고향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목사를 본 아이들이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올해는 여름캠프 하나요?’ 였다. 캠프를 쉬는 동안 동네 아이들과 이웃들은 캠프가 얼마나 중요한 행사였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보통 다섯 주를 진행했던 캠프를 금년에는 준비가 부족해 2주만 진행했다. 130명의 아이들이 등록했고, 많은 이들이 봉사로 수고했다.

“캠프는 이제 온 동네 잔치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수영장을 가거나 소풍을 가려고 스쿨버스를 대절한 날은 동네 아저씨들이 나서서 버스 주차할 자리를 맡아놓고 교통정리를 해줍니다. 캠프가 진행되는 시간 동안 여러 명의 이웃들이 아이들을 지켜보며 때로는 인형극을 관람하며 함께 웃습니다. 뉴저지, 보스턴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캠프 티셔츠를 입고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Camp People' 이라며 덕담을 해줍니다.”

이 목사가 한국에 머물던 삼 년 동안 동네는 많이 변했다. 전에 흑인 빈민가였던 곳이 이젠 조금씩 대학촌으로 변하고 있다. 주말이면 늦은 시간에도 파티를 찾아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개발 때문에 주민들이 쫓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개발의 이익은 모두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차지일 뿐, 개발에 따른 피해는 주민들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 지난 7월에 구입한 건물 © <뉴스 M>

“제가 오년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건물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골목 바로 건너편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건물인데, 제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 9만불을 부르던 주인이 제가 돌아오니 3만 5천불로 가격을 낮췄습니다. 7월 31일 잔금을 치루고 건물을 구입했습니다. 수리비가 구입가격보다 더 들겠지만, 이 건물을 통해 새로운 많은 일들이 시작될 걸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레입니다.”

이 목사는 마을의 변화에 맞추어 조금씩 새로운 사역을 꿈꾸고 있다. 그는 새로운 건물 수리가 끝난 후 방과 후 학교 등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있다.

“30년 이상 버려진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 마을의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꿈을 줄 수 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살인 사건도 일어난 적이 있는 땅이지만 이곳을 수리해 아이들과 이웃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저희 동네가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양재영 기자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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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2014-10-28 09:55:08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건강하세요 목사님...

웨스트민스터 2014-10-24 10:17:01
목사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

소금면장 2014-10-22 19:27:25
진정한 이웃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고마운 기사이군요. 이태후목사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부끄럽습니다.

banabas 2014-10-20 15:58:26
정말 정말 대단하십니다^^하나님의 주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