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얀시님, 잘못 짚으셨습니다
필립 얀시님, 잘못 짚으셨습니다
  • 김기대
  • 승인 2014.10.22 03:56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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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은 커녕 팔려간 신부는 아니었는지

필립 얀시님, 국민일보 창간 26주년 기념 강사로 초청되어 한국에서 강연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교계 언론에서는 당신이 기독교 저술가, 영성의 대가로 비중있게 다뤄지는 데 비해 일반 언론에서의 노출 빈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신의 명성을 생각하면 다소 의외이긴 하지만 경쟁관계에 있는 타언론사의 행사 보도에 인색한 한국 언론의 풍토라고 생각하고 마음 푸십시오.

나 역시 당신의 책을 여러 권 읽은 사람으로 처음 읽었을 때의 상큼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수려한 문체와 풍성한 사례들, 경직화되기 쉬운 신학적 개념들을 삶 속에서 풀어내는 당신의 역량은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의 갖고 싶은 항목(Wish List)에 당신의 책을 올려 놓지 않은 게 벌써 7~8년은 족히 된 것 같습니다. 그게 그 이야기란 뜻이겠지요. 죄송합니다.

한국에서 강연하면서 한국교회는 신혼기를 벗어났다고 말씀하셨다지요? 비유는 여전히 탁월하군요. 한국은 신혼기를 벗어나고 있고, 미국 교회는 은혼기에 접어 들어 열정이 식은 부부같고, 유럽 교회는 이혼기에 접어들었다구요.

한국 교회의 전환기를 신혼 부부에 비유하신 부분은 신선했는데요. 문제는 한국 교회는 아직 신혼기에 접어들지 조차 못한 시기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신 듯 합니다. 어쩌면 신혼의 꿈같은 것은 본래 없었던 팔려간 신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암흑기에 있던 우리 선조들에게 빛이 되었었습니다. 현대 의료와 현대식 교육에 기여한 기독교의 공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이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시켜 버렸습니다. 신부를 가난하다고, 무식하다고 무시했던 거지요. 그래서 다른 신랑(일본)에게 팔아넘기고 대부분 조선 땅을 떠났는데 신혼이라니요?   홀로 남겨진 우리는 첫 신랑이 남기고 간 근본주의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서구에서는 칼 바르트, 라인홀트니버 등 근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조류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남겨진 우리는 뛰어난 신학자가 없었던 19세기 미국 기독교의 찌꺼기인 근본주의만 갖고 씨름하고 있었던 거지요.

해방 이후 새 남편에게 너무 두들겨 맞아 왔던 우리는 도망갔던 남편이 돌아 오자 냉큼 받아 들였지요. 그런데 돌아온 남편의 힘은 예전보다 강해졌지만 내용은 별반 다른게 없었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더불어 근본주의가 조금씩 힘을 잃어갈 때 복음주의니 뭐니 하는 새 선물을 한아름 안겨다 주었지만 그 보따리 안에도 별 신선한 건 없었습니다.

은혼식에 접어든 미국이라, 글쎄요. 미국의 기독교는 워낙 다양한지라 어떤 현상을 두고 하는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인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고 애쓰는 흔적 만은 주류 교단들 안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도 미국에 살고 있지만 당신이 보고 경험한 미국교회 만큼은 모르는지라 더는 언급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혼 단계로 분류한 유럽은 확실히 틀렸습니다. 유럽은 지금 기독교의 르네상스로 불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교회의 르네상스는 아니지만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지안느 바티모, 르네 지라르 등 명망가들이 기독교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은 아니지요. 돌파구를 못 찾아 방황하다가 인형의 집을 뛰쳐 나왔던 노라처럼 동양 철학, 이슬람, 심지어 마오이즘(모택동 주의)까지 기웃거렸던 유럽 사회는 그동안 버려두었던 기독교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혼기에 접어든 것이 아니라 별거까지 갔다가 지금은 재혼기에 접어 들었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상투적 표현들을 즐겨하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낸 유럽 기독교에 대해서는 왜 망조로 표현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건 꼭 당신만을 지칭하는 건 아닙니다. 유럽 여행들 한 번 다녀오면 강단에서 무너진 유럽교회를 한탄하는 한국 목사들이 많거든요. 제 결혼생활 파탄나는지 모르고 회복기에 접어든 남의 부부 관계 걱정하는 꼴이지요.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걱정입니다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데 얀시님께서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밝게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기도의 힘이 원천이라고 분석하셨더군요. 모두들 한국 교회를 암울하게 보는 때에 밝게 보아주어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기도를 너무 해서 문제입니다. 차분히 성경 공부를 하거나 삶속에서 신앙을 구현하는 행위보다는 아침(새벽)  저녁(밤샘)으로 모여 너무 기도해서 문제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냐구요? 제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다 듣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기도일 것이라 짐작됩니다. 거짓 정보에 기초해서 타종교나 북한에 대해 퍼붓는 저주 섞인 기도도 많구요.

원인조차 규명되지 않은 사고로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 직장이 없거나 이유없이 쫓겨난 이들, 산업 재해를 당하고도 치료를 못받는 이들을 위해, 개발논리로 멀쩡한 강을 파헤치고는 개발도 환경도 모두 놓쳐버린 조국의 강토를 위해, 뒷걸음질 치는 민주주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들도 반성합니다. 욕망을 갈구하는 이들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의 열정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기도가 한국 교회의 원동력이라는 당신의 강연은 하나님의 공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내용이군요.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반성하며 새겨 듣겠습니다. 하지만 욕망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의 너무 많은 기도가  한국 교회를 뒷걸음치게 만든다는 사실은 꼭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선진국은 모두 기독교 국가

한국에서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적십자사 총재가 된 사람이 인도는 잡신이 많고 그래서 가난한 나라라는 말을 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적십자사 총재로서 한 말은 아니고 예전에 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런 인식을 가진 분이 어떻게 적십자사를 맡냐고 비판의 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 강연에서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은 나라 상위 20개 국, 경제적 풍요로움이 있는 상위 20개국을 꼽으면 최소 19개 국가가 기독교 국가”라고 말하셨다지요. 그 나라들이 어떤 나라들인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상위국 한 나라는 당연히 일본일 거구요(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에 포함되는지 궁금하군요).

오래 전 막스 베버가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한 내용과 비슷한데요. 개신교의 금욕주의와 소명의식이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가져왔다고 베버는 분석했었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초기의 건전성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지금의 경제 상위국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장점으로 착각한 신자유주의로 성장한 나라들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병폐를 너도 나도 말하고 있는 때에 경제 상위를 기독교와 관계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은 것도 기준이 모호합니다. 소수자에 대한 관심 차원에서 윤리나 도덕을 말하는 것이라면 서구 인권 운동의 현주소를 볼 때 꼭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전을 지을 자격을 박탈당했던 이유처럼 부자 나라들은 힘을 바탕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도덕은 무엇인가요?

이곳에서 언론을 통해 피상적으로 접한 강연 내용만으로 이 글을 썼기에 혹시라도 왜곡된 부분이 있으면 양해 바랍니다. 하지만 미국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솔직히 말해서 미국 내에도) 현상에 대해 조금더 심도 깊은 연구를 하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졸고를 남깁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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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2015-05-12 09:00:52
이렇게 재미있는 글은 참으로 오랜만이군요. 유머게시판의 한 글을 보는줄 알았어요. 편집장하실만한 분이 없으신가봐요...

독자의견 2015-02-21 07:53:35
언론사의 편집장으로서 필립얀시의 강연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 피상적으로 접한 강연 내용만으로" 이렇게 다소 강한 어조의 글을 쓰시는 데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편집장님의 글을 통해 알게 된 얀시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한국교회에 대한 보다 면밀한 성찰을 얀시에게나 독자들에게 요구한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얀시의 주장 만큼이나 이 글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필립 얀시가 한국 교회의 역사를 너무 단편적으로 보듯이 편집장 님 역시 너무 단순화, 일반화 시킨 논거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자체로 지난한 논증이 필요한 주장들을 너무 쉽게 본인의 주장의 근거로 쓰고 계시고 때문에, 비록 전체적으로는 글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이 크게 떨어져 보입니다. 여론을 판단하고 분석하며 따라서 주도할 수 있는 언론인에게는 누구보다 더 글쓰기에 대해 좀 더 신중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독자의견 2015-02-21 07:45:24
언론사의 편집장으로서 필립얀시의 강연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 피상적으로 접한 강연 내용만으로" 이렇게 다소 강한 어조의 글을 쓰시는 데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편집장님의 글을 통해 알게 된 얀시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한국교회에 대한 보다 면밀한 성찰을 얀시에게나 독자들에게 요구한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합니다만, 얀시의 주장에 적용하시는 그 잣대로 편집장님의 글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저 역시 필립 얀시의 강연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편집장님의 평가에는 이의를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제게 다소 설득력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필립 얀시에게 제시하는 사회와 역사를 너무 단순하게 판단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본인은 글을 다시 한번 성찰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얀시가 서구 및 한국 교회의 역사를 너무 단편적으로 보듯이 편집장 님 역시 너무 단순화, 일반화 시킨 논거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자체로 지난한 논증이 필요한 주장들을 너무 쉽게 본인의 주장의 근거로 쓰고 계시고 때문에, 전체적인 부분에서는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편집장님의 글이 너무 교조적으로 다가옵니다.

정은미 2014-12-24 09:34:22
비판만 말고 나와 다른 것을 주장하는 이들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판단이 성경이 기준이 아니라 나 개인의 사상과 지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회구원과 민주주의를 위해 기도하기 보단 영혼 구원과 변화를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의 변화의 출발점이니까 말입니다

편집장의 마인드 2014-11-23 01:10:36
필립 얀시의 지적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미국교회의 전체적인 영적인 흐름은 '디클라인'인 것 같습니다.
유럽 기독교의 전반적인 흐름은 거의 주저앉은 기독교가 다시 꿈틀거릴려고 하는 것 같구요.
한국교회는 기도를 하는 내용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편집자님의 말씀처럼 탐심이 많은 교회와 지도자의 심각성은 이루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