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교회에 책임을 묻다
대형교회에 책임을 묻다
  • 양재영
  • 승인 2014.10.27 10:23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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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후러싱제일교회와 베다니교회 사태

교회관련 취재를 하다보면 느끼게 되는 문제점 중 하나는 어느덧 교회가 ‘거룩한 공회(公會)’로서 존재보단, 건물과 조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왜 존재하며,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어느덧 교회 성장이 우상처럼 존재하고 교인들의 욕구에 맞는 종교서비스를 제공하는 ‘소비자 신앙’이 성장이란 미명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의해 교회가 대형화 되었으며, 대형화 된 교회는 이러한 흐름을 잘 활용해 그들의 외형을 불려왔습니다.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로서 누리는 특권 못지않은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에 형성된 신앙과 사역에 머무르지 말고 새로운 교회와 사회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이끌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대형교회들은 이러한 역할을 외면한 채, 개교회의 부흥과 성장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단편적인 도덕규범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개신교 교회의 성장 둔화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진단되지만,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교회의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성을 듭니다. 가톨릭 교회의 성장 원동력이 개신교보다 더 열심히 전도를 했기 때문이 아닌, 이러한 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이미지를 창출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때 가톨릭의 사회적 이미지가 ‘이기적 교회’라는 이미지에 갇힌 개신교와 극명히 비교되기도 했습니다.

   
▲ 전 후러싱제일교회 담임 장동일 목사(좌)와 뉴저지 베다니 교회 장동찬 목사(우)

“베다니교회, 후러싱제일교회 사태”

그런 의미에서 지난 ‘후러싱제일교회 사태’나 ‘뉴저지 베다니교회 은퇴사례금’ 문제는 동부지역 대형교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등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두 교회 분규의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들을 일일이 거론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사태의 과정을 보면 교계를 대표하는 대형교회로서 이웃과 사회를 어우를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함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외형만 비대했지, 내부의 갈등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와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으며, 동부 지역 대형교회로서 가져야 할 기대치를 철저히 외면하는 모습으로 일관했습니다.

은퇴목사에 대한 ‘3백만불 은퇴팩키지’를 교회 핵심 멤버들이 작성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미 작성된 계획안을 교회 리더 모임이나 장로들 모임에서 공표해 교회의 공분을 일으킨 상태에서 ‘그건 확정된 안이 아니었다’ 식의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더더욱 실망스러웠습니다.

‘후러싱제일교회’의 전임자와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이 ‘모자이크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은 이미 기사를 통해 보도했습니다. 장기간 후러싱제일교회 사태를 지켜본 입장에서 분규의 책임을 전임 목회자 만의 잘못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분란의 책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갖기 보단 일부 교인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 나간 모습에선 대형교회에 드려진 그림자만 부각될 뿐이었습니다.

“거들먹거리는 뚱보로 전락한 대형교회”

미주 한인교회에서 1천명이 넘는 교세는 이미 대형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대 사회적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교세, 재력, 인적 자원에 기대어 철옹성 같은 자기 성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비판과 자극을 자기 성찰과 반성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닌 오로지 비판하는 상대에 대한 대응과 싸움으로 소모합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는 교계의 ‘어른’ 교회가 아닌, 게으른 뚱보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들의 대형화는 운동으로 다져진 체격이 아닌 게으르고 안일한 신앙을 통해 불린 비만일 뿐입니다. 심지어 모 대형교회는 그 교회의 귀족화, 명품화 이미지를 더해 ‘거들먹거리는 뚱보’로 변질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도한 비만은 결국 질병과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크다는 건 건물 규모나 숫자 놀음이 아닌 교회 공동체의 성숙의 정도를 언급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풀러신학교 이학준 교수는 그의 책 ‘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에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교회성장이나 해외선교에 쏟아 붓는 열정 이상의 책임을 갖고 개신교가 시민 사회 안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대사회적인 책무를 망각한 채 오직 교회 안의 문제들에만 몰두하거나, 주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와 구제 차원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대형교회들의 책임으로 ▲ 개교회 중심의 사고를 버리고 공적 영성의 모범을 보여야 하고, ▲ 대형교회가 가진 어마어마한 자원을 개신교 전체 발전을 위해 써야 하며, ▲ 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키우고, ▲여러 기독교 기관을 업그레이드하고 전문화함으로, 시민사회 내 개신교의 이미지 재고에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건물이란 공간으로 제약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콘크리트의 프레임 안에 갇힐 순 없습니다. 새로운 교회 문화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선 대형교회는 처절한 자기 혁신의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외면한 교회의 폐쇄성은 500년 역사를 맞는 종교개혁 정신을 거스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양재영 기자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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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2014-10-29 10:07:28
누구나 멀미를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구토 하고 싶을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교회는 반드시 토해 내치겠다고 하셨습니다 (계시록 3:16)

대형 교회라 일컷는 일부 교회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도 없으면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목사대신에 신변잡기 주특기로 하는 '사람몰이꾼'을 강단에 세웠습니다.
그 꾼의 세치 혀에 성도들이 놀아나고 있습니다.
목사를 맹종하는 성도는 목사를 우상으로 섬기고 받들고 있습니다.

기사의 두 교회도 한국 교회에 널리 만연된 맘몬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었으며
이는 십자가가 빠진 종교적인 사교 모임에 다름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줄을 알고 회개 하십시오.
어떠한 변명도 하지 마시오.
이미 심판 받았습니다.

교인님! 2014-10-28 21:23:16
결국장목사는 26년동안 다닌직장에서 퇴직금 받고 퇴사하는것 맞지요?
교회가 십일조 걷어서 목사 생활비 대주는곳이군요.얼마전에 장목사 십일조설교듣다 걸어나온적이있읍니다.그러고 이런 기사를 읽으니 기분이 묘합니다

교인 2014-10-27 21:46:20
기자님은 잔잔한 호수에 왜 이리 돌팔매질을 하는겁니까?
저희 베다니교회는 기자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왜이리 왜곡 시키시고 자꾸 힘들게 만드십니까?
베다니교회 지금까지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교회로 쓰임받아 왔고
앞으로도 그런 교회로 나아갈겁니다.
제발 앞으로 이런 기사는 쓰지 말아주십시요. 부탁입니다.

한 마디 2014-10-27 15:04:23
목사는 누구입니까?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목사는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교인이 목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목사에게 사례비를 주고 받는 이유를 알아야 가장 이상적인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교인이 고용주가 되고 목사가 고용인이 되는 이런 비극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원시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시적인 교회란 구속함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매 주일마다 모이게 되는데 성도들의 각자의 삶에 의해 예배를 인도할 수 없어서 목사를 세워 모든 생활비를 대어 주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달라는 것이 교회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물론'교회'라는 자체의 비밀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목사와 교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위해 설교와 기도와 심방과 돌봄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들(모임)은 목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들은 교인들을 위해 정해진 시간들입니다. 이런 시간들을 위해 교회는 목사를 모시고 있는데 최소한의 생활비를 받으면서 목회를 하는데 그래서 목사는 시간이 있는데 교인들이 시간이 없어 모임이 되지 않는다면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이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돌보고 교인들을 세우고 영적 삶에 힘이 되어 주기 위해 바쁘고 피곤해야 합니다. 다른 일로 피곤해서야 되겠습니까?

목사와 교인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기는 관계여야 합니다. 여기에 무슨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계획이 필요하고 갈등구조가 생깁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목사에겐 아무 것도 없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됩니다. 이런 목사를 교인들은 알아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