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설교 잘하기 위한 세속적 책 읽기
[서평]설교 잘하기 위한 세속적 책 읽기
  • 홍동우
  • 승인 2014.11.0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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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서재- 창조적 설교를 위한 세속적 책 읽기

들어가는 글

작고도 크게 두껍지가 않은, 그러면서도 제목은 나름 거창한 책 한 권이 여기 있다. 원제는 <Reading for Preaching>이고, 번역된 제목은 <설교자의 서재>이다. 말 그대로 설교자를 위한 책이며, 독서를 동기 부여해 주는 책이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굳이 책을 읽으라는 이야기를 '책'을 통해 전달해야 하냐고 말이다. 얼추 맞는 말이다.

사실 본 책을 구매하고 읽어 볼 설교자라면 이미 설교를 위한 독서라는 아름다운 길에 들어섰든가, 혹은 노크를 두드리고 있을 테니. 하지만 본 책은 본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의 워필드 강좌에서의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담아내고 있다. 책을 위해 집필한 내용이 아니라 강연에서 나눴던 내용이란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장점과 단점이 분명히 갈리겠지만.

책은 총 6챕터, 그러니까 여섯 번의 강연을 담아내고 있다. 본 책의 논지를 따라가 보면 현 세태에 대한 노련한 학자의 현실 진단이, 그리고 그에 대한 후배들을 향한 뚜렷한 제언 돋보인다. 한번 우리도 따라가 보자, 우리 또한 저자의 직강에 초대된 후학들인 것처럼.

   
 

첫 번째 강의-초대

먼저 <설교자의 서재>의 저자는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설교란 본문에 터를 둬야 하며,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본문을 청중들에게 해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본문을 해설할 '예화'를 언급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서가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화뿐만 아니다. 설교자가 경험할 수 없는 삶의 영역에 대한 간접적 경험도 독서가 제공해 준다고 독자를 설득한다. 물론 그는 성경의 중요성도 언급한다. 아니 성경의 중요성이야 말할 나위가 없는 영역이라고 못을 박는다.

그리고 그는 단편소설, 전기와 기사, 시 그리고 인터넷 매체까지도 설교에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첫 번째 강의를 마무리하며 모든 독자들을 '독서하는 설교자'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다. 아니,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설교자의 성숙을 위한 진지한 독서의 자리로 말이다. 물론 독서를 한다고 무조건 탁월한 설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하면서 말이다. 첫 번째 강의는 이처럼 독서를 향한 초청의 메시지를 후학들에게 건네고 있다. 다만 몽상을 꿈꾸는 것만큼은 선을 그으면서.

두 번째 강의-예화

예화를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할까? 저자는 먼저 선을 긋는다. 예화를 찾기 위해서 일반 서적을 읽는 것은 엇나간 일이며, 오히려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기 위해 일반 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어서 그는 흔한 설교 예화의 사례에 대해 비판한다. 스토리 전개 자체가 부실하기에 예화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그리고 설교자는 신선한 예화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한 신선한 예화는 삶에 대한 충실하고도 주의 깊은 관찰력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부캐넌, 윌리몬, 러틀리지, 존커와 같은 적절한 예화를 사용한 목회자의 예시를 든다. 그들의 사례에서 볼 때에 좋은 예화는 단순한 설교에서의 좋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최선의 경우에는 힘줄과 뼈로서 작용한다. 이어서 그는 예화의 남발에 대하여 몇 가지 방책을 제시한다. 바른 판단을 통해 예화의 적실한 사용을 할 것과, 조금씩 꾸준히 일 년에 소설 한 권이라도 좋은 독서를 하라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전의 강의처럼 마지막에 선을 긋는다. 예화의 활용보다 중요한 핵심은 성령의 임재라고 말이다. 물론 성령의 임재가 중요하다는 핑계로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와 함께 말이다. 두 번째 강의에서는 '예화'라는 좋은 미끼를 얻을 수 있다며 후학들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상 그렇다, 독서의 첫 걸음마를 시작하는 설교자들에게는 가장 먼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예화'가 아니겠는가?

세 번째 강의-조율

세 번째 강의의 제목은 '설교자의 귀 조율하기'이다. 하지만 실제로 강의의 내용은 '설교자가 어떤 방식으로 설교해야 하는가?'에 가깝다. 설교란 마치 밭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것처럼, 좋은 설교를 위해서 어떤 씨를 뿌려야 하는지에 대해 다룬다. 우리게 주어진 성경 텍스트를 어떻게 조리해서, 전달할 것인가? 저자는 먼저 월터 부르그만을 인용하여 '시적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또 이어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를 언급하며 그의 일관성과 투명성이 담겨진 명쾌함을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먼저는 화법이다. 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야기꾼들의 작품을 독서하면서 화법을 배우라고 권한다. 다음은 서사적 구조이다. 설교에서의 일종의 흐름이랄까? 특히나 앞에서 언급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가 여기에 능했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깔끔한 언어로 명쾌하게 전달할 것을 권면하며, 또한 청중이 계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연상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환기의 어법'을 권한다. 물론 이 또한 좋은 책을 꾸준히 독서함으로써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또 한 번 선을 긋는다. 거장의 화려한 어법을 따라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언어의 힘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며, 설교자는 말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좋은 화법, 그리고 좋은 내용을 두루 갖췄기에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마틴 루터 킹 2세의 명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를 인용하며 마친다. 세 번째 강의는 더 이상 책을 읽는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자를 읽어 내고 또한 설교자를 교정해 내는 책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같다. 그렇다. 진득한 독서는 내가 책에게 다가가는 작업에서, 책이 내게 다가와 귀를 조율하기까지 나아간다.

네 번째 강의-지혜

설교자는 생각보다 매번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단순한 기독교의 복음을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상황에 맞춰서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말은 결국 청중들이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바로 설교자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함을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지혜란 인생의 흘러감을 아는 것이며, 분별력을 갖는 것이며, 인생의 오묘함을 아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혜란 설교자가,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간구하는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 있나?

간명하다. 저자는 독서를 통해 설교자로서 영글어질 것을 제언한다. 지혜 있는 설교자는 사실상 성경을 제대로 해석해서 알려 주는 설교자기도 하다.성경 자체가 지혜의 창고이기에.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른바 중량급 지혜(Middle wisdom)이다. 격언보다는 못하지만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한 지혜들. 이런 지혜들은 폭넓은 독서로부터 만들어진다. 이런 중량급 지혜들은 소소해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결국엔 설교의 토대가 된다. 이어서 저자는 이러한 지혜들도 성경을 바탕으로 두고 습득하고 판단해야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모든 지혜가 선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경고하고 있다. 네 번째 강의 또한 독서가 설교자의 삶에 지혜를 스며들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처럼 독서가 진전되다 보면 독서의 주체는 책이 된다. 그리고 책은 설교자를 영글게 도와준다.

다섯 번째 강의- 삶의 다양성

'삶의 자리(Sit im leben)'라는 말이 있다. 헤르만 궁켈이란 성서학자의 말이다. 개념의 뜻인즉슨 성서 텍스트가 기록된 고유의 '환경'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설교자에게도 적용된다. 설교자에게도 고유의 자리가 있어, 설교자의 설교와 지평은 그 '자리' 안에서 머문다. 하지만 우리는 책에서 전혀 다른 삶의 자리를 가진 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나 저자는 소설 속에 있는 네 명의 인물을 먼저 예시로 든다. 킬러로서 9명의 사람을 죽여 왔지만, 그럼에도 수백 명을 살려 줬기에 스스로 '자제력이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발리오네, 장발장에게 법의 심판을 선고하기 위해 살아왔지만 결국 장발장의 자비적 실천에 의해 자신의 삶의 길을 잃어버린 자베르 경감, 자신의 시력은 너무도 좋기에 스트라이크존을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발언하여 오히려 애매한 상황에서의 심판의 판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던 타자 윌리엄스, 오래전에 찬란한 영광의 때를 살았다며 스스로를 으스대면서 한낱 허름한 아파트의 청소와 관리를 담당했던 여인 부리마.

그러면서 저자는 외친다. "우리네 삶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물론 그는 개혁주의 설교자이자,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 지평을 넘어선 지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독서를 통해 만날 때마다 '경이로움'을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그가 예시로 드는 소설들은 하나같이 다양한 삶의 정황들, 삶을 향한 시각들, 복잡다단한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 소설들의 예시를 읊으면서 저자는 우리게 소리친다. "당신의 삶의 경계를 넘어서라! 바로, 독서를 통하여."

다섯 번째 강의에서는 삶의 다양성을 넓게 만드는 독서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어쩌면 미국교회도 한국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언뜻 스치게 된다. 특히 한국교회에서 회자되는 설교자들이 내뱉는 자신의 삶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한 거친 망발들이 생각난다. 독서를 통해 삶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면, 적어도 강단 위에서만큼은 망발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독서를 통한 삶의 지평의 확대는 삶의 경이로움을 설교 소에서 녹여 낼 수 있다고.

여섯 번째 강의-죄와 은혜에 대한 지혜

오늘날 설교자의 위기 상황은 무엇보다도 죄와 은혜에 대한 개념 자체가 두루뭉술해진다는 점이 아닐까? 죄인과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설교자로서는 죄의 개념이 두루뭉술해진다는 현대사회의 흐름에 의해, 은혜마저 흐릿해지는, 이른바 설교의 위기 속에 놓여 있다. 개념 자체가 흐릿한데 도대체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서머싯 몸의 작품인 <인간의 굴레>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발이 기형인 아홉 살 소년 필립이 겪는 삶의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서 죄의 잔혹성, 죄가 일으키는 집단적 결집을 직면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어서 그는 할리우드 영화에서조차, 그리고 대중소설에서조차 악이 만연한 현실을 그려 내고 선과 악의 간명한 대립을 보여 주고 있다며, 사실상 설교단은 '죄는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그는 사과와 용서에 관련된 일화들을 언급한다. 변호사 켈리 클락의 이야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단순한 죄과를 언급하는 데를 넘어서 용서를 구했던 이들을 그려 낸다. 그리고는 그 일화들 속에서 그는 말한다.

죄와 은혜의 개념이 흐릿해진 이 시대에 충분한 독서를 통해, 죄와 은혜의 개념을 완연히 드러낼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지막 강의를 통해서 사실 저자의 깊은 고민을 만날 수 있었다. '포스트모던'이 제공하는 '다양성'이라는 굴레 안에서 무뎌지고 있는 죄와 은혜라는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 주제들. 전체 강의의 흐름과는 살짝 엇나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목회 현실에서는 무엇보다 유용한 강의가 아닐까? 독서를 통해서 다양한 삶의 폭을 넓힘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풍성하게, 또 한편으로는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보다 설교자에게 유익이 되는 독서의 영역은 없을 테다.

나가는 글

사실 생각보다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꽤나 많은 미국의 상황에서만 유명한 것 같아 보이는 사례들의 언급들 속에서는 오히려 길을 잃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책의 두께는 얇지만, 도저히 독서의 여정은 짧지 않았다. 언젠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 대하여 김영봉 목사께서 "메시지를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형 메시지를 누군가 원어로부터 직접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하신 적이 있다. 물론 <메시지>는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지만, 오랜 숙고가 담겨서 '미국식 메시지'가 아니라, 한국인도 충분히 읽어 낼 수 있는 <메시지>가 되었다. 본 <설교자의 서재>는 강의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기에 그때그때 한국인에게 맞는 사례로 교체할 수는 없었겠지만, 미국의 맥락에서 내용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꽤나 아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만큼은 간명하다. 성경의 익숙한 표현들에만 매몰되어버려서, 사실상의 복음이 선언되는 땅의 현실을 잃어버리고, 그와 함께 하늘이 어떤 복음을 선포했는지조차 잃어버린 채로 표류하는 설교자들을 향해 '독서'를 통해 땅과 하늘의 원위치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사실 성서도 하나의 책이다. 다만 하나의 책만 주구장창 읽다 보면 오히려 언어에, 그리고 그 표현에 매몰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오히려 성서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로부터 격리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저자의 직언에 따라서 독서를 시작해보자. 저자가 추천한 목록들도 좋고(물론 미국적 상황에 맞는 목록이기는 하지만, 꽤나 번역된 책들이 있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신학도들에게 추천하고 있는 서적들의 목록도 좋다. 가장 좋은 점은 책들을 집어 들고 일단 읽는 것이다. 다만 내가 왜 독서를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본 책을 꼼꼼히 읽어 보라. 그리고 저자가 담지하고 있는, 독서를 통해 만들어 간 세계의 풍성함을 맛보라.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이 책에게 물어보라. "그래도 독서를 해야 할까?"라고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과 전도사의 경계, 부산과 대구의 경계,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의 경계, 인문학과 신학의 경계 사이에서 양자와 서로 대화하며, 갈팡질팡 방황하는 한 평범한 청년 전도사이자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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