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위한 창조하는 용기
개혁을 위한 창조하는 용기
  • 김정호
  • 승인 2014.11.14 0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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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 목사 ⓒ <뉴스 M>

1964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을 때 싸르트르는 작가는 어떤 집단이나 제도(institution)에 의해 실력을 인정받게 되거나 능력이 규정되어지면 안된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지성인은 기술이나 제도적 지식인이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주장했다가 당시 프랑스 엔지니어들이나 국가공무원에게 비난을 받기도했었습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지성인은 비판자의 역활입니다. 비판의 역활은 인간의 자유, 존엄, 정의, 진리와 같은 가치관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는 1980년대 대학생목회를 하면서 지성인의 비판의 사명이란 말에 감동을 받아 인권과 민주운동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는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가 넘어가면서 비판에만 머무르는 허망한 지식인들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의 생각에 도움을 준 개념이 심리학자 Rollo May가 말한 ‘창조하는 용기’입니다. 그는 폴 틸릭의 존재하는 용기와 더불어 창조하는 용기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구세대는 아직 완전히 떠나지 않았고 새시대는 도착하지 않은 애매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창조하는 용기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경우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시민정권이 들어섰지만 그 이후에도 오랜세월 독재문화를 버리지 못하는 구세대가 아직 떠나지 않았는데도 민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정권을 차지할 기회가 왔을 때 자기들끼리 비판하고 분열하는 일을 일삼는 것 보면서 실망을 했었기 때문에 창조하는 용기라는 말이 참 감동이었습니다.

   

2017년이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얼마전에 목사만이 아니라 평신도 역시성직자라는 개신교의 핵심 사상인 만민제사장 정신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하는 디트로이트연합장로교회 류효명장로님을 만났습니다. 2017년도를 바라보면서 이민교회 개혁을 위해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고 호소하셨습니다. 루터가 부패한 중세 캐톨릭을 개혁하기 위해 시작한 개신교 오늘날 어떤 개혁이 필요한가요? 진정한 개신교회가 되기위해 우리들에게 어떤 창조하는 용기가 필요할까요?

먼저 거룩함의 회복을 생각해 봅니다. 1980년대 초반 시카고대학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할때인데 교회 리더들이 찾아와서 제게 조언을 합니다. “목사님, 세상돌아가는 사회정치 시사 이야기 저희들이 목사님 보다 더 잘 안다는 것 인정하셔야 합니다. 주일날 목사님께 듣고 싶은 것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당시 우리교인들은 세계 최고 명문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등 박사학위를 하는 사람들인데 매 주일 목사에게서 세상 돌아가는 정치이야기를 들어야 하니 얼마나 고역이었을지 참으로 민망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결코 탈세상적인 복음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공동체이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나를 사랑해서 조언하지 않았었다면 나는 세상돌아가는 사회 정치문제를 비판만 하는 설교를 예언자적 설교로 착각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개신교 목사들은 캐톨릭 신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제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상징적인 문제제기이지만 목사가 사제옷 입는 문화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인간을 가리기 위해 입었던 성직가운이 이상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인간을 감추려고 입는 옷을 사람을 내세우려고 입는 휘황찬란한 옷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목사와 평신도를 옷으로 구별하려는 노력은 낮간지러운 노릇입니다.캐톨릭은 옷으로 성직을 구별하는지 모르지만 개신교는 아닙니다. 나아가서 학교 학위를 상징하는 줄까지 성직가운에 달고 강단에 올라가는 부끄러운 일들은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물론 똑같은 옷을 매주일 입는 유니폼이편하다는 이유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신부들이 입는 사제복 개신교 목사들은 왠만하면 그만 입으면 좋겠습니다.

가운이나 옷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그리 관계되지 않는 수많은 성직을 구별하려는 ‘권위’들 내려놓아야 합니다. 특권의식을 나타내는 수많은 ‘권’들 내려놔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 질서가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를 지키기 위한 ‘권위’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권위는 약한 자를 강하게 돕기 위해 주어지는 힘인데 이것이 거꾸로 되면 참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자로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에 없는 것들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 것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명으로 수호해야 하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십자가 구원 예수 부활이고 성도들에게 약속된 천국입니다. 복음을 수호하지 않고 목사들의 권위와 권력을 수호하려고 하니 전도의 문이 막히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목사가 사제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목사는 사제가 아니기 때문에 목회를 하면서 가족이 잘 살수있도록 제대로 된 정당한 사례를 받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목사도 그렇고 목사 배우자들이 직업을 가지도록 권장해야 할 것입니다. 가끔 보면 목사는 가난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 있는데 굉장히 신앙적인 말 같지만 못된 말입니다. 목회자 사례에 두가지가 있는데 죽지말라고 주는 것과 살라고 주는 것입니다. 물론 재정형편이 되는 교회의 경우입니다. 개혁이 제대로 되려면 평신도들도 목사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들 버려야 합니다. 

개혁의 목표는 예수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주로 세상에 나가서 소외된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과 만나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고쳐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릭 워렌 목사가 21세기 새로운 종교개혁은 belief(교리와 신조)가 아니라 behavior(삶, 생활)가 되어야 한다고 한 말에 동의합니다. 예수님 가르침과 삶의 상식으로 교회가 돌아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김정호 목사 / 아틀란타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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