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아버지 바흐" 개신교도의 음모가?
"음악의 아버지 바흐" 개신교도의 음모가?
  • 최정동
  • 승인 2014.11.14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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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최정동의 '바흐 순례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나오는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를 좋아한다. 대학생 시절이던 1995년 영화 <희생>을 보고 난 뒤부터였다. <희생>은 세계 영화사 100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연출했다. 제3차 세계대전을 앞둔 공포 속에서 유명 작가인 주인공 '알렉산더'가 기도와 헌신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의 아들 '고센'은 실어증에 걸린 아이였다. 어느 날 주인공은 아들에게 말라 죽은 나무에 꾸준히 물을 주어 꽃을 피우는 수도승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강가에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영화는 고센이 주전자에 물을 길어와 그 나무에 물을 주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불쌍히 여기소서'가 나오는 대목이 여기다. 죽은 나무 아래 누운 고센은 나지막이 속삭인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그게 무슨 뜻이지요?" 마침내 말을 하게 된 고센이 내뱉은 그 첫 마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길고 깊은 여운 속에서 나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가슴을 후벼파는 '불쌍히 여기소서'의 서글픈 멜로디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 2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는 내내 지루했다. 감독 특유의 극단적인 롱테이크는 무시로 내 눈을 감기게 했다. 그렇게 조는 듯 보는 듯 두 시간을 지난 어느 순간, 애처롭게 흐느끼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아이의 애처로운 영상과 함께 세포 마디마디를 파고들었다.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굵은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눈물은 힘이 세다. 가슴이 뻥 뚫리는 그 느낌은 치명적이다. 해방감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눈물을 흘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난 바흐의 '불쌍히 여기소서'를 듣는다. 목이 메여 온다. 타락한 세상, 탐욕스러운 인간 군상 속에 내던져진 나를 돌아본다. 수난의 예수를 그린다. 그토록 나를 처연하게 한 '불쌍히 여기소서'의 음악가 바흐와 함께. 그는 누구였을까.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청춘 시절은 어땠을까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책표지

이 책의 부제는 '독일 튀링겐 옛 마을로 떠나는 바흐 순례'다. 저자는 서른 무렵에 입문한 음악을 평생의 반려로 삼은 사람이다. 그의 바흐 사랑은 남달라 보인다. 그간 사 모은 수천 장의 음반 중 바흐 음악이 3분의 1이나 된다. 저자에게 바흐는 그야말로 '성인'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이 책은 바흐의 흔적을 따라다닌 여행의 기록인 동시에 성지 순례기다. 저자는 바흐의 고향인 독일 아이제나흐에서 무덤이 있는 라이프치히에 이르기까지 그의 흔적이 남은 곳곳을 꼼꼼히 훑는다. 공백으로 남아 있는 바흐의 연대기는 상상으로 채워 넣는다. 여행기이자 평전이며 멋진 상상력이 가미된 팩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발을 쓴 근엄한 모습으로 널리 알려진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헨델과 동시대인이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어떤 글에서 사람들이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이 유럽 개신교 세력의 엄청난 음모에 따른 결과라고 비판한다. 산업혁명 이후 부를 얻게 된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자신들의 문화를 대변할 아이콘으로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바흐를 발견해 떠받들게 됐다는 것이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말 뒤에 개신교 세력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주장은 확인할 길이 없다. 믿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다. 더구나 그의 고향 아이제나흐는 '개신교의 아버지' 루터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옮긴 곳이기도 하다.

작가는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며 무한히 아낀다"라는 루터의 말을 인용한다. 실제로 루터는 성악과 기악에 두루 능했다. 가톨릭 사제 시절에는 미사곡도 불렀다고 한다. 바흐가 깊은 신앙심으로 <마태수난곡>과 같은 종교음악을 창조해낸 배경들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청춘 시절을 상상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사실 대한민국의 권위적인 아버지와 시든 꽃 같은 어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당신들의 인생 절정기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여느 분야에서보다 천재들이 수두룩한 음악계에서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 바흐의 청춘은 어땠을까. 당연히 바흐에게도 열혈의 청년기가 있었다. 저자가 전하는 일화 한 토막을 보자. 바흐는 18살에 고향 아이제나흐에 있는 노이에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다. 교회 산하의 라틴어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성악·기악 앙상블의 음악감독을 겸임하는 자리였다.

앙상블에는 어리지만 자부심 넘치는 어린 '선생님'을 아니꼽게 여기는 늙수그레한 학생들이 많았다. 어느 날 바흐는 앙상블에서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파곳 연주자 가이어스바흐에게 홧김에 '얼간이'라고 쏘아붙인다. 가이어스바흐는 나이가 23살이나 된 장성한 청년이었다.

그날 밤 바흐는 궁정음악회를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광장에서 가이어스바흐를 마주친다. 건장한 청년 6명과 함께 바흐를 기다리고 있던 가이어스바흐는 바흐가 던진 '얼간이'라는 말에 앙심을 품고 따질 요량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깊은 밤 달빛 아래서 거친 숨소리와 욕설을 내뱉으며 필사적인 난투극을 벌인다. 점잖아 보이는 바흐가 길거리 싸움을 했다니 놀랍다. 그렇다면 바흐는 원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는 저자의 말이 맞을까.

   
▲ 바흐

책에는 바흐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곳곳에 담겨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바흐 집안 사람들은 삶의 중심 무대였던 튀링겐을 거의 벗어나지 않은 채 음악이라는 예술에 심취하면서 검소한 삶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바흐는 달랐다. 저자는 바흐가 이런 집안 색깔과 달리 튀링겐 바깥의 넓은 세상으로 나가 평생 더 좋은 보수와 명예를 좇으며 살았다고 말한다.

바흐 동갑내기인 '음악의 어머니' 헨델과의 인연담도 흥미롭다. 1719년, 영국에서 7년째 최고의 음악가로 군림하며 살고 있던 헨델이 자신의 고향 할레를 방문했다. 할레에서 가까운 쾨텐에 살고 있던 바흐는 그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할레로 달려간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헨델은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10여 년 뒤 헨델이 다시 고향을 방문했다. 당시 라이프치히에 살면서 열병을 앓고 있던 바흐는 헨델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장남을 보내 라이프치히로 와 줄 것을 정중히 부탁한다. 헨델은 올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답변만 보내고 오지 않았다. 그 뒤 헨델은 1752년부터 1753년 사이에 고향을 다시 한 번 방문한다. 하지만 그때 바흐는 이미 죽고 없었다.

바흐는 간절히 보고 싶어했으나 헨델이 거절한 모양새다. … 어떤 사람들은 헨델이 '작곡과 즉흥연주의 불사조'인 바흐와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만 그런 정황을 증명하는 어떤 단서도 없다. 헨델은 그저 귀찮다고 생각했거나 바흐만큼 호기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이런 스타일은 초상화에서도 대강 읽힌다. 바흐는 철저, 집요하고 헨델은 시원시원, 서글서글하다. (270~271쪽)

바흐가 두 번째로 산 도시인 오어드루프의 미하엘 교회에는 'Bach in Ohrdruf(바르 인 오어드루프, 오어드루프의 바흐)'라는 제목의 아담한 조각품이 있다. 바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 조형물의 허리에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의 유명한 찬사, "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그는 시냇물이 아니라 광할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독일어로 '바흐(Bach)'에는 시냇물이라는 뜻이 있다. 베토벤은 이를 이용해 바흐를 극찬하는 멋진 수사를 창조해낸 것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맛보게 하는 바흐의 음악
 
이 책을 펼쳐 읽은 첫 날 내내 '불쌍히 여기소서'를 반복해 들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한 흑백 영상을 통해서였다.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의 연주에 맞춰 떨리듯 노래를 부르는 콘트랄토 율라 빌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연하다.


지금 나는 바흐의 '샤콘느'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의 마지막 곡인 '샤콘느'는 비탈리의 '샤콘느 G단조'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정말 그렇다. 가슴이 서서히 떨려오는 이 느낌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에게 가장 슬픈 음악은 '샤콘느'가 아니다.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BWV 1014~1019) 1번 B단조의 1악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바흐 연구자인 슈바이처 박사는 이 곡이 바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추측했다.

1번 1악장과 5번 1악장의 비통함은 듣는 사람을 눈물짓게 한다. 나는 이 곡들을 들으면 어두운 방구석에서 소리 죽여 곡(哭)을 하는 중년의 사내가 떠오른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아이들의 눈을 피해 홀로 흐느끼는, 처참한 모습. (287쪽)

'샤콘느'를 듣다가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1번 1악장을 찾아 듣는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맛보게 된다는 저자의 감상이 오롯이 전해진다. "슬픈 운명을 예감한 듯한 무거운 발걸음의 쳄발로 반주"와 "흔들리는 촛불 같은 현"(이상 287쪽)이 어우러진 도입부가 가슴을 후빈다.

'불쌍히 여기소서'를 알게 된 후, 나는 얼치기 바흐 마니아가 되기 시작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20~30대 시절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마다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들었다.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오는 첼로의 풍성한 소리에 취해 있다 보면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한 편의 소박한 수채화를 그리듯 담박하게 써내려간 이 '바흐 순례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덧붙이는 글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독일 튀링겐 옛 마을로 떠나는 바흐 순례>(최정동 지음 / 한길사 / 2014. 10. 20. / 427쪽 / 2,0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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