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과 개신교, 그 만남과 개혁의 노정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 그 만남과 개혁의 노정
  • 신광철
  • 승인 2014.11.16 05:36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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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와 개신교, 그 만남과 공존 그리고 미래

 지난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닷새간 이루어진 교황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은 종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왔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진솔하고 파격적인 행보는 천주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위상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그리스도교를 구성하는 중요한 두 주체인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근현대 한국종교사의 전개과정을 돌이켜 볼 때, 천주교와 개신교는 유불선(儒佛仙)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고전 종교 전통과 대비되는 서양 종교 전통이라는 축을 형성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때로는 갈등 관계를, 때로는 공존과 협동의 관계를 이루어 왔다. 오늘날에도 한국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두 가지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두 전통의 형제애가 강조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상대방을 폄하(貶下)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단시(異端視)하기까지 하는 흐름이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적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근대 한국종교사의 자리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위상과 상호관계 및 인식의 성격을 살피는 한편,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호관계 및 인식의 현재 지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미래적 전망의 실마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적 관계

그리스도교는 가톨릭(天主敎)과 프로테스탄트(改新敎)라는 두 갈래의 흐름으로 한국종교사에 합류하였다. 1984년 한국 그리스도교의 두 주류는 각각 자신들의 역사를 기념하는 큰 행사를 치렀다. 천주교는 ‘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였고, 개신교는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였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가 ‘교회 창설 200주년’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한 것은 각각의 흐름이 지니는 나름의 역사성을 반영한 것이었으며, ‘교회 창설’과 ‘선교’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두 전통의 특성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의미를 지닌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가 이와 같이 나름의 역사성과 전통을 지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한국인들은 애초에 두 전통을 ‘한 통속의 서양 종교’로 이해하였다. 개신교 선교 초기만 해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성에 보다 주목하였다. 동양의 전통 종교인 유교나 불교에 대비되는 ‘서양 세력의 종교’ 내지는 ‘예수로부터 비롯된 종교’라는 점에서, 두 전통은 한 묶음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서양종교사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위상과 한국종교사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위상이 다소 달랐던 사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서양 종교 역사에서 그리스도교는 늘 중심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반면에, 근대 한국종교사에서 그리스도교(천주교와 개신교)의 위상은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종교사적 입지를 확보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천주교는 오랜 박해기를 거쳐 비로소 지하교회를 벗어난 단계였으며, 개신교 또한 이제 막 선교 활동을 시작한 새내기 종교였기 때문이었다.

서양종교사와 한국종교사의 이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위상 차이는 그리스도교의 두 주류인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에 대해서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교 중심의 서양종교사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관계가 분별(分別)을 지향하는 경향이 강했던 반면에, 기존의 종교지형에서 새롭게 스스로의 위상을 확보해 나가야 했던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경우 단순히 분별만을 지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각기 독자적인 복음 전파의 경로를 걸었지만, 두 전통이 시종일관 차별성의 이미지만을 부각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상황에 따라 때로는 유사성의 이미지를, 때로는 차별성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개신교 선교 초기에 해당하는 개항기를 전후해서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는 잦은 접촉을 가졌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두 전통은 때로는 서로 협력하고 때로는 서로 갈등하였다. 개신교의 한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한말(韓末)의 시기는 양측의 갈등 양상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물리적인 충돌을 빚기도 하였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문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개신교 선교 초기 두 전통이 이러한 갈등 양상만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개신교는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개신교는 100여 년 앞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왔던 천주교의 역사적 경험을 자료삼아 나름의 한국 선교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신교가 ‘간접 선교’, 즉 학교나 병원을 중심으로 간접적인 교육선교와 의료선교를 우선적으로 펼치는 선교전략을 채택했던 것도 천주교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적극적인 반추(反芻)를 통한 것이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호 관계 및 인식의 현실

종교인들의 신앙의식 및 이웃종교에 대한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는 종교의 현실을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호 관계 및 현실인식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확보하고자 한다.

1982년에 실시된 <한국교회 성장과 신앙양태에 관한 조사 연구>는 개신교인들의 각 교단 및 타종교에 대한 ‘친소도’(RDI=the relative degree of intimacy)를 조사한 바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신교인들은 천주교에 대해 33.8%가 친근감을 나타낸 반면에 45.5%가 경원하는 태도를 보여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이 상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년 뒤인 1985년에 실시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위원회 사회조사 보고서>에서 천주교인들은 개신교(14%)보다 불교(34.46%)에 더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이와 같은 경향은 1988년에 실시된 <가톨릭 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조사 보고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천주교인들은 불교의 교리·사상에 대해서는 36.6%가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28.5%가 반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에, 개신교에 대해서는 19.6%가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43.8%가 반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설문조사 보고서들의 결과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가 편안하지만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언론 보도를 통해 종종 이러한 불편함을 현실로 체감하곤 한다.

필자는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호 관계 및 인식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에 대해서 애정과 함께 책임을 느껴 왔다. 박사학위 논문(“초기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의 상호관계 및 이해에 대한 연구”, 1996)을 통해서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적 관계와 상호이해의 구조를 천착했던 것도 그러한 취지였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를 성찰하면서 느낀 점이 한 가지 있다. 어쩌면 한국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이 서로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지식을 토대로 서로에 대한 비판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왔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남의 부재(不在)가 서로에 대한 비판적인 이미지를 확대해서 재생산한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점에서 두 전통의 만남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보다 건설적인 상호관계를 전망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남의 경험에 대한 성찰 - 교회일치운동의 회고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는 교회일치운동을 통해 상호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한편, 그러한 관계 구축을 통해서 공동체성을 체험하여 왔다. 많은 신학자들이 1960년대 이후 형성된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화운동에 대해서 주목해 왔다.

한국 천주교는 1966년 ‘일치위원회’를 발족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개신교가 갈라져 나간 종교, 즉 ‘렬교’(裂敎)가 아닌 ‘형제의 교회’임을 강조하였다. 같은 해에 개신교 쪽에서도 아카데미 하우스 준공을 계기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대화” 모임을 가지면서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을 초청하였다. 이와 같은 대화의 노력은 구체적인 ‘일치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1968년부터 ‘교회일치기도주간’을 제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을 벌였다. 1970년 명동성당에서는 1,000명이 넘는 그리스도인(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함께 모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하나[一體]가 되어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은 현대 한국종교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념되어야 한다. 천주교 성당에서 개신교 목사가 설교를 하고, 개신교 예배당에서 천주교 신부가 강론 함으로써 ‘하나됨’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치기도운동을 비롯한 교회일치운동이 교계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까지 확산되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반을 구축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성서를 함께 번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전통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서를 공동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1971년 부활절에 신약 성서를, 1977년 부활절에 구약 성서를 각각 번역해 냄으로써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동번역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일반 신자들이 성서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와 같이 의미 있는 공동번역 성서가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 두루 사용되지 못했던 점은 반성적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공동번역 성서가 번역된 지 상당한 시일이 흘렀다는 점 또한 검토의 대상이다. 두 전통이 다시금 한 마음 한 뜻으로 새로운 성서 공동번역 작업을 하여 결실을 거두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학술운동을 통하여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 과정에서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은 다름[異體]을 뛰어넘어 하나[一體]가 되어 권력이라는 이름의 절대 악에 저항하는 결기를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노동·인권운동과 환경운동 등 사회운동 부문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협력은 지속되고 있다.

학술운동 부문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이 이루어졌다. 1971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열린 “현대 성서학의 동향” 심포지엄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는가 하면, 천주교 쪽의 서강대 종교신학연구소와 개신교 쪽의 한국신학연구소의 공동노력으로 『하나인 믿음』을 발간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 접근” 심포지엄이 개신교 신학 잡지인 「신학사상」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 진영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가 결성되어 “주님의 기도, 또는 주기도문,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이 쓸 수는 없을까”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엄을 열어 일치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학술운동을 통한 일치운동은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의 상호인식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학술운동을 통한 일치운동이 더욱 활성화되어 천주교와 개신교의 발전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일치운동의 전망

오늘날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에 대한 열기는 1960-1970년대만큼은 뜨겁지 않아 보인다. 일치기도운동에 대한 열기가 예전만 같지 못하며,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공동번역 성서의 활용도 그다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지난 역사를 돌이켜봄으로써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는 소수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교라는 공동운명을 지키기 위하여 힘을 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한국 그리스도교가 다수(多數)의 자리를 점하기 시작하면서 하나 됨을 추구하기보다는 각기 자신의 세(勢)를 넓히는 데에 주력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 됨보다는 다름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가 위기 상황에서는 하나 됨의 이미지를 추구한 반면에, 이른바 ‘성장과 풍요’의 시대에서는 하나 됨의 이미지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제기된 일치운동 역시 그리스도교의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의 배경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영향으로부터 찾았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일치운동에 대한 관심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조성된 그리스도교의 위기 상황과 적지 않게 관련이 있다. 현대 그리스도교계는 현대사회의 세속주의의 만연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교회 공동체의 하나 됨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교회는 세속화의 물결과 마주해서 “인류가 거주하는 한 덩어리의 땅”, 즉 ‘오이쿠메네’(oikumene)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에큐메니즘’(ecumenism)의 주창에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전 세계적으로 전에 없는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위기의 징후는 양적·질적 측면 모두에서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Global Society)이 되었다. 세계의 지구촌화는 지식정보화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지식정보화의 물결은 그리스도교의 각 전통으로 하여금 더 이상 고립 분산적인 자기주장을 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내부적으로 에큐메니즘을 통해서 교회일치운동을 벌여야 할 필연성과 마주치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노력을 통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첫째,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호 관계 및 인식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통해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고 거기에 담겨진 의미를 해독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천주교·개신교 관계사 자료집’을 집대성하는 한편, 그렇게 모여진 역사에 대한 해석 및 미래적 동력 확보를 위해 두 전통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교회일치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더욱 실제적인 일치운동을 실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일치운동의 경험을 반추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이고 따뜻한 교회일치의 삶을 예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일치운동의 동력을 교회 안과 밖에서 구체적으로 확보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1960-1970년대 사회운동의 장에서 얻은 공동 경험의 동력을 교회 공동체와 공유하는 선순환적 일치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셋째, 앞으로의 일치운동은 교계 엘리트 중심이 아니라 신앙대중 중심으로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일치운동은 교리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신앙적 차원으로 확산되도록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신광철 │ 교수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대학원에서 근대 한국종교사를 공부했다.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디지털문화콘텐츠학과에서 문화콘텐츠를 가르치고 있다. 현재 인문콘텐츠학회 부회장 겸 영브레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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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김 2014-11-18 22:47:28
웃기는 기사로다! 참 웃기는 ...

선지자 2014-11-17 08:55:17
한신대 것들이 그렇지, 뭐 선한 것이 나오겠나?

선지자 2014-11-17 08:53:34
얘는 또 뭐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