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인 소수자'라는 신화가 가진 함정
'모범적인 소수자'라는 신화가 가진 함정
  • 강희정
  • 승인 2007.04.26 0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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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미국 엿보기 3.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미국 주류의 고정관념

▲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은 '모범적인 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신화에 갇혀 애초부터 사회와 소통하지 않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박지호)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에 사는 아시아계 이민자들 또는 한인 이민자들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장 극단적인 모습으로 노출시켰다. 이 사건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이민 와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한 젊은이가 저지른 대참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 전에, 그 젊은이가 그처럼 막다른 벼랑의 끝까지 몰리게 만든 이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이 처음 터지고 용의자가 한국계라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소수 인종과 관련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항상 국적이나 인종적 배경이 등장한다. 언론에서 사건 용의자의 인종이나 국적을 거론하는 관행은 그 용의자가 처한 집단 전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다. 특히 그 집단이 소수계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고 조승희 씨의 경우 8살에 이민 와서 15년간을 미국에서 살아왔던 젊은이다. 한국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거의 두 배나 오랫동안 미국에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인’으로 분류되었다. 그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비단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미국에서 6대째 살아온 중국계로서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한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과 관련하여 항상 중국계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고 한다. 그를 미국인으로 보기보다는 중국인으로 보는 시선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고정관념 속에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영원한 외국인’(Perpetual Foreigners)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이지만, 이 대륙에 제일 먼저 이주해 들어왔던 앵글로 색슨계 이후에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늘 있어왔다. 아일랜드인, 흑인, 유태인, 독일인, 이탈리아인에 이르기까지 미국에 처음 이주해온 소수집단들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이 계속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소수계 민족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흡수된 반면에 아시아계만큼은 그 이민의 역사가 비슷한 다른 민족들과 달리 미국 사회에 아직 흡수되지 않았다. 여전히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외모와 문화가 다른 점이 강조되면서 철저히 ‘다른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다. 고 조승희 씨가 어려서 다른 학생들로부터 들어왔다는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주류 미국인들의 의식 사이에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미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처럼 배타적인 시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부정적이지는 않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조용하고 매우 영리하며 열심히 일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 조승희 씨와 그의 가족들도 이러한 고정관념에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었다. 고 조승희 씨는 매우 조용했고 영리했으며, 그의 누나는 우수한 재원이었고, 그의 부모들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 내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모범적인 소수자’(Model minority)로 불리운다. 이것은 미국 내 다른 소수자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훨씬 강한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겉으로 긍정적인 평가처럼 보이는 이 신화 속에는 미국 내 차별적인 사회 구조를 영속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즉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영리하고 일을 열심히 하지만 조용해서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 ‘모범적인 소수자’라는 신화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의식을 얽어매는 덫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회의 문제점이나 모순에 대해 비판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문제가 많고 모순이 있는 사회 질서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맞추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존의 사회 질서에 맞추면서 가능한 한 미국의 주류 사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성공으로 여겨진다.

미국에 이민 온 한인들 대부분은 이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서 문제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여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하여 설혹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거기에 맞서 싸우지 않고 참으며 열심히 일만 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자녀들 뒷바라지에 힘써 그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이 신화 체계에는 애초부터 사회와 내가 소통하는 관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원칙적으로 개인이 사회의 틀에 맞추어야만 하는 일방성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불완전하고 모순이 있는 사회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거나 세상을 개혁하거나 변혁을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다만 내가 그 틀에 적응할 뿐이다. 적응을 잘 하는 것만이 성공이고 적응하지 못하면 실패로 평가된다.

사회는 개인과 소통하면서 개인이 바꾸어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열린 체계여야 한다. 우리가 단호히 ‘모범적 소수자’ 신화를 던져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침묵하며 순응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을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고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낯선 땅에 이민 온 사람들에게는 높은 언어적·문화적 장벽 때문에 세상과의 소통이 여의치 않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향한 변혁을 꿈꾸기는커녕 적응하는 것조차도 힘들고 어렵다. 고 조승희 씨의 경우, 소통이 없이 적응만이 강요된 세상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다가 더 이상은 자신을 맞출 수 없는 한계점에서 세상을 향해 폭발해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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