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대한 해법, 너무 상투적이잖아?
악에 대한 해법, 너무 상투적이잖아?
  • 김기대
  • 승인 2014.11.26 13:0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케빈에 대하여],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모른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을 당시 미국 평단의 많은 호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에서는 조지타운 대학 머렌 코리건 (Maureen Corrigan) 교수의  “반 도시적, 반 현대적, 반 페미니스트적 싸구려 소설”이라는 혹평도 있었다. 그 책을 소재로 한 시리즈 설교도 이곳 지면에 연재되었지만 나는 이 곳에서  ‘엄마를 놓아줘’라는 글로 신경숙을 혹평했었다. 당연히 시리즈 설교는 독자들의 호감을 샀고, 내 글에는 혹평이 많이 달렸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모성은 신성불가침한 본능으로 여겨진다. 모성이란 이름으로 자기의 삶을 희생당한 여성들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이 말이다. 모성 예찬론자들을 보면 원죄설은 모성도 비켜가는 것 같다.  

정말 모성은 존재하는 것일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 (린 램지 감독, 2011년)는 얼핏 보면 모성을 묻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어머니와 자식과의 관계를 통해 죄의 근원에 대해서  파고드는 영화다.

케빈 캐처도리언(Kevin Katchadourian, 에즈라 밀러 분)은 16세 생일날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죽인 후에 감옥에 수감된다. 여행작가였던 엄마 에바(Eva, 틸다 스윈턴 분)는 사고후 혼자 살며 마을의 작은 여행사에서 일을 한다. 케빈의 엄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적대적인 행동을 당해도 에바는 죄인이 된 듯 참아야 한다. 그러면서 에바는 케빈과 자신의 관계를 돌아 본다.

영화는 붉은 색으로 시작한다. 스페인의 토마토 축제에서 에바는 축제 군중에게 헹가래 쳐지듯이 높이 들려 축제의 기쁨을 만끽한다. 누군가로부터 높이 치켜 올려짐을 경험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드문 경험을 한 에바는 금방 축제 바닥에 내 팽겨쳐진다. 그녀가 성적 쾌감을 느낀 듯한 표정을 지은 순간은 찰나일뿐 사람들은 그녀를 버려둔 채 새로운 기쁨을 찾아 떠난다. 그녀는 쾌감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이 추억의 꿈에서 깨어났을 때 현실에서 그녀의 집에 던져진 빨간 페인트의 공격은 같은 붉은 색이 아름다운 추억과 악마같은 현실에서 전혀 다르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붉은 색이건 모성이건 추억이건 모두에게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에바는 따라다니던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를 갖게 되자 자유분방한 여행 작가의 삶을 유보하고 결혼과 가정을 선택한다. 그녀의 살아온 삶으로만 보자면 아이의 낙태, 또는 결혼은 하지 않고 아이만 키울 수도 있었겠지만 에바는 결혼을 선택한다. 토마토 축제에서 버려졌던 느낌을 기억하면서 순간의 기쁨보다는 지속적 기쁨을 주는 도구로서 가정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에바는 여행지를 택하듯 결혼이라는 여정을 떠나고 육아책에서 배운 대로 아이를 키우려고 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모성을 가져보려고 한다. 그러나 케빈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의 모든 경험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 성장대 별로 케빈이 엄마와 함께 있다. 이 포스터는 케빈에 대한 모든 짐을 엄마에게만 지우려는 사회적 폭력을 보여준다.

케빈은 자라면서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아무런 이유없이 비뚤어진 행동을 한다. 에바도 모성의 혼란을 느끼며 케빈을 자식이 아니라 짐으로 여기게 된다. 둘 사이의 어색한 모자관계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울거나, 괴성을 지르거나, 배변 훈련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케빈의 행동을 엄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마침내 말귀를 알아들을만한 아기 앞에서 에바는 말한다.

“엄마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괴물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케빈은 또래보다 늦게까지 기저귀를 찬다. 배변을 한 기저귀를 엄마가 갈아주자 말자 의도적으로 또 기저귀에 배변을 해버린다. 화가 난 에바가 아이를 내동댕이 치면서 팔이 부러지는데 병원에 다녀온 케빈은 천연덕스럽게 아버지에게 이야기한다. “엄마가 물휴지를 가지러 간 사이에 내가 테이블에서 실수해서 떨어져서 다쳤어.”  아이의 이런 언급은 엄마의 난처함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정서를 좌지우지하는 노련한 통제였다. 그날 이후 케빈은 기저귀를 뗀다.

계속되는 케빈의 이상한 짓에 대한 에바의 불평에 남편 프랭클린은 사내아이들은 다 그러면서 큰다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 들인다. 둘째 실리아(Celia)가 태어나면서부터 케빈은 활쏘기에 취미를 보이는데, 프랭클린은 아들을 위해 마당에 과녁과 장비들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실리아의 애완동물이 죽고, 하수구를 뚫는 독한 화약약품으로 실리아의 한 쪽 눈이 실명하자 에바는 케빈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에서 케빈은 그냥 악이고 용서되지 않는 원죄 그 자체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수많은 영화평들 대부분이 모성이 약한 엄마 에바의 잘못으로 케빈이 비뚤어졌다고 본다. 무책임한 감상평이다. 세상에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  때마다 젊은 날의 자유로움을 그리워하지 않는 엄마가 있을까? 추억까지 모성애라는 윤리로 탓하는 사람들은 모성애 없는 엄마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다. 영화는 회상으로 시작하지만 회상이 어떤 순서를 가지지 않고 뒤죽박죽이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에바의 표정이 항상 행복없이 어두운 듯하지만 에바의 얼굴이 잡히는 장면의 대부분은 케빈의 잔혹한 범죄 이후이다. 에바는 우리가 문화 속에서 규정한 그 ‘모성애’만큼은 아니어도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케빈에 대하여 할 만큼 한 엄마다. 누구도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 부유한 집, 평범한 집이지만 케빈은 식사 시간에도 엄마의 속을 긁어 놓는다.

아이 보다는 끊임없이 여행의 추억을 되살리는 엄마, 아이가 운다고 시끄러운 공사장에 가서 굴착음에 아이 울음을 묻어 버리는 엄마, 그 엄마를 향한 케빈의 소외감이 악마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모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더 추악한 엄마 밑에서도 착한 아이가 나오고, 천사 같은 엄마 밑에서 악마가 나오기도 한다.

오히려 ‘사내다움’을 내세워  폭력적 아들을 두둔하기만 했던 아버지, 폭력의 도구인 화살을 사주고 훈련시킨 아버지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찾아 보기 힘들다. 그 화살이 집단 살인의 도구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케빈의 폭력성의 원인을 엄마로부터 찾으려는 사람은 자신들이 에바를 향하여 폭력을 행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케빈의 엄마라는 이유로 행인에게 뺨을 맞아도 참아야 한다. 때린 그 사람은 실질적인 피해자의 가족이 아닐 것이다. 반면 케빈의 범죄로 불구가 된 학생은 오히려 에바를 위로한다.

이게 원죄다. ‘아담으로 인해 우리에게 죄가 들어왔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설명할 수 없이 인간은 죄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케빈은 회개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원죄, 근원적 악 그 자체고, 영화 밖에서 혹은 영화 안에서 에바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모두 죄의 책임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폭력을 행사하는 죄인들이다. 그의 아버지도 죄인이고, 에바도 물론 그렇다. 그런데 에바에게만 엄마답지 못함의 죄를 물으려 한다.

죄에 직면하라

르네 지라르는 원죄도 하나님을 닮으려는 인간의 모방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하나님은 본래 욕망이 없는 존재지만 사탄은 하나님도 욕망이 있는 존재라고 하와를 꾄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눈이 밝아질까 두려워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하나님의 욕망을 파악한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는다.

흔히들 욕망하면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물질에 대한 욕구로 좁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라나 선한 의지를 가지는 것도 욕망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중적 주체에 대해 고민한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자꾸 악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 일의 기준을 율법(통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도 나쁜 것이다.에바의 경우에 빗대어 말하자면 에바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케빈의 행동 앞에서 분노하며 자꾸 나쁜 엄마가 된다. 바울은 본래 선한 엄마라는 것 자체가 문화(율법)이 만들어 낸 인간 욕망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선한 것이 나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려고, 죄가 그 선한 것을 방편으로 하여 나에게 죽음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계명을 방편으로 하여 죄를 극도로 죄답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서 7:12-15)

 

어떤 문화적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일,  세상에서 지혜와 표적을 찾으려는 일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이것이 역사의 진보에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역사는 종말이라는  파국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영화에서 엄마다움의 결핍으로 케빈이 죄를 지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표적과 지혜를 찾는 사람들이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린도 전서 1:22-23)

아담과 하와의 죄는 스스로 지혜롭고 싶었던 것밖에  없다. 그들이 인류를 향해 저지른 무시무시한 죄는 똑똑해 지려는 죄였다. 다음에는 가장 가까운 사이끼리 책임을 떠 넘기려는 죄로 연결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죄를 유전시킨 근원적 죄치고는 참 하찮은 수준이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무시무시하게 말하지만 스스로  똑똑해 지고 싶다는 말(특정의 기준을 자기가 정하고 싶다는 말)에 다름 아닌 것이 원죄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는 세력이다. 바울은 로마제국을 죄의 지배세력으로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로마의 평화로 위장된 당시 세계의 모든 체계가 죄라는 말이다. 거기에는 철학이 있었고 예술이 있었고 남성다움이 있었고 여성성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교양이 있었다. 그런데 죄의 근원이라는 말이다. 안타깝게 죄의 근원을 파헤치기도 전에 기독교 공인 이후 그들의 죄를 묻지 않고 기독교 공동체안에 받아들인 데서부터 기독교의 타락은 시작되었다. 그래서 아우그스티누스는 실체적 죄가 없어진 상황에서 개념적 죄의 문제를 갖고 씨름한다.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알지 못한다

오늘날 죄의 사회적 형태인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동성애자들?  무슬림들? 북한 공산당들? 그래서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장해주자는 자리에 가서 행패를 부리고, 무슬림들의 폭력성을 과장하며, 북한이야말로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 될만큼 무서운 집단이라고 그들의 힘을 ‘고무 찬양’한다.  과연 그들이 근원적 악일까?

원죄로 인한 가장 무서운 악은 인간이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마지막에 에바는 케빈에 대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다. 엄마로서 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이 헛되었음을 인정한다.   면회가서 케빈에 대하여 비아냥 거리듯이 말한다. “이제껏 우울증약을 먹으면서(정신병으로 볌죄를 일으킨처럼 해서 죄를 감형받으려는 케빈의 의도) 잘도 버텨왔구나. 이제 18살이 되었으니 (무시무시한) 성인 감옥으로 옮겨 가겠구나!”라고 비아냥 거리듯이 말한다. 그제서야 악(케빈)은 자신을 제대로 본 에바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 에바와 케빈은 포옹으로 헤어지지만 아들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영원히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다.

세상의 모순은 그냥 그대로 존재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의 탓, 즉 엄마의 탓, 가정의 탓으로 돌리며 아버지의 권위라는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데 사용한다. 모순은 그대로 존재하는데 진보적인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적 탓으로 돌리며 악의 심원에 대해 회피하려고 한다. 죄는 선천적인 것이며 동시에 구조적인 것이다. 죄는 내면의 욕망(선한 욕망까지도)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내면의 욕망이 마음껏 보장받는 사회가 도덕 사회고 자본주의 사회다. 도덕 사회는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을 분별하는 척하고 자본주의는 선한 욕망(노력)의 결과로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르네 지라르가 말한 ‘낭만적 거짓말’이다. 악의 실체를 제대로 보고 조롱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십자가 보다는 사회의 통념과 성과 주의에 사로잡혀 아주 충실한 원죄(악)의 전달자로 살고 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카프카의 말을 빌어 “악은 선을 아는데 선은 악을 모른다”가 이 영화의 주제라고 말한다. 영화가 가진 종교성을 가장 잘 파악한 말이다. 케빈은 엄마를 잘 알고 통제한다. 율법(통념)에 사로잡힌 선들은 악을 너무 모른다. 마지막에 가서야 에바가 케빈을 아들이 아니라 악으로 인정할 때 악은 약해진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악인가? 나의 욕망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조의 집단적 죄로 옮겨가는 근원적 악의 실체를 발견해야 그들을 대처하는 지혜가 생겨난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감사 2014-11-29 02:55:11
감사하다는 말을 한번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