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에 시작한 새로운 인생
‘칠십’에 시작한 새로운 인생
  • 양재영
  • 승인 2014.12.12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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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기윤실, 유용석 장로 인터뷰(2)
반 년 후면 구십을 바라보는 유용석 장로의 지난 20년 간의 LA 기윤실 사역을 정리해보자는 기획안을 세웠다. 별로 한 일 없는 자신을 보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거절하는 유용석 장로를 어렵게 설득해 인터뷰했다. - 편집자 주
   
▲ 유용석 장로 © <뉴스 M>

유용석 장로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3살 때 중국으로 건너갔다. 북간도로 건너간 사람들은 대부분 먹을 게 없어서 건너간 사람들과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건너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은 군벌이 통치하던 시대였고,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던 흉흉한 시대여서 산속으로 피해 살던 시대였다.

“1920년대 말, 저는 어머니에 업혀 북간도로 이민 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찾아 만주로 떠났습니다. 당시 정착한 마을에는 마적들이 속출해 산속으로 피신해 들어가 이, 삼일 밥을 굶던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5살 때였는데, 배고픈 게 얼마나 처절한지 느낄 수 있었죠.”

유 장로는 당시 북간도로 가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던 기억때문인지 ‘눈물 젖은 두만강’을 평생 애창곡으로 불렀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진행해온 LA기윤실의 ‘동족사랑 나눔운동’이 모두 이 두만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3살 때 두만강 건너 북간도에 정착한 후, 21살에 해방되어 북한에 거주하다 1.4후퇴 때 월남했습니다. 아마 그 때 어린 나이에 겪었던 가난과 어려움의 경험들이 간접적으로 마음을 움직여 LA기윤실을 통해 동족돕기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식량난이 있기 전 북한엔 고아원이 없었는데, 수해로 인한 고난의 행군 시절을 겪고 북한 도처에 양로원과 고아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 중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실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 들었던 이야기가 결국 유 장로의 마음을 움직여 북한 관련 사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북한이 한창 어려울 때인 90년 대 말에 철광지역이었던 무산에선 북한 주민들이 배고프니까 광산에 설비들을 뜯어다가 중국에 팔았는데, 세관원들에게 덜미가 잡혀 총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무산 지역 노인들 60명이 자신들이 죽으면 아이들이 더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 같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정말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1996년 시작한 북한 어린이를 위한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이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LA와 중국에서 회령 출신의 탈북자들이 당시 ‘사랑의 빵’을 먹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유장로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사랑의 빵’ 운동 당시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사랑의 빵 운동을 하면서 한번은 월병을 실고 백두산 근처 삼지연이란 곳에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소학교 아이들한테 월병을 갖다 주려고 했었죠.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 버리는 헌 자전거를 밀수하는 일이 조선족 사이에서 성행했었는데, 중국정부가 그걸 막기 위해 도로를 차단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고 있는데, 두만강 건너편에 있던 인민군들이 손을 흔들면서 ‘먹을 것 있으시면 좀 주시라요’ 하는 겁니다.”

유 장로가 알겠다고 하자 20살 전후로 보이는 인민군들이 백두산 상류 자락에 위치한 15미터 정도의 얕은 강물을 건너 월병 한 상자를 받아갔다. 그 때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는데 그것이 퓰리처상 감이었다고 한다.

“우리를 조선족으로 안 젊은 인민군들이 월병 상자를 받아 강물을 건너면서 손을 흔드는 거예요. 그 때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그걸 신문 등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고 회원들 편지에만 실어서 보여줬습니다. 당시 한국일보에 정숙희 기자가 신문에 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제가 주지 않았습니다. 정숙희 기자와는 책 서평도 써줄 만큼 잘 아는 사이였지만, ‘퓰리처상’ 감의 사진을 외부에 알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지금 그 사진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 북한으로 보낸 젖염소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 병든 젖염소를 치료하고 있다. (사진 제공 LA기윤실)

이후, 유 장로는 1999년 두만강을 통해 ‘젖염소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젖염소 보내기 운동은 99년도 4월부터 시작했다. 당시 염소는 북한에도 많이 있었지만, 젖 잘나오는 염소는 거의 없었다. 유 장로는 젖염소를 통해 아이들에게 신선한 우유(염소 젖)를 공급하고 싶었다.

“‘젖염소 보내기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동기를 주신 분은 당시 연변여명농민대학 교수였던 최성원 교수이십니다. 그 분은 연변에 여명농민대학을 차려서 농민들 자녀에게 영농방법을 가르치시는 염소 전문가였습니다. 그 분은 황해도 분인데, 1.4 후퇴 때 남하해서 제주도에 정착해 젖 염소를 길러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들을 공부시키셨죠.”

최성원 교수는 1999년부터 젖염소 품종 선택, 구입 및 검역에 이르는 실제과정을 담당하며 LA 기윤실과 함께 북한의 식량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당시 북한 당국도 ‘풀을 고기로 바꾸자’는 취지 하에 젖염소를 통한 식량 문제 해결에 총력을 기울였다.

“젖 염소는 당시 북한 실정을 감안할 때 기르기에 가장 알맞은 동물이었습니다. 염소는 곡식 없이 풀만 먹고도 잘 사는 짐승입니다. 젖 염소는 질병에 강했고, 번식력이 왕성했으며(번식률 194%), 영양가가 월등했고, 다양한 부산물을 제공했었죠. 젖 염소는 하루 2-3kg의 젖을 짤 수 있었는데 그 정도면 한 가족 최소 식량이 될 수 있었습니다.”

1999년 젖염소 210마리가 평안남도 강동군 구빈리로 전해졌다.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던 구빈리는 젖염소를 통해 몇 년 후 가장 잘사는 마을로 변했다. LA기윤실이 돈을 대고 최 교수가 아이디어를 주고 해서 시작된 ‘젖 염소 보내기 운동’은 이후 대학생선교회(CCC)에 의해서 더욱 활성화된다.

“첫 해 한 5백 마리 정도 보냈습니다. 한 마리 보내는 데 운송비 등 포함해 300불 정도 들었으니, 1년에 10만불 이상 들었습니다. 북한당국도 젖염소를 통해 식량문제 해결에 총력을 기울일 정도로 젖염소 보내기 운동은 반향이 컸습니다. 이후 함경도 쪽으로 옮겨 회령, 정선 등으로도 확산되었는데, 북한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항구적 방안이라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지난 2000년도에 기윤실 회원들은 평양을 방문해 젖염소 공장과 인근 지역 아이들에게 나눠지는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4년전쯤 이 운동을 중단했지만 그 운동의 반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 LA기독교윤리실천운동 유용석 장로에게 북한에서 보낸 편지 (사진 제공 LA기윤실)

기윤실은 현재 800명 정도의 회원과 교회를 갖추고 있다. 1년에 3만 불 정도의 장학금을 조선족에게 주는 ‘대한장학회’ 사업도 벌이고 있으며, 여전히 연간 10만 불 정도의 ‘사랑의 빵’ 운동 성금이 모아지고 있다. 비록 중단되기는 했지만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 영농 사업을 지원하는 ‘고려인 돕기 운동’도 진행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유 장로는 투명한 재정 관리와 결산보고를 통해 얻은 신뢰가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빵’ 과 같은 동족사랑나눔운동 헌금은 전액 사업을 위해 사용해 왔습니다. 처음 시작할 당시는 저 혼자였기에 행정비 등이 필요 없었지만, 지난 5년 전부터 운영위원들이 돈을 내서 행정비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1년에 한번씩 신문과 소식지를 통해 예결산을 공고합니다. 우리자신이 깨끗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들에겐 돈을 보내도 딴 데 쓰지 않는다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대북선교를 하는 기독교 단체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LA기윤실을 통해 벌인 사업이 기독교 단체에 의한 사업임을 알고 있음에도 묵인해준 것은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기독교를 아주 싫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북한을 위해 돕고 있으니까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정치적 발언을 해선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접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진, 선봉지역에서 사람들이 전도하면, 그 날로 다 보고가 들어갑니다.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유 장로는 1년에 한번씩 후원해주는 회원들과 함께 가을에 한 번씩 북방 선교여행이라며 북한 여행을 다녀오고 있다. 지난 9월 초 거의 20년 가까이 해오던 선교여행의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LA 기윤실이 나진에서 직접 운영하는 빵 공장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두만강을 건너 도착한 북한의 나진시는 전보다 더 깨끗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표정도 한층 밝아 보였죠. 빵 공장은 아담하고 청결했으며, 잘 훈련된 여직원들이 새로 들여온 제빵기계로 빵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빵이 인근 유치원과 탁아소에 배달되어 아이들이 행복하게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내년 4월이면 그의 나이 아흔이다. 일흔이 다 되어 LA기윤실이라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시작하며 고군분투하는 동안 벌써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유 장로의 꼿꼿함을 가까이 지켜본 LA기윤실의 박상진 목사는 “유 장로님의 운동과 정신을 이어받아 다음 세대에도 꾸준하게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고 말하며 유 장로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양재영 기자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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