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그는 '하나님의 시험 문제'에 정답을 던진 사람
DJ, 그는 '하나님의 시험 문제'에 정답을 던진 사람
  • 김명곤
  • 승인 2009.08.22 0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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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미국인 지도 교수에게 '김대중 선수'를 소개한 사연

▲ 18일 아침, 찌는 듯 더운 날씨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곧 비가 오려는 모양입니다.
플로리다 열대야에 유독 잠을 설치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2009년 8월 18일 아침 6시, 고국에서 들려온 비보는 저에게 W.H. 오든의 시를 상기시켰습니다.

모든 시계를 멈추고, 전화를 끊어라
울부짖는 개들을 막아라
피아노를 멈추고, 드럼도 덮어라
관을 꺼내고, 조문객을 오게하라

비행기를 머리 위에 뱅뱅 맴돌게 하여
하늘에 휘갈겨 쓰노라. 그가 죽었노라고
거리에 하얀 비둘기들의 목에 타이를 매고
교통 순경들에게 검은 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북쪽, 남쪽, 동쪽, 서쪽이였다
그는 나의 일하는 주중과 일요일의 휴식,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말, 나의 노래 였다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이젠 별들도 필요없다. 다 치워버려라
달을 봉해 버리고, 해를 허물어 버려라
바닷물을 쏟아내고, 숲을 베어 버려라
이젠 어떤 것도 무의미해졌으니까

저는 18일 아침 플로리다 동녘 해를 바라보며 동네 한 바퀴 조깅을 하던 내내 'DJ가 죽었다, DJ가 죽었어'를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박정희가 심복의 흉탄에 죽은 뉴스가 온 천지를 뒤덮었던 날 아침 “삼촌,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는데 이제 누가 박정희 대통령 하는 거야?”라고 어린 조카 녀석이 질문했듯 저는 마음속으로 “그런데 이제 누가 DJ를 할 것인가”를 질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피자와 햄버거로 살이 오를대로 올라 조금만 뛰어도 숨을 헐떡거리는 아들 녀석을 보자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2살 반 때 아빠를 따라 미국에 와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고국 땅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로버트 리 장군은 알아도 김대중은 잘 모르는 불쌍한 놈.

로버트 리는 알아도 DJ는 모르는 불쌍한 아들놈

올해 24세인 제 아들놈은 남북전쟁 때 남부군의 리더였던 로버트 리 장군을 '존경하는 인물' 1순위로 꼽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자기 몸처럼 아끼며 사랑했고, 남북전쟁에서 패해 좌절감에 빠져 있던 병사들을 만나 "모두가 내 잘 못"이라며 눈물로 사과했고, 전쟁 중에도 병사들에게 '적군을 무조건 미워하지 말라, 그들도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선에 나와 있다'고 했다던 로버트 리 장군을 아들 녀석은 존경하고 있답니다. 불쌍한 녀석, 이놈아 너의 조국에는 로버트 리보다 훨씬 훌륭한 인물이 있단다.

1997년 12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저는 너무 기뻐서 "얘들아 짐 싸라, 우리 여행가자!"그러며 당일로 차를 달려 미시간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내내 저는 차 속에서 애들이 귀를 막던 말던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불러 제쳤습니다. 동요로부터 우리가곡 철지난 유행가는 물론 찬송가 심지어는 군가도 불렀습니다.

헉, 그런데요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마구 차를 몰다 올랜도에서 '한큐'로 1천마일이나 되는 미시간 이스트 랜싱까지 갔습니다. 새벽 1시쯤인가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이스트 랜싱의 미시간주립대학 부근의 모텔에 들어가서 저는 또다시 감동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마침 모텔에는 국제뉴스가 나오는 케이블 방송이 설치되어 있었는데요, 그 케이블 방송에서 김 대통령 당선자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도시락 점심을 들며 지지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IMF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놓고 시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튼 저는 너무 흥분하고 들뜬 나머지 지도교수와의 약속을 어기기까지 해서 쩔쩔맸던 기억도 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제 지도교수를 찾아갔는데요, ‘셔먼’이란 이름의 그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미국인 치고는 위압적이고 꼬장꼬장하여 구한말 조선 개방을 요구하며 해상시위를 한 미국 선박 '셔만호'를 연상케 했던 그 노인네 앞에 서면 저는 항상 쫄아서 그나마 부족한 영어가 더욱 죽을 쑤곤 했습니다.

그런데요 그 와중에 저는 느닷없이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에 모르겠다, 기분 좋게 여행 다녀왔는데 그 기분 여기서도 내 보자" 그런 심보가 발동했던 것입니다.

"에, 닥터 셔먼! 뭐 제가 이번에 약속한 만큼 논문을 진척시키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신나는 경기를 보다 그리 됐습니다."
"뭐라……. 신나는 구경거리?"
"예, 김득구 권투경기보다 더 감동적인 경기를 봤거든요"

박사님, '김대중 선수'를 아시나요?

셔먼 박사는 오래전에 김득구 선수가 미국선수와 혈투를 벌인 끝에 판정패했고, 안타깝게도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청년시절 헝그리 정신으로 동네 회관에서 권투를 배우기도 했다는 이 양반은 자기 생각에는 경기 내용으로 보아 김득구가 진 싸움이 아니었다고 김득구 편을 드는 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김득구의 투지에 찬 얼굴과 눈빛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이다호 감자바위 출신에다 돼지 농장 머슴 생활을 하며 고학으로 교수에까지 이른 고아출신인 이 양반은 김득구의 투지에 찬 눈빛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에, 닥터 셔먼! 그런데 오늘 제 얘기는 김득구가 아니라 김대중이라는 선수 이야기 입니다.
"흠, 김대중 선수라……. 잘 안 들어보던 선수인데 미들급인가? 헤비급?"
"(나도 모르게 머리 극적극적) 아 그게 아니고요, 이 양반은 한국의 정치인이랍니다."
"뭐라고……. 정치인 권투선수?"
"오, 노노노노 그냥 정치인데요, 김득구보다 더 투지가 넘치고 극적인 혈투를 벌인 선수랍니다."

지레 신이 난 저는 "김대중이 묶여진 채로 링 위에 올려져 일방적으로 이놈에게 맞고 저놈에게 맞고, 관중들도 '빨간 옷 입은 저놈 죽이라' 소리치고... 그래서 여러 번 쓰러질 듯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그랬는데요, 결국 은퇴할 나이에 일생일대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요지의 '김대중 전기'를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헉, 제가 미국 와서 그때처럼 영어를 길게 잘 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셔먼 박사는 제 '유창한 영어'에 신기했는지, 아니면 ‘이 치가 무슨 변명을 늘어놓는지 좀 더 들어보자’는 생각이었는지 안경 너머로 눈을 껌뻑거리며 제 얘기를 잘도 들어주었습니다. 아 그런데 제가 열을 내어 얘기를 하다 예기치 않게 잠시 눈시울을 붉히는 바람에 그가 당황스러워 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셔먼 박사도 마음이 움직여졌는지 "뭐 나도 김대중이란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런데 미스터 김, 그래도 논문은 써야겠지? 김대중 선수 때문에 이번엔 지나가지만, 다음엔 안 돼!"라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 아침부터 찌뿌등 하던 날씨가 계속되더니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었던 그해 겨울, 연례행사로 닥치던 감기도 오지 않았고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보낸 겨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은 이후로도 몇 번 더 닥쳤는데요, 김대중 대통령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훌쩍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정말 숨이 멎는 듯 했습니다.

아 성경 시편 33편 10절의 말씀이 그때만큼 저의 가슴을 찌르르하고 울린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분단은 하나님이 우리민족에게 주신 마지막 시험문제’라며 ‘이 시험문제를 잘 풀면 우리 민족이 승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쇠할 것이다’고 했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뇌성처럼 귓전을 때려 왔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그 유명한 ‘금언’도 떠올랐습니다.

“큰 뜻이 아니라 큰마음이 통일을 이룰 수 있다. 뜻은 큰 만큼 큰 분열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지만 큰마음은 모든 다른 것을 가슴에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슬픈 만큼 크다”

현실주의자 김대중은 미·중·일·러 열강이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우리민족의 장래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찍이 터득하고 ‘4대국이 보장하는 남북통일론’을 펼치기는 했으나, 이 조차도 우리 민족의 안위는 우리민족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위에 세워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진행을 믿는 독실한 신앙인인 김대중의 정치 역정을 살펴보면 ‘사상이 민족에 우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신념으로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려는 야욕에 차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김대중은 20세기 말에 받아놓은 '하나님의 시험문제'를 50년 동안 풀지 못하고 끙끙대던 우리 민족에게 ‘그거 간단하다’는 듯 선뜻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기독교인 장로 이승만이 북한을 ‘설복할 수 없는 마귀’로 단죄한 이래 대화나 협상을 주장하는 그 어떤 통일론도 ‘감상적 통일론’으로 치부되었고, 이를 주장하던 김구·김규식·여운형·문익환 등이 ‘좌빨’로 내몰려 형극의 길을 걷는 것을 보아 왔으면서도 김대중은 ‘바보야, 문제는 대화야!’하고 줄기차게 외쳐왔던 것입니다. 결국 오랫동안 홀대를 받아 온 ‘감상적 통일론’은 ‘보다 많은 접촉’, ‘보다 많은 대화’, ‘보다 많은 협력’을 실행 요체로 하는 햇볕정책이라는 정장을 입고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6.15 선언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김대중이 그렇게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민주화 운동조차도 민족의 염원인 통일로 가기위한 ‘로드 블록 치우기’였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는 ‘사상의 자유 시장’을 갖추어야만 통일에 대한 이런 저런 토론이 가능할 것이고, 자신감을 갖고 주변 열강의 협력을 구하고 북과의 대화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기에 김대중에게 민주화는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김대중은 오래전부터 민족 통일에 대한 슬픈 염원이 있었고, 초기 정치 입문 과정에서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큰마음’은 과거 김구 선생이 민족의 통일을 위해 품었던 것과 같은 ‘슬픈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민족문제는 머리를 굴려서 푸는 게 아니라 감동으로 풀어야 한다'는 한 감상적 통일론자의 결단은 50여 년 동안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봄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사력을 다한 김대중

김대중은 정녕 20세기에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리신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사력을 다한 선수였고, 마침내는 그 정답으로 햇볕정책을 당당하게 내놓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고문하고 죽이려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포용한 진짜 '예수쟁이'였던 김대중에게 햇볕정책은 신앙고백이었고, 공인 김대중에게는 민족 구원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그가 북한을 방문하여 '원수'를 포옹한 2000년 겨울은 정말 따뜻했고, 그 온기는 임기 마지막 날까지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백성 모두를 따듯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온기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아 그런데, 2008년 1월부터 불기 시작한 찬바람, 김 대통령조차도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한탄 했다던 그 찬바람… 폭염의 플로리다에서도 느껴지던 으스스한 냉기를 쐬며 그렇게 김 대통령은 가셨습니다.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진 가나안 땅을 숨 막히게 바라만 보다가 숨을 거둔 모세처럼 김 대통령이 가셨습니다.

어느 날 우연처럼 다가온 노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김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어찌해야 할까요. 얼마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으면 소설가 이외수는 “이제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버릴 일만 남았다”고 외마디를 내질렀을까요. 저 또한 "하나님, 그래도 우리 민족에게 존경할 만한 인물 하나쯤은 남겨두셔야지요, 이거 정말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고 읊은 한용운 님의 시를 떠 올리면서 남은 자들의 과제가 무엇일지를,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낼지를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통일운동의 선각자 문익환 목사님은 일찍이 “역사의 우연은 과제를 안겨준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만난 ‘역사의 우연’,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은 저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각성한 한국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를 안겨 주었습니다.

노·김 대통령이 초석을 다진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데 이젠 우리 스스로가 나서야겠습니다. 서로의 위치에서 '통 큰 마음'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겠습니다.

▲ 한참 비를 뿌린 하늘의 한쪽에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 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되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 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김명곤 / <코리아위클리> 발행인, <미주뉴스앤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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