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를 아우르던 별이 지다
좌우를 아우르던 별이 지다
  • 김기대
  • 승인 2015.01.15 15: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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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목사 뒤이을 사람이 없는 현실이 아플뿐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장로교(PCUSA) 제212대 총회장을 지낸 이승만 목사가 미국 동부시간으로 14일 오전 4시 별세했다.(향년 83세). 미국 장로교 한인 목사들에게 이승만 목사가 급성 암으로 투병중에 있으니 기도를 부탁한다는 이메일이 회람되기 시작한지 몇 주만에 전해진 비보다. 'PCUSA 교단 홈페이지는 PCUSA는 전 총회장이자 에큐메니칼 지도자였던 이승만 목사의 별세를 슬퍼한다'며 기사를 실었다.

 http://www.pcusa.org/news/2015/1/14/pcusa-mourns-former-moderator-syngman-rhee/

1931년생인 이승만 목사는 평양에서 목회를 하던 이태석 목사와 김송희 사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방 이후 평양에는 장로교의 평양신학교 외에 감리교 계통의 성화신학교가 있었는데 이승만 목사는 성화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18세 이하에게는 종교 교육을 시킬 수 없다는 북한의 방침에 따라 성화신학교는 고등성경과라는 편법으로 학생을 받았는데 한국전쟁 발발으로 폐교되고 말았지만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2대 교장이었던 고 박대선 목사는 연세대 총장을 역임하다가 유신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교수(김찬국 김동길)를 해임하라는 정부의 방침에 맞섰다가 총장직에서 물러 났다. 조직신학자였던 고 변선환 목사(감신대 교수 역임)도 성화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유명 부흥사인 신현균 목사, 디트로이트 감리교회를 개척한 윤영봉 목사도 성화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목사의 부친 이태석 목사는 한국전쟁 전 평양에서 순교당했는데 당시 10대였던 이승만 목사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도들이 왜 핍박을 받아야하며 순교를 당해야하는지" 울부짖었었다고 한다. 이 때 이목사는 “49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더 큰 이유가 있느니라! 나의 일을 다하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야되지 않겠느냐!”는 나즈막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1950년 19세때 두 살 아래의 동생만 데리고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월남한 이승만 목사는 해병대 6기로 입대한 후 미해병학교로 파견되어 위탁교육을 받는 기회를 얻는다.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영어를 익힌 그는 귀국후 중앙신학교(지금의 강남대학교)를 마친뒤 1956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루이빌 신학교에서 M Div.를 마치고 1960년에 연합장로교회(지금의 PCUSA) 목사로 안수를 받은 이승만목사는 시카고 신학교에서 종교사회학으로 박사학위(Doctor of Religion)를 취득했다.

화해의 사도가 된 이승만 목사

이목사는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때 그들과 함께 흑인차별법을 개정하기위한 데모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흑인인권운동을 하면서 마틴 루터킹목사의 ‘억압받는 자들에게 원수를 갚을 가능성과 용서를 하는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사상에 감명을 받게 된다.  

이승만 목사는 아버지의 순교로 인해 북한 정권에 적대적이었지만 흑인민권운동의 경험은 그에게 민족 화해라는 새로운 비전을 심어 주었다.

1973년에 연합장로교단 총회 세계선교부 직원이 된 이목사는 25년동안 중동지역 선교책임자로, 아시아지역 선교총무로, 세계선교부의 부총무로 사역했다. 특히 북한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1978년부터 여러차례 평양방문을 하면서 교회재건과 남북 화해운동을에 앞장 섰다. 무엇보다도 평양 봉수교회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 2014년 마지막으로 방문한 평양 봉수 교회 앞에서(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승만 목사). 사진제공 :최재영 목사

1992년-93년도에 NCCUSA(미국기독교 교회 협의회) 회장으로 역임하고 있을때 클린턴 정부하에서 백악관 종교 자문위원으로 일을 하면서 남북화해와 북미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전달하기도 했다.

1997년 이승만 목사는 고 도안스님, 양현승 목사 등과 함께 미주종교평화협의회를 창설해서 종교간의 평화 운동 등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앞장섰다. 평소 고인과 가까이 지냈던 양현승 목사는 본지와의 전화에서 “지금처럼 남북 및 북미 관계가 벽에 부딪혀 있을 때 그 분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한데 이렇게 가버리셨다”며 안타까워 했다. 양목사는 “이목사님이야 말로 미주 통일운동계의 좌우를 모두 아우르던 분이였기에 그 분의 빈자리가 당분간 크게 느껴질 것”이라며 거듭 이목사의 별세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양현승 목사의 지적처럼 이승만 목사는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골고루 존경을 받던 화해의 사도였다. 그 역시 북한 정권에 의해 부친을 잃은 사람이었지만 적대감 보다는 북한의 개방과 원조에 앞장섬으로써 그리스도의 평화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최근 대한민국 정부의 종북몰이와 일부 노인들의 결탁, 보수교회의 서슬퍼런 반공의 저주 등은 이승만 목사의 삶으로부터 많은 점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들은 북한의 인권을 외치지만 이승만 목사야 말로 교회를 세우고 물자를 원조함으로써 실질적인 북한 주민의 인권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생전에 이목사는 북한의 인권 상황에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는 것은 보수 세력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나 미주 교민사회의 여론이 남북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때에 이승만 목사처럼 좌우를 아우를 수 있는 차세대 교계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수’라는 진영은 천박한 교회 성장 이론이나 북한에 대한 공격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진보’ 진영은 치졸한 종북물이 속에서 행보가 많이 위축되어 평화를 향한 진의 조차 왜곡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83세, 적지 않은 나이지만 더 할 일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분의 별세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솔직히 이제 그분의 빈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가 남은 사람들에게는 더 큰 걱정으로 남는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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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5-01-19 11:15:44
이승만 목사님은 남북화해의 큰 별이셨습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휴먼 issue는 하나님의 issue"라는 말로 기독교인들이 사회문제에 왜 참여해야 하는지를 설파하셨지요. 특히 "한민족은 분단된 채 불명예스럽게 살 민족이 아니다"며 민족의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걸 매우 아파하셨지요... 목사님의 별세가 참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목사님은 하늘에서도 우리 민족의 화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실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