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반도 통일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반도 통일
  • 성정모
  • 승인 2015.01.23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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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하나님 선포와 화해의 신학
   
▲ 성정모 교수

무엇보다도 먼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저의 생각을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실 저는 이 초대에 쉽게 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48년 전에 한국을 떠나 이국 땅 브라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주제에 대하여 깊은 연구나 토론을 해 온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초대에 응하게 된 것은 한반도 통일이라는 주제의 발전적 토론을 위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무엇인가 공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신학에서 화해와 대화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강연을 통하여 제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듣고 배울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화해 측면에서 바라본 통일"

한반도에서의 통일의 문제는 매우 다양한 영역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법적인 영역은 물론이고 그리고 사회적 문제와 주관적인 문제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사회적 그리고 인간적인 영역에서 통일은 같은 민족이 오랜 세월동안 분단되어 있었다는 현실적 도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신학자로서 통일의 주제를 화해의 측면에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교회와 신학은 화해의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공헌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화해의 과정은 우선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첫 단계는 통일 이전의 단계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기독교회는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압력을 증가시키는데 공헌 할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도 공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정치적 통일 이후의 시기를 말합니다. 물론 정치적 통일은 남북 모두에게 용이하게 이루어질 일은 결코 아니며 또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더욱 더 아닐 것입니다. 통일은 냉전의 결과로 60년 이상을 분단 상태로 살아온 민족들의 주관적 상황의 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국사회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저는 전쟁 이후인 1957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1963년 6월 25일의 일인 것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른들이 6.25 전쟁의 참혹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왜 내가 그날 혼자 저의 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아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저의 어머니는 마침 짐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6.25 라는 것이 과거에 발생한 전쟁이라는 것에 대하여 강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의 의식 속에서는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고 언제든지 폭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짐을 정리하는 것을 보면서 겁이 났습니다. 저는 그날 하루 종일 공포에 젖어 지냈습니다. 서울을 떠나 피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말이지요.

저는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전쟁에 대한 공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의 전쟁 소설이나 전쟁 영화들은 우리로 하여금 전쟁에 대한 공포와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쟁에 대한 공포와 기억은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에게 잠재의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북한 사람들의 의식에 대하여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북한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강연에서 저는 오히려 남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집중해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분노의 감정과 그의 결과는 냉전 시기에는 반공의식교육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강화되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구소련의 붕괴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그 기능을 지속적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 판단에 있어서 최대의 이익창출과 최고의 효율성을 절대적인 가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와 시장 체제는 한 사회에서 가난한 자들이나 혹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개인 기업들과 시장의 법칙에 대하여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려는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두 종류의 그룹을 자신들의 체제의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곤 합니다. 바로 노동조합과 인권보호에 헌신하는 교회들입니다. 많은 지역에서 특별히 남한에서는 이 두 그룹을 공산주의와 연결함으로서 북한의 위협과 연계되어 있다는 인식을 형성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것은 남한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적색공포”는 신자유주의의 빠른 도입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게 된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줌에 있어서 “희생양”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적색공포”는 위에서 말씀드린 공포와 분노에 의해 발생되는 염려와 걱정을 확대 생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북한과 화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들"

북한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조정하기 위한 사회적 통제도구가 되었으며 공포에서 벗어나서 그 적에 대한 복수심을 갖게 만드는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냄은 기업 내부의 통제와 그리고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정당화 되어질 수 없는 희생을 강제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북 갈등이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상황이 독재는 물론 부의 집중을 초래하는 경제체제의 강제적 도입, 그리고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권리와 민주투쟁에 대한 억압들에 대하여 우리 모두를 익숙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적을 대항하는 투쟁이 인권의 이름으로 인권침해를 정당화 시켰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포와 분노의 감정과 더불어 복수에 대한 열망 등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 남한민중들로 하여금 북한 민중들과의 화해의 과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합리적으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통일은 필요한 것이며 그리고 여기에 찬동을 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단지 이성만 가지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근대 서구사상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이성이 말하는 대로 살아간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증명해 낸 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감성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감정상태가 이성적 과정의 방향과 한계를 결정짓습니다. 두려움의 감정 상태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것들과 새로운 경험과 도전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교리적인 형태의 사실에 더욱 매달리게 되고 그것을 확정하려고 하며 또한 현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안정을 위하여 현 상황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통일에 대하여 찬동을 표하면서도 그것은 오늘이 아닌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성적으로는 오늘 이루어져야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공포의 감정입니다. 이러한 공포에 지배되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통일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의 시작을 위한 그 어떤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공포의 감정에 비해서 월등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전쟁의 피해와 그리고 냉전적 사상은 독재정권과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하여금 남한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의 근본적인 책임은 북한이라고 규정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남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갖는 것이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러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의 측면에서 남한과 북한이 크게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남북한 문제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만들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오직 “쳐부셔야 할 적”으로만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시간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제사이에서 폭력의 반복을 만들어 내는 복수의 감정에 의해 발생하는 폭력은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가인에 대한 복수를 금지하기 위해 사건에 개입하십니다. 폭력에 의해 또 다른 폭력의 발생하는 폭력의 순환적 고리를 끊기 위해서 개입하십니다.

"죄책감과 보상 이데올로기"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복수의 감정과 더불어서 이해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요소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죄책감입니다. 매우 심각하고 오랫 동안 지속되는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그에 대한 설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사건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그 의미를 전체적인 사건 안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전쟁은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우리의 삶에 고통을 초래하는 사건입니다. 전쟁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사람에게 그 사건은 인생에서 발생하는 인과응보 혹은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것은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되어 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사건, 다시 말하자면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되어 질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죄책감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인생에서 발생하는 많은 비극적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했어야만 했다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현재의 삶 혹은 전생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갚음이라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많은 구체적인 설명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에 당면해서 갖게 되는 죄책감입니다.

이러한 죄책감은 사건의 당사자인 자신 스스로의 존재를 억압하고 마비시키는 공격적 과정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근본적’ 죄책감은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 그리고 억압을 정당화 시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인이며 그리고 무엇인가 잘 모르지만 무엇인가를 갚아야 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현재 당하는 고통으로 갚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많은 경우 종교의 교리들은 죄책감이나 정화예식 혹은 희생을 통하여 “갚음”의 필요성의 강조에 대한 정당화 혹은 그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 뒤에는 죄에 대하여 완벽한 갚음을 요구하는 전지전능한 재판관으로서 또 반면에 신성한 법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는 완벽한 복의 배급자로서의 신 혹은 신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상이데올로기는 기독교 신학은 물론 카르마를 말하는 다른 종교의 신학 안에서도 발견되어집니다.

죄책감의 결과로서의 자신에 대한 공격성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유발시키고 있다고 간주되는 적을 향하여 발산되어집니다. 위에서 언급한 예의 경우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그 모든 책임을 적에게 돌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모든 분노와 죄책감 그리고 복수의 열망을 마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적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은 자신의 삶을 괴롭게 하는 일에 대한 죄책감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적으로 향한 죄책감의 전가는 빚 혹은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는 신적인 재판관이 존재한다는 논리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해는 복수-정의 논리가 아니다"

나는 가부장적인 한국 문화에서 주로 여성들이 이러한 죄책감을 자신 스스로에게 전가하는 모습을 보여 왔으며 남성들은 이것을 다른 대상에게 전가해 오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후 자본주의 문화의 도입과 더불어서 한국 사회에 경제적인 요소가 새롭게 첨가되어집니다. 이제 부유한 여성들은 가난한 남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가난한 남성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공격성을 가난한 여성들을 향하여 행사합니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북한을 ‘희생양’ 삼습니다. 모두의 죄책감, 분노 그리고 복수의 감정들은 북한을 향합니다.

이러한 성찰을 통하여, 나는 고통, 복수의 열망 그리고 죄책감으로 인하여 상처받은 남한 민중들의 집단무의식을 ‘치유’해야 하다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회와 신학은 긴 치유의 과정에서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이로한 치유의 과정 없이 화해 –단순한 정치적 그리고 법률적 통일을 넘어서서-는 힘들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치유’의 과제는 남한 민중들의 삶에 대한 매우 ‘실천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미 본 강연의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열기 위하여 몇 가지 성찰의 내용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화해는 ‘복수’의 개념에서 이해되는 정의의 개념을 넘어서는 행위입니다. 복수는 우리를 향한 상대방의 행위의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수의 문제는 우리가 대가를 치르게 만든 상대방이 결코 자신이 치룬 빚 갚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그것을 자신이 당하고 있는 불의라고 믿게 하며 또한 그에 대하여 다시금 복수의 열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수와 정의의 차이가 매우 미묘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의는 복수되어질 수 없는 복수입니다. 정의는 복수-정의의 관계 안에 있는 당사자들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복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적 체재는 많은 경우 종교 영역이 제공하는 상징이나 혹은 의식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화해는 정의-복수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책감과 복수의 열망을 해소하는 용서의 논리입니다.

남북관계와 관련해서 우리의 집단적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죄-복수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고통, 죄책감 그리고 부채징수의 개념으로서의 정의의 의미의 저변에 깔려 있는 ‘신’의 개념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법의 이름으로 잔혹한 희생의 지불을 요구하는 신들은 세상의 전제적 권력과 연계되어 있는 전제군주적인 초자아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해준 아가페 사랑의 하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고 연약한 상태로 있었을 때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함으로 인간과 화해를 이루신(롬 5:5~11) 그 하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 호세 콤블린(Jose Comblin)

위대한 해방신학자의 한 사람인 호세 콤블린(Jose Comblin)은 바울의 신학에서 화해의 주제는 매우 ‘객관적인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원수 됨을 버리고 친구로 변화되어진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인하여 발생한다. 인간은 이러한 행위를 유발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넘치는 자유로운 행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바울은‘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롬 5:10~11)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 콤블린,‘화해의 신학’ 페트로폴리스, 보세스 출판사, 1987, 17~18쪽)

‘객관적 사실’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동 혹은 수용여부와는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인간과의 화해에 있어서 오직 우정과 사랑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대가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책감 혹은 부채에 대한 부담감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우리 자신 스스로가 그 일에 대한 죄가 있는 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형이상학적인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유발시키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 혹은 종교적 가르침도 하나님의 지혜안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콤블린(Comblin)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고후 5:18~19)라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화해는 복음의 근본적인 목적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이 좋은 소식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로 인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 더 이상 염려와 죄책감은 우리의 삶에 자리 잡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억압하고 벌을 주는 그러한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콤블린, 위의 책 18쪽) 그러므로 죄책감에 의해 유발되고 있는 우리 자신 스스로나 혹은 우리의 적들을 향한 공격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용서를 통한 화해와 통일"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죄책감은 의식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격성으로 뒤 덮여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과 양심을 왜곡되게 만드는 분노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러한 감정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깊은 아픔과 자신 스스로를 향한 공격성과 그리고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억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죄책감이 그 방향을 바꾸어서 치유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빛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화해를 제시해 줍니다. 그리고 그 화해는 죄책감을 빛으로 인도해 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죄책감을 직면할 용기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대한 의식을 갖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로 하여금 아픔과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자신 스스로와 화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격성을 해체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로 인한 의식의 마비상태와 분노의 혼란된 상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비로소 한반도의 통일의 과제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는 모든 복수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며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가르침대로 “원수사랑”의 과제를 수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원수사랑은 단순한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의 문제입니다. ‘원수사랑’은 상대방이 나를 반대하고 있거나 혹은 상대방의 이익이 나의 사회적 이익과 위치의 대척점에 있거나 하는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원수사랑은 증오가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게 하거나 혹은 파괴시키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그리고 우리의 원수 모두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와 ‘우리의 원수’에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국제관계에 있어서 서로 반대되는 지정학적 위치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인간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고귀한 인간성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 같은 두려움과 아픔과 고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남북한 민중들이 오랜 시기를 통하여 같은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며 살아왔음을 보게 됩니다.

복수와 죄책감의 논리로부터 해방되어 질 때 우리는 화해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상대방이 나와 화해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나의 화해의 시도를 통하여 자신 스스로와 먼저 화해를 이루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서 죄책감과 증오로부터 치유됨으로서 내 자신이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치 사회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을 위한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공포를 주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잘 모르는 세계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내면화 되어 있는 냉전의식과 신자유주의에 반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해를 주장하는 우리들은 이러한 현실과 무의식적인 공포의 현존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반대되지는 않지만 우리 앞에 새롭게 열리는 대화와 화해의 길, 지금까지 걸어보지 못했던 길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신앙의 증언을 통하여 공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교리를 믿지 않았음을 질책하지 않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믿음이 적어서 두려워하고 있음을 질책합니다.

신앙의 증언, 새롭게 열려지는 길을 걷고자 하는 용기, 화해의 경험 그리고 우리를 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희생과 복수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그와 아직 원수 되어 있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일들을 통하여 기독교는 화해와 통일이라는 거대한 민족의 과제를 위한 공헌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합니다.

성정모 교수/ 브라질 상파울루감신대 인문법대 학장
7살 때 부모를 따라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성 교수는 해방신학의 지평을 ‘인간의 욕망 문제’로까지 넓힌 선구적인 2세대 해방신학자로 평가된다. 가톨릭신자인 그는 브라질 최대 빈민촌인 자르징안젤라시의 산마르티네스 교회 등에서 해방신학 모임을 이끌었고, 상파울루의 떠오르는 별인 이바브침례교회 키비츠 목사 등 많은 목사들에게 해방신학을 가르쳤다.
번역: 홍인식 교수/ 멕시코 장신대 교수 

이 글은 지난 해 10월에 있은 성정모 교수의 한국 순회 강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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