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신학’은 세계를 구원하는 신학이다
‘온신학’은 세계를 구원하는 신학이다
  • 양재영
  • 승인 2015.02.06 03:44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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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용 총장, 미주장신대 공개강연 가져
지난 4일(수) 미주장로회신학교에선 한국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인 김명용 교수를 강사로 2015년 봄학기 특별공개강연을 가졌다. 조직신학자이자 칼 바르트 연구로 잘 알려진 김명용 교수의 ‘온신학(Holistic Theology), 21세기의 통전적 신학을 향하여’라는 주제의 강연을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저는 ‘온신학’(Holistic Theology)이 세계를 구원할 신학이라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온신학’은 교회를 참으로 살리는 신학이자, 세계를 살리는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국과 유럽 등의 전 세계를 다니면서 많은 석학들을 만나고 대화했지만 ‘온신학’보다 위대한 신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유럽의 신학이 가장 앞서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럽의 수많은 신학자를 만나면서 오히려 우리보다 신학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약점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이성의 틀 위에서 발전하다 보니 초월적 차원이 많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초월적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신학인데, 유럽의 신학이 초월적 차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근본주의라는 수준 낮은 신학이 휩쓸고 있습니다. 근본주의 신학은 성경이해의 기본도 안되어 있는, 성경 안에 있는 역사적 요소와 같은 것들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또한 그들의 신학은 성차별 신학입니다. 총신 계통은 여성안수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성 안수만 허락하지 않는 게 아니고 세계관 자체가 성서시대의 과학에 묶여 있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현대인들과 시대적인 차이가 벌써 2-3천년 간극이 벌어져 있는 시대착오적 신학입니다.

중국교회를 보면 참 빨리 발전하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중국교회를 보면서 걱정도 되는 것이, 그 가운데에는 근본주의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중국민족의 정신을 바르게 개조하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21세기 세계평화를 위해서 엄청나게 중요한데, 수준 낮은 근본주의나 사이비가 영향을 미쳐 세계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아프리카, 중미, 남미 등을 보면 편협하고, 극단적인 신학이 미치면서 신학의 공백이 굉장히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제가 온신학을 빨리 발전시켜서 전 세계로 확장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김명용 교수 © <뉴스 M>

그럼 ‘온신학’이 무엇입니까? 온신학은 온 세상을 위한 온전한 신학입니다. 반달, 온달 있는데, 온달은 충만한 달입니다. 신학 중엔 반쪽짜리 신학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신대원다닐 때 아주 유능한 클레어몬트 신학교(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 계셨던 존 캅(John B. Cobb Jr)교수께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벅찬 가슴을 가지고 미국의 새로 발전된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에 대해 감격에 찬 마음으로 강연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정신학이 교회를 살려낼 수 있을까요? 배울 것도 있고, 좋은 점도 있지만 교회로 끌고 오면 교회가 무너질 것입니다. 과정신학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무엇을 구원하실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과정신학의 하나님이 교회 현장과 성도들의 삶의 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더 이상 성도와 교회, 세계를 살리기 위해 미국, 유럽의 신학에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만난 하나님을 신학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의 신학의 수준이 떨어져 미국이나 유럽의 멸시를 당했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박형룡의 반쪽짜리 신학”

온신학은 130년 한국교회의 신학의 정점입니다. 130년 동안 한국에 무수한 신학이 다 들어왔는데, 그 신학들의 높고 낮음과 싸움 속에서 만들어진 신학이 온신학입니다.

사실 한국교회 역사에서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근본주의신학입니다. 우리는 박형룡 박사를 위시한 근본주의 신학자를 ‘보수’라고 하는데 저는 그게 맞는 단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라 개화가 덜 된 사람들입니다.

박형룡의 근본주의는 오직 전도의 신학, 영혼중심의 신학입니다. 이는 역사에 대한 비판주의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역사는 자꾸 나빠져 장차 이 세상이 망하다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엉터리 해석을 통해 나온 신학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본도 모르는 신학입니다.

박형룡의 신학은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오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입니다. 박형룡은 역사가 발전해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자유주의에 반대해, 역사가 완전히 망해 마귀가 지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장차 망할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해 천당에 보내는 것, 오직 전도뿐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신학은 반쪽짜리 신학일 뿐입니다. 개인만 구원하는 게 아닌, 온 세상을 구원하는 우주적 차원의 신학이 필요합니다. 이런 박형룡의 근본주의 신학은 역사 책임적인 교회를 만드는데 실패한 신학일 뿐입니다.

유신이나 군사독재 시절에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민주인사들 가운데 박형룡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박형룡의 근본주의에서는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역사 속에서 마귀 통치를 몰아내고 의의 통치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일한 민주인사의 3분의 1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는데, 그분들은 거의 다 다른 전통에서 그들의 정신을 형성했습니다.

“개인의 축복에 머문 조용기의 삼중 축복”

조용기 목사의 ‘삼중 축복의 신학’은 근본주의와는 조금 다른 신학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1:2)는 구절은 그냥 인사말인데 너무 많은 의미를 집어넣었습니다.

조용기 신학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영혼의 죄를 속량하는 기능에서만 이해한 게 아니라, 구체적 삶과 연결해서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구체적 삶과 연결시켜 질병, 가난을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질병과 가난에서 해방된다는 조용기 신학은 일종의 ‘삶의 신학’이었습니다.

오순절주의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배경에는 ‘영혼 신학’과 다른 ‘삶의 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박형룡의 영혼 신학은 희망을 주지 못했고 오직 천당에 가야 희망이 있었는데, 조용기의 삶의 신학은 예수 믿으면 질병,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구체적 삶의 구원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복음은 실제 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과 질병 등의 구원자이십니다. 저는 교인들이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엄청난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처참한 고통에서 건져내신, 종국에는 죽음에서도 구원해내신 어마어마한 구원자라는 것을 제대로 전하면 교회가 혁명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목사들이 이러한 복음을 제대로 설교하지 않고 있습니다. 설교를 제대로 하면 그 순간 감격과 엄청난 구원의 소식이 올 것입니다.

그 구원의 기쁨의 소식이 조용기를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그게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삼중축복의 신학은 온전한 복음에 도달하진 못했습니다. 개인의 축복이란 영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역사적 차원으로 확대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방법론적인 면에 있어서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었습니다. 기적적인 것도 있지만, 조금씩 설득을 통해 나아가면 좋은데, 하나님의 사역을 특수한 쪽만 바라본 온전하지 못한 신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 안병무 박사와 서남동 교수

“민중신학은 부활신학이 없다” 

민중신학은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범세계적으로 사회나 정치 속에 내재된 사탄적인 것들에 대해 인식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발전한 민중신학이 교회신학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심각한 결함이 있는데, 바로 속죄론이 없다는 점입니다. 안병무 박사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속죄의 죽으심이 아닌 하나의 민중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의 의식이 갈릴리에서 다시 살아난, ‘육체의 부활’이 아닌 ‘정신의 부활’로 봤다는 점입니다.

종교다원주의나 민중신학은 부활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것들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희망이자, 부활의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구체적 삶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부활은 육체가 아닌 의식의 부활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장신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 학생이 채플 시간에 ‘작은 예수 전태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고 기도해서 교수들을 경악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학생들에게 기도문을 검열하게 되었습니다.

전태일의 정신이 한국 민중운동 속에 살아 옮겨져 거대한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이 전태일의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작은 예수 전태일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신학이 아무리 사회적, 역사적 책임이 있다 해도 한국 교회에 뿌리 내리긴 어렵습니다.

민중신학에는 삼위일체론도 없습니다. 민중신학의 서남동 교수는 우리나라 민중의 이야기와 성경의 이야기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탈성서화’란 말을 썼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얼마든지 성경과 같은 이야기가 있기에, 굳이 성경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중신학 안에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구원론이 있습니다. 민중이 의식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민중이 구원한다는 것은 곤란한 주장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 안에 존재하는 뭔가를 극대화시킨 것을 기반으로, 민중 스스로 구원한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이 계실 자리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서서 세계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오만 속에 문제가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거리가 멀지 않은, 해방신학과 맥을 같이 하는 문제로 주객이 전도된 경우입니다.

“온신학의 7가지 특징” 

그럼 ‘온신학’의 특징은 무엇이냐? 그 특징을 7가지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로, ‘온신학’은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종교다원주의, 민중신학, 철학적 신학 가운데도 삼위일체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위일체론을 초대교회가 발전시킨 사변이라고 말하는 신학생이 많은데, 그들은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삼위일체가 정초되는 자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였습니다. 이게 떠나버리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종교학과 철학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가 정초하고, 신학이 정초하는 자리입니다. 이후 기독교는 325년 니케아신조(The Creed of Nicaea)가 발표되면서 일신론과 결별합니다. 기독교는 일신론이 아니라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니케아신조의 핵심은 야훼 하나님 외에 똑같은 본질과 신성을 가진 분이 계신다는 것을 반포한 것입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신조가 반포되면서 우리의 예배와 경배를 받으시는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반포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는 정통중의 정통, 다시 말해 이를 거부하면 이단이 되는 신조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을 거부하는 것은 장로회신조를 거부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도신조는 750년경에 선포된 서방신조입니다. 하지만 니케아 신조는 동서교회가 함께 고백한 최초의 정통신조입니다. 그 신조를 통해 고백하는 게 바로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예수의 부활에서 정초되었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생명의 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무덤 속에 썩었으며, 무덤을 깨드릴 힘이 없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신학자들이 가짜 신을 꺼내어 옷을 입히는 사람이 많은데, 그 가짜 신은 자비하지도 않습니다.

불교는 깨닫는 종교입니다. 우주의 법을 깨닫게 하는 종교이고,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종교입니다. 석가모니는 참 현인이십니다. 한국에서는 근본주의자가 절만 보면 공격성이 발동해, 부처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 넣고 하는데, 그건 폭력이고 행패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좋고, 배울게 많습니까? 그런데, 현인이시고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지만 석가가 생명의 주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석가는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신학의 기초가 되어야 되는데, 삼위일체도 없는 신학이 어디에 쓸모가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온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예기하면서 율법적인 주권을 이야기하는 분이 많습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은 은혜와 자비의 주권입니다.

   
▲ 온신학(김명용 저) © <뉴스 M>

세 번째로, 온전한 복음은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개인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 우주도 구원하는 신학입니다.

저는 중국에 갈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지성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꼭 아편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독교 국가라는 영국이 탐욕에 사로 잡혀서, 아편 팔아먹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지성인이 교회를 파괴하고, 도륙한 이유가 아편전쟁의 비극적 역사 때문입니다. 이 식민지배욕 뒤에 마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생명과 평화가 지배하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 임한 것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분명한 신학이 온신학입니다.

넷째로, ‘온신학’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학입니다.

또한 온신학은 대화적 신학입니다. 단순히 다른 신학과 종교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냉전을 끝내는 데에는 니코라이교회(Nikolaikirche)의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이 기적 배후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남아공에서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고 정의와 인권이 숨 쉬는 나라를 만든 데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세계의 도처에 나타나는 생명과 평화의 역사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너무 기독론적인 신학을 전개해왔습니다. 제가 전공한 칼 바르트(Karl Barth)도 기독론에 정초했습니다. 기독론적인 신학은 일차적으로 중요한 신학입니다. 신학이 건전하기 위해선 기독론에 정초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성령론적인 차원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한쪽은 기독론으로 정초하고, 한쪽은 성령론으로 열려있어야 합니다.

이곳에서 신학을 하는 사람은 LA라는 자리의 성령론을 기초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성령론은 다른 경험을 기초해서 발전합니다. 세계의 도처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역사를 폭넓게 이해하고, 바르게 성령의 활동에 대해 대화를 해야 합니다. 성령론적 인식의 깊이 속에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근본주의에 물든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보면, 자기는 세상이야기를 안하고 그냥 성경이야기만 한다고 자랑합니다. 그들은 세계와 역사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한 손엔 성경, 한 손에 신문’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과 세계가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합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로 ‘온신학’은 기도와 사랑의 신학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힘이 기도와 사랑에 있습니다. 기도는 인생을 역전시킵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기도하면 진짜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모르고 목회하니 목회가 제대로 될 리가 있습니까? 기도가 삶과 역사를 바꿉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내 삶의 기적과 이적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가짜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권징의 회복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결정적 도구가 사랑입니다. 세계 정치를 보면 이기적 정치이지, 사랑의 정치가 아닙니다. 그러니 테러가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이기심이 세계 질서에 들어가면 마귀의 역사가 그 자리에 일어납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종속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이 역사를 바꿉니다. 이게 진정한, 온전한 신학입니다.

 강의정리: 양재영 기자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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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이지신 2015-02-12 04:40:03
제목만 그럴듯하군요.
별로 새것도 , 읽을만한것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글입니다

한목사 2015-02-12 00:49:32
새로운 내용이 없습니다. 김교수님이 비판하신 박형룡 교수를 이어받는 총신에서도 제가 다니던 20년 전에 다 했던 이야기들입니다.
마치 자신의 주장인양 주장하시기 위해 이곳저곳 이분저분을
자신이 오해한 대로 비판을 하셨군요.
짜집기 신학이란 말이 더 어울릴듯 합니다.

atom 2015-02-10 12:13:37
저는 처음에 'holistic theology'를 'wholistic theology'로 잘 못 읽었습니다. 뭐 이쪽 저쪽 아우른다는 점에서 'wholistic' 이라는 게 어울리겠으나, 이걸 'holistic'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김명용 총장님께서는 'holistic'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거저거 아울러서 좋은 것만 버무려 놓았다면 'wholistic'이 좋을 거 같은데... 굳이 'holistic'이라 한 이유가 궁금하군요. 저는 김 교수님의 주장을 찬동하고 좋아는 하지만, 이게 뭐 크게 온 세계를 구원한 만한 '독창적인' 신학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인문사회학에서 'wholistic'이란 용어로 전개되는 이론들이 참 많은데요..., 그냥 구원에 대한 'wholistic approach'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지 않으까요?

atom 2015-02-10 12:08:07
저는 처음에 'holistic theology'를 'wholistic theology'로 잘 못 읽었습니다. 뭐 이쪽 저쪽 아우른다는 점에서 'wholistic' 이라는 게 어울리겠으나, 이걸 'holistic'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김명용 총장님께서는 'holistic'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거저거 아울러서 좋은 것만 버무려 놓았다면 'wholistic'이 좋을 거 같은데... 굳이 'holistic'이라 한 이유가 궁금하군요. 저는 김 교수님의 주장을 찬동하고 좋아는 하지만, 이게 뭐 크게 온 세계를 구원한 만한 '독창적인' 신학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인문사회학에서 'wholistic'이란 용어로 해석되는 이론들이 참 많은데요...

jimi 2015-02-06 14:01:57
세계를 구원할 온신학 기대가 됩니다! 참 자기신학이 최고라는 분 또 나왔네요...이번엔 인류를 꼭 구원하시길! 노자가 한말이지만 성경적인 이야기죠, 진리는 그 자체에 힘이 있기때문에 굳이 떠들지 않아도 물흐르듯이 전달되고 전파된다고...좋은 책 많이 쓰시구요 신학교에서 참된 스승으로 사시면 저절로 존경받는 신학자 될겁니다. 세계를 구한다고 자부하는건 좀 자제하시는게 좋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