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에 생각하는 박용만과 이승만
삼일절에 생각하는 박용만과 이승만
  • 김기대
  • 승인 2015.02.2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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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한 명을 택하라면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신앙인은?

오래전 여든이 훨씬 넘은, 한국말이 어눌한 하와이 교민을 만난 적이 있다. 꼿꼿하고 참 멋있게 나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 나왔다. 하와이 지역에서 박용만 선생과 함께 해외 한인 독립 운동을 했던 사람인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이야기가 이승만으로 넘어가자 거침없이 육두문자를 날렸다. 한국말이 어눌해서 그런지 육두문자의 뉘앙스를 모르는 듯 많은 사람이 있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승만은 ‘개XX’였고, ‘나라 팔아 먹은 XX’ 였다. 역사적 사실관계는 뒤로 하고라도 이승만에 맺힌 원한이 수십년이 지나도록 사무쳐 있었다. 대충 나이를 짐작해 보면 그 노옹이 이승만이나 박용만과 교류했을 때 나이는 10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혈기 왕성하던 당시 스승 박용만과 대립각을 세운 이승만은 그의 눈에 그렇게 비쳤으리라. 박용만과 이승만의 대립을 역사책 밖에서 실제로 만났을 때 노옹의 원한이 생생하게 느껴졌었다. 

   
▲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사진:위키백과)

박용만과 이승만은 상동 감리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상동감리교회는 이회영(이항복의 11대 손으로 일제 강점후 6형제 모두가 엄청난 재산을 처분해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재산과 목숨을 바친 가문으로 유명하다) 을 비롯한 민족 운동가들이 모여들던 산실이었다. 이곳에서 기독교와 민족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 박용만은 조국을 떠나 잠시 중국에 체류하다가 1905년 미국에 도착, 1909년 네브라스카주에서 해외 최초로 독립군 장교 양성기관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우고,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한다. 1911년부터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아 ‘임시정부 설립의 필요성’을 알렸다. 마침내 1912년 ‘대한인국민회’가 설립되는데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중국 등 각지에 지부를 둔 실질적인 최초의 임시정부라고 볼 수 있다.

네브라스카 소년병 학교는 미국인 소유의 농장을 빌려 훈련 장과 숙소로 사용했고 하기 군사 훈련방식으로 운영된 3년제 소년병 학교의 수업과목은 ‘국어, 한문, 영어, 일어, 수학, 역사, 지리, 과학(생물), 화학, 성서, 병학, 병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년병학교는 박용만이 주장하는 무력 독립 쟁취론의 첫 시험대이기도 했다.

군사학교 수업과목 중에 ‘성서’가 들어 있을 정도로 박용만은 민족주의 기독교인이었다. 조국을 떠나기 전 1904년 4월 <신학월보>에 실린 그의 글은 박용만의 신앙을 잘 보여준다.

 오호라, 형제들이여 그런즉 우리는 오늘 어떤 나라 백성이며, 어떤 정치 관원과 백성이며, 어떤 교도 사람이뇨, 한번 마땅히 생각하고 분발할 일이거니와 만일 애국성이 참뜻 없고, 새 생각이 간절하여 문명 부강 네 글자를 온전히 얻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나라와 백성과 정치의 근본이 되는 교도를 강명하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 받고 예수의 선택되어, 거룩한 성경으로 참 이치를 얻어듣고, 평등 권리, 자유방석 역력히 아는 바라. 관계를 생각하고, 근본을 연구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널리 사랑하시는 마음이 우 리에게 득성하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또한 무장 투쟁론자였다.실질적인 무장투쟁만이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평생 무력항쟁의 길을 걷는다. 박용만의 무장 투쟁론과 이승만의 외교론이 부딪히면서 두 사람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막역한 사이였다. 하지만 박용만이 소년병 학교를 잠시 비우게 되었을 때 프린스턴에서 막 학위를 마친 이승만을 학교로 부르는데 그는 매일 부흥회를 열고 세 번씩 기도회를 갖고, 장인환, 전명운, 안중근은 형법상 살인범이며, 조국의 명예를 훼손시켰고, 일본과 군사적으로 싸운다는 것은 망상이라며 박용만의 무장투쟁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1919년 9월 상해에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박용만은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된다. 그러나 외교적 해결을 선택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은 임시정부와는 뜻을 함께 할 수 없어 외무총장 자리를 사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대한국민군을 조직하여 총참모에 취임하고, 1921년 북경에서 신채호, 이회영, 신숙등과 함께 ‘북경 군사통일회의’를 결성한다.

문제의 ‘대륙 농간 공사’

   
▲ 청년시절의 박용만(사진:위키백과)

박용만은 독립운동의 안정적 재정 확보를 위해 ‘북경 흥화실업은행’, ‘석경산농장’,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등을 운영하는데 대륙농간공사가 화근이 되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자금 확보를 위해 경성(서울)의 총독부를 방문한다. 사가들은 이것이 일본의 이간책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너무 뻔한 이간책이기에 박용만의 선택에 고개를 갸우뚱 거릴 수 밖에 없다. 농토를 개간한다는 의미의 ‘농간’의 어감이 너무 안좋았다고 생뚱맞은 작명 실수를 탓해야 하나?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겨레 신문 초대 사장을 지내고 한겨레에서 시상하는 ‘송건호 언론상’의 그 송건호는 회고록에서 박용만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대표적인 친일파 윤치호도 그의 일기에서 박용만 밀정설을 제기한다. 윤치호 일기에서는 친일파의 물타기로 볼 수도 있겠으나 송건호 같은 진보 논객에게조차 박용만의 선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밀정은 아니었고 이간책은 분명해 보인다. 밀정으로 오인받은 박용만은 1928년 의열단에 의해 피살되는데 당시 암살범 명단 중에는 이회영의 조카 이규준도 있었다. 그러나 이규준은 이미 1927년에 사망해 최근 기록에서 이규준은 빠진다. 독립운동의 명망가 이회영의 가문에서 박용만의 암살범이 있었다면 박용만의 밀정설은 더욱 힘을 얻었을지 모른다. 그나마 이규준의 무관함이 증명되어 다행이기는 하지만 두고 두고 이해할 수 없는 박용만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박용만의 신앙은 민족과 기독교를 결합하자는 것이었다. 개화기 지식인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물론 박용만 혼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와 미국을 동일시 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박용만은 꿋꿋하게 ‘민족의 기독교’를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외교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었고, 무력투쟁과 함께 갈 수 있는 종교였다.

이승만 – 참 알 수 없는 인물

이승만은 말년에 일생동안 가장 라이벌이 누구였냐고 묻는 측근의 질문에 가장 힘겨웠던 상대는 박용만이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승만에게 나이 어린 박용만은 큰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상동교회 시절 부터 박용만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1911년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 감독 워드맨(J.W. Wadman )과 한인사회간의 갈등으로 한인 자유교회가 세워지는데 한인기숙학교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구제금을 받은 것 때문에 워드맨이 궁지에 몰리자 워드맨은 이승만에게 한인 사회의 중재를 요구하면서, 한인 기숙학교 운영을 담당하게 했다.  이 때 박용만은 이승만에게 한인 교육 사업을 맡긴다. 이승만이 운영권을 쥐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벌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스캔들, 모금된 자금의 독선적 사용 등으로 현재 진보 진영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독재자로 군림하다가 4.19로 물러난 그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부분만은 인정해 주자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이 부분까지 심하게 의심을 받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YMCA, 세계 감리교회 연합회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던 이승만은 외교를 통한 한국 독립을 주장했다. 당시 상황에서 박용만의 무장투쟁론은 이승만이 염려했던 것처럼 무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외교론 역시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현실에서 한국의 독립을 최고 현안으로 여겨줄 국가는 없다는 점에서 무장투쟁론이나 마찬가지로 의미없을 수 있었다. 결국 함석헌의 말처럼 독립은 도둑처럼 찾아 왔는데 무장투쟁론이나 외교론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보다 무슨 의도나 생각으로 그 주장들을 펼쳤는가가 중요하다.적어도 말년의 실수를 제외하고는 박용만의 선택이 옳아 보인다. 박용만은 늘 자생(自生)을 생각했고, 이승만은 한인들의 지갑이든, 외교적 실리든 의존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의 신앙 여정도 늘 ‘정치적’이었다. 이승만은 회고록에서 1904년 한성감옥에 있으면서 게일 목사(장로교 선교사, 연동교회 초대 목사)를 통해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회고록에서 감옥에 있을 때 아펜젤러 감리교 선교사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쓰고 있다(이승만이 배제 학당 출신이므로 아펜젤러의 도움도 많았을 것이다). 출소후 상동감리교회에 출석하던 이승만은 게일 목사의 추천서로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 커버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햄린 목사에게 1904년 세례를 받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프린스턴 졸업 후에 YMCA에서 일할 기회를 얻는다.  하와이에서는 감리교인이었다가 자유교회 교인으로, 그리고 대통령이던 1956년 정동 감리교회 장로가 된다.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쓴 글을 보아도 이승만에게는 개인적 체험이 박용만에게는 민족이 우선이었다.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다. 배재학교 다닐 때는 그 책이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어느 날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해주신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서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 기도했다.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변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증오감, 불신감이 사라졌다.” (이승만: 투옥경위서)

두 사람의 정신세계는 그들이 쓴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옥중세모(獄中歲暮)

밤마다 긴 긴 사연 닭이 울도록

이 해도 거의로다 집이 그리워

사람은 벌레처럼 구먹에 살고

세월은 시냇물처럼 따라가누나

어버이께 설술을 올려보곺아

솜옷을 부쳐준 아내 보곺아

이승만은 아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시로 남겼지만 1910년 귀국한 후에 아내를 외면한다. 이미 이승만 옆에 다른 여인들이 있었다는 설이 요즘에 특별히 힘을 얻고 있다.  

 정치의 급무는 외교에 있고

 일이랑 능한 분께 물어 보소

 외로우면 나라가 위태롭다오

 자유로써 백성을 인도합세다

 그릇된 예법은 선듯 고치고

  신식도 좋으면 받아 들이소

여기서도 이승만은 서구 문명에 대한 지나친 호감을 보이고 있다. 반면 박용만은 이런 시를 남긴다.

지명시(知命詩)

大夢平生自覺知   평생 큰 꿈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丈夫胡爾等諸兒   장부가 어찌 어린 아이들 같을까

文非窮我終成器   글은 내게 궁하지 않으니 성공할 것이요

武則達人也得時   무술을 통달한 사람은 때를 얻을 때가 있다

重陸遠洋西渡誓   무거운 육지 먼 바다 서쪽으로 건너가 맹세하니

千兵萬馬東伐期   천병만마로 동쪽 치기를 기약한다

靑年失志何須恨   청년들이 뜻을 잃었으니 어찌 한탄 안하랴

月滿花開早或運   달이 차고 꽃이 피는 건 이르거나 늦거나 올 것이다

한 개인의 윤리적 처신을 판단에서 제쳐 놓는다면 무장 투쟁론과 외교론 중 옳은 것을 찾는 일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쉽게 선택할 성질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신앙을 다른 세력과 만나는 도구로 받아들인 흔적이 강하다. 반면에 박용만에게 신앙은 자신과 민족에 힘을 주는 그 자체였다.

올해로 광복 70년, 굳이 한 명을 우리의 신앙적 멘토로 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택할까? 그것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우리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지금 두 사람을 누가 따르고 있는가이다.  고조선부터 임시정부를 거쳐 세워진 대한민국이 존재하는데도 난데 없이 국가를 세운다는 의미의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이승만을 건국의 국부로 모셔야 한다는 이들이 누구인가?  이승만 영화를 제작해 한국 영화 최고 관객수를 갈아치우겠다는 '빤스 목사'는 왜 이승만을 외쳐대는가?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개그맨 서세원은 왜 또 이승만을 운운했을까?

이승만을 비판하는 것은 진보진영이겠지만 이승만을 모욕하는 것은 정녕 자신들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한 이승만의 신앙을 존경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김원용, 재미 한인 50년사, 혜안
김도훈, 박용만, 미 대륙의 항일무장 투쟁론자, 역사공간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학교 등을 참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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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eh 2015-03-04 12:47:59
이승만....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이승만은 기회주의자에 권력추종자의 견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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