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가 되어 버린 설교
마사지가 되어 버린 설교
  • 박지용
  • 승인 2015.03.19 04: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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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훌같은 설교자는 되지 말자

민영진 목사(대한성서공회 총무)가 어느 책의 추천사에서  '말씀으로 죄악을 마사지하는 설교자들'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글을 읽고 직접 내용을 찾아 본 적이 있다. 예레미야와 바스훌을 비교하면서 바스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악들을 질타하지 않고 도리어 그 시대의 죄악들을 마사지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설교자로 평가해 놓은 짧은 글이었다. 오래 전 신학교 시절, 설교학 시간에 들었던, "메시지는 마사지다. The message is the massage"는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히 남아있는 터라, 바스훌이 마사지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거짓 설교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나름 가졌던 평판은 완전히 구겨져  쓰레기 같은 인물이 되었을까? 바스훌이라는 인물을 좀더 연구해 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그에 대한 자료가 성경에도, 주석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바스홀은 누구?

바스훌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그는 예레미야 20장 1절에서 임멜의 아들이라고 한다. 임멜은 역대상 14장에 보면, 24개 제사장단에 제16 제사장단에 리더격 제사장이였으니 막강한 권력자였다 . 그런 아버지 이후에 제사장직을 세습했으니 그도 성전 총감독으로서 인적, 물적 자산을 관리하며 권세자였다. 그의 성전에서 책무는 성전을 유지, 보호하는 데 주력하는 경영 management이나 행정 administration만 잘 하면 유능한 제사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성전에 오게 하고, 성전세(헌금)를 잘 걷는 설교에 치중하고, 때론 왕과 귀족들 앞에서 설교하는 궁정 채플린으로서의 영예를 누리면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명민함 정도는 가지고 설교를 할 줄 아는 눈치 있고 센스 있는 설교자였다. 하여, 기득권 실세로서의 특혜를 톡톡히 누리는 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가 재물과 종교권력을 휘두르며 '지상나라'가 오래 오래 존속되기를 바랬지만, 그 시기는 고대 근동 전체가 격변기에 들어선 때였다. 근 200년 동안 이 주변 국가를 장악해오던 앗시리아 제국이 몰락해 가고, 바벨론 제국이 부상하던 시기였고, 급기야 유다도 망해가는 혼란한 시기였다.

 

성전신학의 타락

요시야 종교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성전신학'은 다윗왕조의 계약신학과 결탁하여 무사태평의 안일한 낙관주의만을 조장하였다 . 이에 편승한 바스훌의 설교는 오로지 '평안하다' '평안하다' '다 잘 될 것이다' '안녕과 축복'을 빌어주며, '안전과 무사' 만을 바라는 인간심리를 잘 마사지 해 주었다. 그는 어느 성경본문을 찾던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회중에게 평안과 축복을 빌어주고,  자신의 관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천착한(아전인수격인) 해석에 탁월했다. 이런 바스훌을 가리켜 유진 피터슨은 '국가적 자산' 이었다고 비꼬았다. 바스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골라, 해석하는 능력은 기독교 초기에 등장한 마르시온과 비슷한 점이 있다. 마르시온은 서로 다른 두 신이 있다고 가르쳤다. 신약성의 하나님은 자비와 구원을 베푸는 자비로운 신인 반면,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율법과 정의를 강조하는 냉혹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시온은 구약은 기독교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세기에 마르시온 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마사지 영업을 방해하는 예레미야

바스훌의 대척점에 예레미야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신탁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려고 한 예언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중심이고 하나님이 주어가 된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려고 애썼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고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배척과 조롱을 당했다.  예레미야 19장에 보면, 토기장이 집에 간 예레미야는 오지병 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오지병을 깨트렸다. 그것은 상징적인 행위로서 유다의 멸망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예언했다. "하나님께서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라 (렘19:15)" 이 소리가 바스훌의 귀에 들어갔다. 예레미야에게 슈퍼갑이었던 바스훌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입지와 영달을 유지하려고 예레미야를 성전으로 잡아다가 착고 를 채워 가두었다. 자신의 마사지 영업(?)을 방해하는 예레미야의 입을 틀어 막으려는 심사였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의 입에 재갈을 물려 '가만히 있으라' 는 것이었다. 세월호 사고 당시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예레미야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스훌을 향해 본문 3절,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 아니라 '마골밋사빕'이라 하셨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다분히 언어유희처럼 들리지만 바스훌의 뜻이 '평화'인데 반해, '마골밋사빕'은 '사방으로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바스훌은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공포'를 주는 사람이 되었다. 'terror on every side.' 그는 주변에 공포를 주는 테러리스트다. 바스훌은 제사장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는 고통이 안겨졌다.

설교자로서 예레미야의 심중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 "여호와께서... " 하나님이 중심이었고, 주어였다. 그는 설교자가 명심해야 할 심오한 말을 한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20:9)." 설교자의 중심과 설교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여지는 설교, 하나님만을 전하기 위해 가슴이 뜨거웠던 예레미야... 요하네스 예레미아스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파토스(열정, pathos)로 들어갔다" 고 했다.

 

새마을 운동 신학

목사의 사명과 목회사역의 대부분은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교가 목사의 전유물은 아니라 할지라도 설교할 수 있는 위임 받은 것은 특권이다. 하여, 목사가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서 있는 자리는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일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해야 한다. 목사가 전한다고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칼 바르트는 "설교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인간의 말이다... ... 설교자는 성서가 말하는 것을 뒤따라 말해야 하고 성서에 흐르는 고유한 사고의 흐름을 따라 가려고 해야하며, 그것을 벗어난 고유한 임의의 목적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고 했다. 설교자는 설교를 어떻게 전해야 하나?는 '전달기법'보다 어떤 내용을 전해야 하나? 하는 설교내용에 관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주지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때론 성도들이 듣기 좋은 말로 마사지를 해 주면서 그들이 웃었으니까... 그들이 위로 받았으니까... 그들이 힘을 얻었으니까... 됐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자족할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어이 없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 와," "사람들이 듣지를 않아," 라는 말로 변명하기도 한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다. 설교의 역동성은 설교자보다는 성경자체의 역할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 이 있어 그렇다. 고전적 설교방법인 삼대지 설교냐? 강해설교냐? 주해설교냐? 1인칭 설교냐? 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대언'하려고 하나님께 주목했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적 음성을 뜨거운 가슴으로 쏟아냈고, 백성들의 아픔을 하나님께 긍휼의 마음에 담아 대신 호소했다. 그에 반해 바스훌은 듣는 이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감동을 주려는 매카니즘에 몰입하다보니 감정 마사지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대로 듣기를 좋아 하는데 그의 설교는 '싸구려 골라 잡아'가 되어 버린 채 감정을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므로 영적인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대언'과 '해석', 어디까지 분별력 있게 둘 사이를 오가며 '말씀'을 전해야 하나? 설교자로서 고민은 깊어진다.

이민자의 삶이 워낙 치열하고 팍팍하다보니 설교자로서 위로하고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애잔함이 믿음의 힘보다 긍정의 힘을 주고, 물욕과 탐심으로 찌든 자들을 정당화시켜 주고, 허망한 고지론이나 허탄한 성공에 집착하도록 자극한다. 하여, '새마을 운동(번영신학)' 수준의 설교로 마사지해 주는 마사지사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 실수를 너무도 자주 범한다. 이럴 때는 나도 모르게 바스훌과 같은 설교자가 되어 버린다. 이런 설교를 계속 듣고 있는 성도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양심으로 웅크리고 있던 몸이 죄의 면죄부 를 받아들고, 편안히 죄에 익숙해져 가고, 죄 짓는 일에 담대해 질 것이다. 갈수록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삶,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변화된 삶은 찾아 보기 힘들다. 뭐든지 신기하고 신비하며 축복과 은혜만 받으면 된다는 몰지각하고 무속적인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 넘쳐난다. 이런 타락한 교회, 미성숙한 성도를 만드는 데 나의 설교가 일조하지 않았나 되돌아본다. 

박지용 목사 / 온맘 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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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 2015-03-19 20:59:40
오랜만에 통찰력있는 글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를 주시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름의 글을 계속 쓰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