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제니친에게 십자가 그려준 무명의 죄수 이야기
솔제니친에게 십자가 그려준 무명의 죄수 이야기
  • 최태선
  • 승인 2015.04.01 0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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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구 소련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소설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어느 날 그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삽을 내버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감시관이 다가와 죽을 만큼 두들겨 패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죄수들이 그렇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봐 왔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당하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한 수척해 보이는 죄수 하나가 솔제니친에게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흙에다 십자가를 그려 보이더니 서둘러 사라졌습니다. 솔제니친은 땅에 그려진 두 줄의 겹쳐진 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 십자가의 형상이 그의 모든 절망을 바꿔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는 "소련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모든 인류의 소망은 그 작은 십자가 형상으로 상징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솔제니친은 팽개쳤던 삽을 들고 작업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이 이야기를 읽으며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곳, 인간 막장이라 불리는 광산조차도 사치하고 화려한 곳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다 얼어붙은 동토의 땅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도 빛을 발하는 십자가는 진리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 말년의 솔제니친.

소련보다 더 큰 힘, 모든 인류의 소망을 응축해 놓은 상징, 십자가는 동토의 땅에서 마침내 마지막 온기마저 얼어붙은 한 영혼을 소생시켰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회복한 솔제니친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서유럽식 제도가 아니라 러시아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원천으로 하는 박애적·권위주의적인 체제 수립을 제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가 기독교 사회가 아니라 자기를 숭배하는 사회임을 질타하기도 하였습니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83년에는 소련에서 종교를 부활시킨 개척자라는 점이 인정되어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소련 연방이 붕괴된 후 1994년 20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갔습니다. 2007년에는 러시아 국가문화공로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타계하였습니다.

그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맞섰던 위대한 인간이었으며 기독교 국가 한 복판에서 공산사회 출신의 이방인으로서 강력한 회개를 촉구한 선지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간단히 소개한 그의 이력만으로도 인류가 영원히 기억할 역사가요, 문학도요,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위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솔제니친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를 읽은 어느 누구도 의욕을 잃고 삶을 포기한 솔제니친에게 다가와 말없이 땅위에 십자가를 그리고 지나간 죄수에 대해 기억하거나 흥미를 갖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솔제니친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 정도로 생각할까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무명의 죄수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최우선으로 추앙받는 가치는 믿음과 섬김일 것입니다. 인간에게 어떠한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상황을 감사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초석일 것입니다.

수용소의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던 한 무명의 그리스도인에 의해 솔제니친이라는 한 생명이 구원으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을 다 쏟아 부어도 살아남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동료의 어려움을 보고 다가가 십자가를 그릴 수 있는 섬김은 여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위대한 섬김의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솔제니친에게로 향하는 마음은 있지만 무명의 그리스도인에게로 향하는 마음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선호하고 영웅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합니다. 무언가 극적이고 자극적이고 볼만한 거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추구해야 하는 마음의 상태는 그러한 경쟁의 마음,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감추면서도 다른 이들의 필요와 요구에 반응하는 섬세하고도 민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자기를 비워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 나아만 장군에게 엘리사를 소개했던 계집 종, 문둥병을 고침 받고 찾아와 감사를 드렸던 이방인,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 성경이 소리 없이 강조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무명의 사람들,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와 같이 당대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은 오히려 무명의 사람이 되기 위해 오래도록 이방의 객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사람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음으로써 드디어 아버지의 위대함을 찬미하고 아버지가 창조하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그 느낌이 진실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때때로 비천함을 선사하신다는 사실을 인간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제 위치를 벗어난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권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유명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 반대로 힘과 권력을 추구하고 한사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다가 '자기의'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어린아이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무명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돌아온 둘째 아들의 나라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영향력으로 하나님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어리석은 신앙인들의 모습이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무능함과 연약함 속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깨닫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동거함으로써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문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오 예수 그리스도시여,
모든 것이 어둠뿐이고
우리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절감할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능력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의 보호하시는 사랑과
강하신 능력으로
우리가 온전히 주님을 의지할 수 있게 하셔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놀라거나 두렵게 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과 함께 동거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만물을 통하여
주님의 뜻과 주님의 계획과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이냐시오 로욜라 -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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