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아니라 고난의 목적을 묵상하라
고난이 아니라 고난의 목적을 묵상하라
  • 송병주
  • 승인 2015.04.01 0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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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적 허위 의식과 종교적 의인 의식을 회개하라

고난 속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혀가 빠지게 고생하는 것이 고난의 목적이 아닙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새벽기도를 통해 여러분을 '고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수요일쯤 되면 얼굴이 누렇게 변하고 금요일이 되면 결국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힘든 인생살이 고난만 묵상하며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에 집중하지 마시고 고난을 통해 이루신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고난만 묵상하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담긴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말 안 듣는 자녀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그 말 안듣는 자녀 때문에 속을 썩이다가 “너는 내 인생의 십자가다. 정말 고난주간을 네 덕에 제대로 보는 것 같다”고 말을 하신다면, 고난은 겪었는데 고난의 목적을 잃어버린 경우입니다. 고난만 마음에 새기고 아파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 주신 메시지를 삶 속에 실현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은 고난을 묵상하기 위해 보내는 주간이 아니라 고난의 목적을 묵상하기 위해 보내는 주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의 목적은 교만한 종교인들의 의인의식을 무너뜨리고, 소망없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더욱 묵상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율법주의적 허위의식과 팽배한 종교적 의인의식을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떻게하면 우리의 희생을 통해 소망없이 사는 죄인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덮을 것인지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정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내가 그 죄를 대신 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더욱 묵상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율법주의적 허위의식과 팽배한 종교적 의인의식을 회개하는 일입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덧입지 않고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인이 노력한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남들과 다른 '율법의 행위'가 있으면 스스로 의인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거지가 아침마다 발톱에 매니큐어 칠하고 향수 뿌린다고 공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발톱에 매니큐어 칠했다고 다른 거지들보고 “발톱에 매니큐어도 안 칠한 거지같은 것들이…”라고 한다면 아마 그 거지는 왕따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죄인은 결코 스스로 의인의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역설적인 현실이 있습니다. 훌륭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스스로 더 깊은 죄인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이기에 선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 되었기에 의롭다 칭함을 받았을 뿐입니다. 될성부른 떡잎이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싹수부터 노란 것을 데리고 의의 나무가 되게 했을 뿐입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 유대인들은 항상 의인으로 불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3장 19-20절을 통해 율법 아래에에서 인간은 의인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를 의인을 만들 수 없고,오히려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1-23절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의 의를 덧입었을 뿐이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내려는 의인의식은 필연코 배타성과 교조성을 띄게 되어 있습니다. 함부로 타인들을 죄인이라고 말하고, 마귀 자식이라고 악담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나 성도들이 쉽게 세상을 정죄하는 것을 보면 답답합니다. 언젠가 애한테 화를 내는 한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교회 집사님이시더군요. “네가 하는 짓을 봐. 이건 마귀가 하는 짓이야. 네 속에 마귀가 가득해. 당장 귀신을 쫓아내야겠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며 아이에게 악담을 하는데, 제 눈엔 오히려 그분이 더 마귀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의 의를 덧입은 사람이 결코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이라면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죄인임을 잊어버린 교만한 의인은 타인을 경멸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의를 덧입음을 아는 죄인은 타인을 용납합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는 첫 번째 중요한 묵상은 우리가 얼마나 소망없는 죄인이었음을 더 가슴에 새기는 일입니다. 오늘 내안에 극복해야 할 종교적 의인의식이 없는지 우리는 더 깊게 묵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망없는 죄인을 십자가의 의로 덮어 주셔서 '칭의'하셨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일입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덧입은 의에 감사하며 우리 속의 종교적 의인 의식과 싸워 이겨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확장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시뇨"라는 도전적인 질문(로마서 3장 29-30절)을 봅시다.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얼마나 상상도 못할 도전인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 바울을 이해하려면 배경 지식이 필요합니다. 로마교회는 복잡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로마인이 같은 교회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말 그대로 일제시대 동경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같은 교인이 된 것같과 같은 형국입니다. 한마디로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특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신학적으로 죄인들인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느냐는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갖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경멸하는 이방인들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자신들을 식민지로 삼고 고통을 준 민족적인 원수였습니다. 계층적으로 계급적으로 자기들 위에 군림하며 자기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입니다. 경멸의 대상이며, 원수이며, 타도의 대상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런 파괴된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교회를 이룰 수 있음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점에서 로마교회 안의 유대인들을 향한 더 깊은 도전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인 로마인들에게까지 나타났고 너희는 다 같이 동일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경멸하고 미워하는 원수같은 존재도 의롭다 하시는 것이기에 서로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은 결국 나와 하나님의 관계만을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 원수처럼 여기며 경멸하던 사람들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는 능력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는 도무지 같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더불어 교회를 이루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경멸하는 것?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가 두번째로 묵상해야 할 것은 경멸하고 미워하는 원수같은 존재를 어떻게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자녀로 여기며 함께 교회로 세워져 갈 것인가를 결단하는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의 능력이 나랑 친한 사람에게만 흘러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십자가의 능력이 원수된 자에게까지 흘러가게 하십시오. 십자가를 경멸하는 것은 아직도 십자가의 의가 유대인에게만 제한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멸하는 것은 아직도 십자가의 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친한 사람들에게만 제한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멸하는 것은 십자가의 의가 내가 미워하는 사람, 경멸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찬송 중에 "이후에 천국 올라가서 모든 성도들과 다함께 우리들을 구하신 주를 찬양하리라. 미쁘신 나의 좋은 친구"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후에 천국 친한 사람들과만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서 서로 쑥스럽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교통사고라도 확 나버렸으면 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데 정말 교통사고 나면 마음이 편할까요? 가슴 에 더 큰 상처와 죄의식을 마음에 안게 될 뿐입니다. 십자가의 의가 힘들고 고통스럽고 경멸하고 싶은 곳까지 흘러갈 수 있도록 하십시다. 고난주간의 열매가 이렇게 열매로 나타나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 죄를 대신 지라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모습을 재현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아파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고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일을 잊어버리고 있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서론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더욱 묵상해야 하는 것은 우리안에 율법주의적 허위의식과 팽배한 종교적 의인의식을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희생을 통해 소망없이 사는 죄인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덮을 것인지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정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내가 그 죄를 대신 지기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송병주 / 선한청지기교회 담임목사

* 이 글은 송병주 목사의 블로그(http://hanada386.tistory.com/)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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