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불법예수 장사, 이젠그만둬야"
"한국교회의 불법예수 장사, 이젠그만둬야"
  • 조호진
  • 승인 2015.04.10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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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기획 2 - 인터뷰] 방인성 함께여는교회 목사

※부활절(5일)에 맞춰 기독교 순교자 가문을 2회에 걸쳐 조명한다. 1대 목사인 조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되고, 북한 공산당에 반대하다 순교했다. 2대 목사인 아버지는 이름도 빚도 없는 시골 목회자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섬겼다. 3대 목사인 아들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일 단식을 감행했다. 순교자 가문을 통해 부활절의 의미를 짚어본다... 기자 말

   
▲ 5년 전의 방인성 목사. 영국에서 신학과 목회를 해서인가? 당시만 해도 방 목사는 '핸섬'한 영국 신사였다. ⓒ 조호진

신앙은 삶의 등불이다. 목사는 어둠 속을 헤매는 인생들을 밝은 길로 인도해야 한다. 그런데 종교적 수사를 동원한 감언이설로 혼미케 하면서 돈을 뜯는다면 그는 목사가 아닌 강도다. 예수는 부패한 교회를 강도의 굴헐(掘穴)이라고 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마땅한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하니 그야말로 말세다. 기독교의 암흑기에 빛과 소금 같은 목사를 5년 전에 만났다. 그리스도교도인 나는 흔치 않은 목사와 종종 만나 대화했고, 취재했고, 마침내 보도하게 됐다. 이 글은 고난의 길을 선택한 목사에 대한 취재기이자 간증이다.
 

   
▲ 방인성 목사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40일간 단식에 참여했다. ⓒ 조호진

5년 전 촬영한 방인성(61·함께여는교회) 목사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영국 신사처럼 품격이 돋보인다. 그런데 지난해와 올해 촬영한 사진을 비교해 보면 얼굴과 몸이 많이 상했다. 

고난 받는 이웃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용산 참사 유족과 세월호 유족을 찾아가 아픔을 함께 나눴고, 빛과 소금이 되라는 가르침 대로 부패한 교회 세습과 서초동 사랑의교회 건축을 반대하는 등 교회 개혁에 앞장섰다. 

방인성 목사에겐 여야가 따로 없다. 노무현 정권 때는 이라크 전투병 파병을 반대했다. 이명박 정권 때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와 한미FTA 반대 시위에 가장 앞장서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았다. 

박근혜 정권에선 광화문 광장에서 40일 단식을 감행하며 세월호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방인성 목사는 "목사는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그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다"면서 "목사가 속해야 할 진영은 고난을 이기며 가야 할 정의와 평화의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는 경찰에 수차례 연행됐다. 그런 탓에 반체제 종북 좌파로 몰린다. 보수 권력의 비호를 받는 종교 권력자와 부화뇌동한 교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는 좌파 빨갱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건 무지의 소치다. 그는 순교자의 후손인 정통 예수파다(관련기사: 기독교의 흑역사... 이런 목사가 필요했다). 

그의 조부 방계성 목사는 신사 참배 거부로 6년간 옥고를 치렀고, 공산당에 반대하다 순교한 정통 예수파다. 조부의 순교신앙을 물려받은 그는 "이 시대의 순교 사명은 정의와 평화를 훼손하는 세상 권력에 저항하고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통성 기도하듯이 말한다. 아래는 지난 7일 방인성 목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영국 목사 방인성, 신사 목회 그만두고 왜 한국 왔나

방인성 목사는 영국신사처럼 '핸섬'하다. 외모뿐 아니다. 그는 런던 킹스칼리지(B.D)와 옥스퍼드 웨스트민스터칼리지(M.TH)에서 신학을 공부한 해외파다. 영국 국제장로교회(IPC)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옥스퍼드 한인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사역했다. 그는 왜 신사의 나라에서 신사처럼 목회하지 않고, 분단과 갈등의 나라 한국에 와서 험난한 목회를 하는 걸까. 궁금하다. 

- 어떤 목사를 꿈꾸었나. 
"솔직하게 고백하면 성공한 목회, 유명한 목사가 목표였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하면서 목표가 확 바뀌었다. 영국에서 목회하는 중에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맸다. 내 능력으론 아들을 살릴 수 없었다. 간구의 기도를 하는데 소천하신 할아버지가 찾아오셔서 나를 심하게 꾸짖으셨다. '목사들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를 팔아먹는 범죄 행위를 하는데 순교자의 후손인 너마저 범죄자가 되려고 하느냐!'고 책망하셨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순교자의 후손임을 깊이 자각했다. 영국에서 소중한 어른 한 분과 동지 한 명을 만났다. 겸손한 삶으로 모본을 보여주신 김복경 목사를 만나 목사의 바른 길을 결심하게 됐고, 박득훈(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새맘교회) 목사를 만나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을 꿈꾸게 됐다. 당시에 사경을 헤맸던 아들은 청년이 되어 잘 지내고 있다."

- 목회 경력을 말해 달라.
"14년 동안 유학과 목회로 영국에서 생활했다. 런던 킹스크로스 한인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했고, 첫 담임 목회는 옥스퍼드에서 했다. 한국에 와서는 성터교회(재건교회)에서 11년간 목회했다. 현재의 교회에서는 7년째 목회하고 있고, 재신임을 받았으니 앞으로도 3년간 더하면 10년은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교회에서는 목사도 3년마다 재신임 투표를 한다. 불신임을 받으면 그만둬야 한다."

- 목회와 자녀 교육 등의 조건을 보면 영국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왜 한국으로 왔나.
"1996년 성터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신사 참배를 반대한 '재건파'가 세운 교회인데 담임 목사가 은퇴하면서 후임 목사를 청빙해야 했다. 교회에선 순교자의 정통을 잇고 싶어 했고, 마침 방계성 목사의 손자가 영국에서 목회한다는 소식을 듣고 옥스퍼드 한인 교회에 찾아왔다. 그래서 목사 한 명의 독점 목회가 아닌 두 명의 목사가 동역하면서 2년마다 담임을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친구 목사(박득훈)와 같이 가서 동역 목회를 하겠다고 했다. 

부임해서 보니 목사 권한이 막강했다. 재정, 인사, 행정 등을 목사 맘대로 할 수 있었다. 영수증 없이 써도 되는 활동비가 당시(1996년) 일 주일에 최대 200만 원이었다. 목사 마음대로 써도 되는 돈이었다. 교인들이 땀 흘려서 번 돈을 헌금했는데 땀 흘려 일하지도 않은 목사가 맘대로 쓸 수 있다니, 나는 목사 중심의 폐쇄적인 구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목사에게 지급된 활동비를 개척 교회와 선교사를 돕는 데 사용했는데 마치 내 돈을 주는 것처럼 내가 인심 쓰는 것이 됐다. 

6개월간 목사 마음대로 하다가 중단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병들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돈 쓰는 재미에 들렸다면 나도 왕 노릇 하는 목사, 타락한 목사가 됐을 것이다. 원로 목사와 장로들에게 영국에서 꿈꾼 교회 개혁에 대해 밝혔다. 목사가 신격화되는 폐쇄적인 구조는 문제라고 했다. 목사의 권한을 내려놓고 싶다고 하자 처음엔 당황하던 원로 목사와 장로들이 동의해줬다. 그렇게 해서 동역 목회가 시작됐다."

교회 개혁의 성공과 실패... "목사는 왕이 아닌 종이다"
 

   
▲ 경찰관 기동대대원들이 지난 2008년 8월 5일 저녁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 앞에서 '부시 방한 반대'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을 강제해산 시키기 위해 색소가 들어간 물대포를 발사하자 방인성 광우병기독교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이 시위대 앞으로 나와 몸으로 저지하고 있다. ⓒ 유성호

- 교회 개혁을 어떻게 했나. 
"성터교회는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다. 전태일 열사가 활동한 청계 피복과 동대문 시장이 가깝고, 동네에는 하청을 받은 작은 공장들이 많다. 우선 지역 사회 현안을 파악한 뒤 소년소녀 가장, 홀로 사는 노인, 장애인 등을 돕기 시작했다. 종로구청과 창신동 주민센터에 찾아가 동네 주차 문제와 쓰레기 문제 등을 협의한 뒤 해결하고, 사회 복지 사각 지대에 있는 차상위 계층 자녀의 학비를 지원했다. 결손 가정과 폭력 가정 등의 피해자를 치료해주고 경찰서에 동행해줬다.

그렇게 했더니 가정 폭력 피해자인 한 여성이 울면서 '고맙다, 이렇게 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고마워했다. 교회의 빈 방은 가정 폭력 피해자의 쉼터가 됐고, 무연고자 등의 장례식을 대신 치렀다. 가장 감동적인 사건은 동네 망나니로 취급받던 알코올 중독자가 회복된 사건이다. 그의 집은 교회 바로 앞에 있었지만, 교회는 교인이 아니라고 외면했었다. 그의 아내와 큰아들은 사망했고, 작은아들은 가출했다. 교회가 돌봐야 할 딱한 처지였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그의 집을 가보니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 더미였다. 새벽 예배가 끝나면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술에 취해 길에 쓰러진 그를 병원에 데려가면 난동을 부리고, 치료해서 집에 데려다 놓으면 또 다시 술주정을 했다. 몇 년 동안 술주정뱅이 고씨를 돌봤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것은 '고맙다'는 말이 아닌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는 원망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스스로 병원에 입원한 그가 치료받고 퇴원한 뒤에는 다른 알코올 중독자를 돕는 치유자가 됐다. 믿음과 사랑으로 돌봐주면 어떤 사람이든 회복이 가능하다는 귀한 경험을 했다."

- 목사들이 돈 문제와 여성 문제 등의 추문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반 범죄자들은 그러려니 하지만 성직자인 목사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거세다. 추문 예방을 어떻게 하나. 
"시골 교회 목사였던 아버님께서 '목사는 돈, 여자, 명예를 멀리해야 한다'고 철저히 가르쳤다. 한국에선 교인 집에 심방 가거나 결혼식 주례와 장례 예배를 집행하면 목사에게 사례금 명목으로 돈을 준다. 그런데 실상은 촌지다. 교사와 기자에게 주는 촌지와 다르지 않다. 

목사는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다. 심방, 주례, 장례 등은 목사가 당연히 해야 할 사역인데 왜 촌지를 주고받는가. 이런 잘못된 관행뿐 아니라 과다한 선물이 오면 마음만 받고 돌려보낸다. 이를 돌려주면 '돈이 적어서 그러느냐', '왜 내 것만 거부하느냐'라면서 교인들이 서운해한다. 어떤 분은 상처받기도 하고, 아내는 결벽증이라고 지적한다. 

돈과 명예, 권력 문제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경직된다. 인간적으론 나도 힘들다. 하지만 부패한 한국 교회, 왜곡된 목사와 교인 관계 등을 개혁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했다. 힘들어도 개혁해야 한다(기자도 서운한 경험을 했다. 지난달 29일 예배 참석 겸 취재차 '함께여는교회'를 방문했는데 방 목사는 점심 시간임에도 필요한 취재와 자료만 건네주고 가라고 했다. 혼자 점심을 먹었다). 여성 교인과 둘이서는 차를 타지 않는 게 나의 원칙이다."

- 교회 개혁이 실패로 끝났다. 
"목사의 왕 노릇을 개혁하기 위해 목사가 당연직 회장이었던 교회 당회와 제직회, 공동 의회의장을 장로와 집사로 바꿨다. 교회 재정은 투명해졌고, 교회 정관은 개혁적으로 바뀌었고, 교인만을 위한 교회에서 지역 주민을 섬기는 교회로 바뀌자 칭찬받는 교회, 존경받는 교회, 지역에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됐다. 교회는 건강해졌고, 교인들은 행복해했다. 여기까지는 대다수 장로와 교인들이 동의하고 동참했다. 

일차적으론 교회 개혁, 그다음은 한국 교회와 사회 개혁이 목표였다.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을 통해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만들라고 예수가 지시했다. 그런데 부임한 지 11년 되는
2007년 사건이 발생했다. 2주간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 장로들이 내 메일로 해임 권고를 일방 통보했다(방 목사를 따르는 지인들로부터 '쿠데타의 주역들은 보수 정당 지지자인 장로들이었다'고 당시에 들었다). 장로들은 교회 개혁에 대해선 힘들어도 동조했지만, 정치적 반대 입장인 사회 개혁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지지하는 교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해임을 거부하면 목사파와 장로파 간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아버님께서 '목사는 장로든 성도든 누구에게든 져야 한다. 교인에게 이기려고 하지 마라'고 가르치셨다. 교인들은 해임 권고를 무시하거나 거부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나를 해임한 장로들이 분립 개척을 허락해줘 20여 명의 교인과 함께 개척한 교회가 '함께여는교회'다."

젊은 교인 살리려고 신장 기증... '천사' 아내는 항상 용서한다

- '사랑의교회' 건축이 사회 문제가 된 것처럼 과도한 교세 확장과 교회 건축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반면 가난한 교회들은 전셋집과 월셋집을 전전한다. 하지만 '함께여는교회'는 전세든 월세든 그나마 예배당 건물도 없다. 예배당 없는 교회, 의도는 좋은데 불편하지 않은가. 
"우리 교회는 세상의 아픔이 교회의 아픔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배당만이 교회가 아니라 고난의 현장이 교회라고 믿기 때문에, 예배당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예배를 드린다. 함께여는교회는 예배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모으거나 쓰지 않기로 했다. 주일이면 100여 명의 교인이 서울 종로 파고다어학원의 이벤트 홀을 빌려 7년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감사하고 행복하다."

- 교회들은 왜 재정 공개를 왜 꺼리는가.
"어둠은 빛을 두려워하고 부패한 곳은 드러나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다. 교회를 욕망의 도구로 삼는 불의한 목사들이 국가 기밀도 아닌 교회 재정을 쉬쉬한다. 대다수 중대형 교회 목사들은 교회 재정, 행정, 운영을 좌지우지하며 왕 노릇 한다. 함께여는교회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목사로서 나는 지역과 사회를 위해 일하는 사회 선교사다. 내가 고난 받는 이웃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합의와 참여 때문이다. 교회의 배려 덕분에 교회 재정, 행정,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교회운영위원회와 교인들의 참여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교회가 운영되기 때문에 재정이 투명하고 잡음도 없다."

- 신장을 기증했다. 
"2004년 9월 1일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신장 기증을 결심한 것은 신장 투석으로 고통 받는 젊은 교인을 살리고 싶어서였다. 교인에게 직접 기증하면 그 교인이 불편할 것 같아서 다른 분에게 신장을 기증했고, 그 교인은 다른 사람에게 기증받는 릴레이 방법을 택했다. 젊은 교인은 6개월 뒤에 신장을 기증받았다. 

내 신장을 받은 분이 누군지는 모르고, 10년째 투석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수술을 끝내고 입원실에 있는데 그의 누님이 찾아왔다. 만나면 서로 민망할 것 같아 돌아가시게 했다. 신장기증으로 가장 미안한 건 아내다. 당시 아내가 유방암 4기로 투병 중이었는데 결심한 대로 수술했고 지금은 아내도 나도 건강하다. 단식할 때도 그렇고 아내에게 미안한 부분이 많다. 그런데 천사인 아내는 늘 용서해준다. "

"자식 잃고 애통해 하는데...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 보며 탄식했다"
 

   
▲ 단식 당시 의료진들이 방인성 목사의 건강을 체크하고 있다. ⓒ 방인성 제공

- 세월호 참사의 4월이 다시 오고 있다.
"참사 1주년을 앞두고 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특별조사위원회는 가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 여당과 보수 언론들은 세월호 유족을 농락하면서 국민과 분리하려고 혈안이다.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마저 짓밟히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싶다.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생명과 평화가 승리하는 부활의 역사는 반드시 온다."

- 지난해 광화문 광장에서 김홍술 목사와 함께 40일간 단식했다. 어떤 계기로 하게 됐나.
"세월호는 탐욕 정권과 탐욕 자본 그리고, 탐욕 사회가 일으킨 참사다. 탐욕스런 세상에 동조하거나 침묵했던 종교의 책임도 적지 않다. 성직자들은 유족의 아픔을 대신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물론이고, 정치권, 사회 지도층 등은 책임 회피에 급급한 가운데 유족인 김영오씨 혼자서 목숨 걸고 단식했다. 성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유족에게 떠맡긴 것 같아 참담했다. 너무 고민하고 계획하면 단식을 못할까 봐 준비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시작했다."

- 애초에는 4대 종단이 함께하기로 하지 않았나.
"가톨릭, 불교, 원불교, 개신교 등 4대 종단에 단식을 제안했는데 사정상 개신교 목사만 시작했다. 목사만 했다고 으쓱한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4대 종단 성직자와 시민의 지지와 격려에 힘입어 단식했다. 신장 한쪽뿐인 몸으로 40일 단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공해와 소음에 시달리면서 길바닥에서 자려니 힘들었다. 먹고, 싸고, 자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다시는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빈다."

- 힘들지 않았나.
"가장 힘들게 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날은 단식 19일째인 지난해 9월 14일, 그 날은 주일이었다. 교회에 가서 설교를 마치고 왔더니 지쳤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등산복 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단식 19일'이란 명찰을 보더니 '어떻게 밥을 안 먹고 19일을 살 수 있느냐. 사기 치지 마라. 몰래몰래 밥을 먹으면서 단식하는 것을 다 안다. 강북 땅값 떨어지니까 단식하려면 강남에 가서 하라'고 야유하는 것이었다. 사기 친 것은 정부, 여당과 언론인데 나를 사기꾼 취급했다. 억울했다. 땅값 운운할 때는 절망스러웠다. 인간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돈에 환장한 사람,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을 어찌할꼬, 어찌할꼬...'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 위험한 고비는 없었는가.
"의사들은 한쪽 신장으로 40일간 단식은 무모하다고 했다. 나보다 의사들이 더 긴장했다. 의사들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까 봐 아침 저녁으로 건강을 체크해줬다. 위기가 몇 번 발생했다. 한 번은 목욕탕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같이 단식한 김홍술 목사가 부축해줬다. 김 목사가 없었다면 큰 사고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 김 목사가 단식 동지로 버텨주어 단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고난 받는 사람과 함께하면 행복하다"
 

   
▲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아래 왼쪽)와 예수회 김정욱 신부(아래 오른쪽), 단원고 희생자 박성호군의 이모인 정말가리다 수녀(위쪽 맨 왼쪽)가 방인성 목사(위쪽 가운데)와 김홍술(위쪽 오른쪽) 목사를 위로 방문했다. ⓒ 방인성 목사 제공

- 지난 부활절(5일)에 예수는 부활했나. 
"작은 생명으로 부활했다. 낮은 곳에서 부활했다.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부활했다. 대립이 아닌 조화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부활했다. 하지만 예수는 거대한 교회와 거대한 십자가에서 또 능욕을 당했다. 장사꾼 중에도 상도덕을 중히 여기는 장사꾼이 있는데 종교 장사치들은 장사꾼보다 도덕성이 형편없다. 불법 예수 장사, 예수를 욕보이는 짓들을 중단해야 한다."

- 왜 그렇게 힘든 길만 골라서 가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고 가르친 것처럼 고난 받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고난의 현장은 외면한 채 교회에만 있으니 예수가 울고 있는 것이다. 

고난받는 이웃을 보고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 나는 더 힘들다.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행복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예수 때문이고, 그 다음은 순교하신 할아버지(방계성 목사)와 시골 목회자였던 아버지(방정원 목사)가 물려준 DNA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길을 계속 갈 계획인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서 삼손 카라스코는 돈키호테의 묘비에 '미쳐서 살았고, 정신 들어서 죽었다'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권력자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는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세상은 체제에 순응하면 '정신 차린 사람', 역행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한다. 그래서 나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다가 정신 차려서 죽을 계획이다. 나의 묘비명에 '미쳐서 살다가 정신 차려서 죽은 행복한 목사'라고 새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는 이루지 못했지만 이룰 만큼 이루었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떠나면 좋겠다."

조호진 기자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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