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와 켈틱 영성이 입맞출 때까지
복음주의와 켈틱 영성이 입맞출 때까지
  • 박총
  • 승인 2009.09.09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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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서로 보충하여 온전케 함이라

혹시 교회에서 회개 기도를 하자고 하면 속죄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자주 회개, 회개하는 탓에 '회개'란 말 자체에 눌린 적은 없는가? 한시라도 예수의 보혈을 힘입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갈 수 없는 죄인임을 알면서도 거듭되는 회개가 나의 영적 소진(spiritual burnout)을 해결해줄 수 없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은 없는가? 영성 지도(spiritual direction)를 하시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죄악된 삶으로 인해 영적인 눌림과 신앙적 스트레스가 더 많다고 한다. 왜 그러할까?

최근 이러한 문제가 영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주위에 영성 전공하시는 분도 있는데 굳이 내가 영성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지만 혼자만 알고 넘어가기엔 소중한 깨달음이 있어 이를 독자들과 나누어보고자 한다(이 글에서 풀어낸 켈틱 영성에 대해서는 J. 필립 뉴웰(J. Philip Newell)이 엮은 켈틱 기도문 Celtic Benediction의 서문을 참조했다. 고맙게도 그는 복음주의적 관점을 견지한 켈틱 영성 전문가로 보인다. 관심 있는 독자는 켈틱 영성을 자세히 소개한 뉴웰의 다른 책 <The Book of Creation: an Introduction to Celtic Spirituality>를 참고하면 좋겠다).

지중해 영성 vs. 켈틱 영성

▲ 지중해 영성은 익숙하지 않지만 한국 교회 역시 지중해 영성의 한 지류로 볼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지역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지중해 영성 (Mediterranean Spirituality), 켈틱 영성 (Celtic Spirituality), 그리고 동방 교회의 영성 (Eastern Orthodox spirituality)이 그것이다. 지중해 영성이란 말이 익숙하진 않지만 기독교가 본래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고 이것이 북미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영성은 지중해 영성의 한 지류라고 볼 수 있다.

로마 멸망기 유럽의 전화(戰火)를 피해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자라난 켈틱 영성(Celtic Spirituality)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고, 서로마와 갈라선 이후 독자적인 길을 걸어온 동방 교회의 영성은 그 유명한 '예수기도'를 빼놓으면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실제로 지중해 영성의 본질을 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향과 고스란히 포개진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죄사함으로 알고 있듯이 지중해 영성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뼈저린 자각과 그리스도의 가이 없는 속죄를 쉼 없이 고백한다.

지중해 영성에 의하면 죄악으로 버무려진 세상에서 낙을 구하기보다는 영원한 곳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추구할 삶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에 방점을 놓고 있는 지중해 영성이 영과 물질을 분리시키는 경향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한국 교회는 20년이 넘는 기독교 세계관의 세례가 무색하게도 뿌리 깊은 이원론의 악습을 좀처럼 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중해 영성과는 달리 켈틱 영성은 그리스도의 속죄보다는 하나님 창조의 선함(the goodness of God's creation)에 방점을 찍는다. 죄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흐릿하게 하고 창조 세계를 비릿하게 했지만 본래의 빛깔과 향기를 다 지우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세상에 깃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세상은 그분 때문에 여전히 살만한 곳이며 이 땅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보다는 그분의 은총이 가득 찬 세상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구속 영성(redemption spirituality)에 목을 매는 반면 창조 영성(creation spirituality)에 대해서는 지나치는 수준으로 언급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의 신앙은 앞엣것보다 뒤엣것에 더 깊이 닻을 내리고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두 권의 책이 있다고 믿어진다. 한 권은 성경, 즉 '말씀의 책'(The Book of God's Words)이고, 다른 한 권은 '창조의 책'(The Book of Creation)이다. 우리가 기껏 야유 예배를 하거나 시편 19편 정도를 읽을 때에만 후자의 책갈피를 들척이는 반면, 켈틱 영성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신비와 말씀을 보여주는 책(冊)임을 잊은 적이 없다. 지중해 영성의 지배를 받은 서구 문명이 영과 물질을 구분하는 고질병에 걸려 오늘날의 생태적 위기를 야기한 것을 생각해볼 때, 창조의 선함을 즐기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찾는 켈틱 영성이 서구 사회를 지배했었더라면 오늘날의 물질 문명은 조금은 다른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켈틱 영성에 젖은 이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죄성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찬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하듯이 그렇게 집요하게 반복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신 이들은 한국 교회 교인들이 놓치고 있는 일상의 선함과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생활의 소소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선함을 즐기는 그네들의 모습은 실로 부럽기까지 하다.

식사 기도의 영성

▲ 식사 기도를 봐도 우리가 얼마나 영적 충만함에 대한 간구를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두 영성에 대한 신학적 고찰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늘 하는 식사 기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양자 간의 차이점이 자연스레 도드라진다. 우리는 보통 식사 기도를 하면서도 음식 자체에 대한 언급보다는 식사 이후의 삶을 놓고 구하기 일쑤다. 이를 테면 음식을 먹고 더 힘을 내서 주께 헌신하게 해달라든지, 이후에 이어질 사역에 기름을 부어달라든지 하는 기도가 대부분이다. 이런 기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이러한 식사 기도야말로 창조 세계의 선함을 노래하기보다 영적인 충만함에 대한 간구를 중시하고, 일상 속의 소박한 기쁨보다는 종교적 헌신을 더 중시하는 우리의 영성을 고스란히 내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에는 William John Fitzgerald가 엮은 <A Contemporary Celtic Prayer Book>에 소개된 점심 기도문을 함께 읽어보자.

Monday Lunch Blessing
Bless my Monday quests.
Bless the fruit of the earth.
Bless the hands of farmers.
Bless the hands of workers.
Bless the texture and colors of my food.
Bless those who gather.

Bless the breaking of bread.
Blessed Be! Blessed Be! Blessed Be!
Christ at every table,
Christ beside me,
Christ behind me,
Christ around me,
In the breaking of the bread.

이 얼마나 식사 자체에 충실한 기도인가! 이 평범한 식기도 한 자락이 일상 속에서 꽃피어난 생활 신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음식의 맛과 향, 질감을 노래하고, 음식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고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고, 심지어 서빙하는 이와 설거지하는 이까지 생각하는 이 기도는 음식에 나타난 창조 세계의 선함을 만끽하느라 이 밥 먹고 힘내서 교회에 더 충성, 봉사하게 해달라는 식의 '도구성 기도'를 할 겨를이 없다.

사실 식사만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릇된 위계질서(hierarchy)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업도, 결혼도, 식사도, 교제도, 놀이도 영적인 것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가 되고 만다.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을 가멸게 하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이원론적 환원(dualistic reduction)만이 남게 된다.

서로 보충하여 온전케 하려 함이라

내가 켈틱 영성의 장점을 약간 치켜세운다고 해서 지중해 영성의 고갱이인 구속의 신학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뿌리 깊은 죄성은 더할 나위 없이 강조되어야 하고 그만큼 속죄의 은혜도 깊이 각인되어야 한다. 실제로 주님을 알아 가면 갈수록 우리가 얼마나 죄 많은 사람인지 깨닫게 되질 않던가. 바울이 말년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the worst of sinners)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영어 번역에서도 보듯이 여기서 괴수는 괴물이 아니다. 죄인 중 최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편중되게 강조하다보면 반드시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가 생긴다. 서두에 내가 언급한 지속적인 억눌림으로 인한 자유함의 상실이라든지, 영적 소진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결과이다.

▲ 우리는 창조 세계의 선함과 신비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물론 속죄의 은혜를 깊이 느낄수록 자유함과 영적 충만함도 그만큼 깊어진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왜 같은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과 창조 세계의 선함과 신비를 강조하지 않는가? 나의 죄인됨과 이에 따른 예수님의 구속을 날로 깊이 체험하면서도 내 안에 보존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희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의 타락을 절감하고 또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으면서도 그분이 계시기에 인생은 여전히 아름답고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임을 노래할 수는 없는 것일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세상의 죄악을 아파하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죄악과 맞서 싸우는 투쟁의 영성(spirituality of combat)이 같이 갈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내가 보수 신앙을 고백하며, 복음주의 교회에 속해 있고,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해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로 인해 주께 감사를 드린다. 내가 속한 이들 전통은 참으로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전통, 어떤 교파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을 갈수록 절감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지중해 영성과 켈틱 영성을 비교하면서 살펴본 구속과 창조의 불균형은 그 불완전한 사례 중의 하나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속한 우물에서 꾸준히 물을 길어먹으면서도 우리에게 부족한 자양분을 다른 전통에 속한 자매형제의 우물에서 보충할 필요가 있다.

구속 신앙에만 치우친 우리들이 켈틱 영성으로부터 창조의 선함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듯이 전쟁과 정복에만 익숙한 우리는 메노나이트 자매형제를 통해 평화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복음의 사회정치적 에너지를 잃어버린 우리들은 해방 신학에 투신한 형제에게는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려는 거룩한 도전을 받게 되고, 오순절 교회의 자매들로부터는 우리가 평소 제한하는 성령의 폭발적 능력을 문자적으로 체험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와 소비 문화가 성경적이라고 믿는 우리들은 폴 리꾀르와 같은 유럽의 사회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다른 사회정치적 관점도 성경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A Generous Orthodoxy>라는 책 제목이 보여주듯 정통(이라고 믿는 바)을 견지하되 다른 전통에 대해서도 관대하고 겸허한 자세로 배우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각양각색의 자매형제를 이 세상에 두신 이유이다. 각양 다른 강점을 받은 지체들이 서로 연합하여 전체를 이롭게 한다는 말씀(고전 12장)은 개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교회에, 나아가 우주적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어떤 교단이나 교파도 진리와 선물을 독점한 듯이 오만하지 않게 하시고 대신 겸손하게 허리를 동이고 서로 배우게 하신 아버지의 깊은 속뜻을 내밀히 묵상해보도록 하자.

박총 /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밀월일기> 저자

* 이 글은 <큐티진> 2008년 10월호에 실린 원고를 수정, 확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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