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과 류달영, 제자에서 사돈으로
김교신과 류달영, 제자에서 사돈으로
  • 양재영
  • 승인 2015.04.2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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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 첫째며느리 김(류)인숙 장로 인터뷰

4월 25일은 김교신 선생 서거 70주기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로,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의 사상을 재해석한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한국 교회사의 큰 획을 그었던 김교신 선생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된 후 석방되었으나 해방 100일 전에 흥남에서 별세한다.

서울에선 작년 11월 김교신 선생 서거 70주년을 맞아 이만열, 양현혜 교수 등이 중심이 되어 ‘김교신 기념사업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김 선생의 수제자 성천(星泉) 류달영 선생(1911~2004)의 장녀이자, 김 선생의 첫째 며느리인 김인숙 장로(평화의 교회)를 토랜스 자택에서 만날 수 있었다. 류달영 선생은 김교신 선생의 애제자로 출발해 김교신 선생 사후이기는 하지만 사돈을 맺게 된다. 김교신 선생 별세후 그의 가정을 돌보던 류달영 선생이 김교신의 장남을 사위로 받아들인 것이다. 류달영 선생은 수원농림고등학교(현재의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공부한 대한민국의 대표적 농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다. 오랫동안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 후에도 사회 운동을 지속해온 류달영 선생의 장녀 김인숙 장로 역시 서울대 농대를 졸업했다.

 

   
▲ 유달영 선생과 김교신 선생

- 반갑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며느리로서 서거 70주년을 맞는 느낌이 남다를 것 같은데.

저희 시아버지 생신이 4월 18일인데, 생신상 잡수시고 일주일 후인 1945년 4월 25일에 돌아가셨죠. 1901년생이니까, 44세에 해방을 100일 앞두고 돌아가셨습니다. 올해로 70주기라니 세월 참 빠릅니다.

시아버지는 12살, 시어머니는 16살에 결혼하셔서, 2남 6녀를 두셨는데, 남편은 넷째 딸 놓고 다음에 태어났죠. 우리 시할머니는 35세에 첫 손녀를 보신 겁니다. 시어머니는 49세에 막내를 낳았죠. 시아버지가 4월 25일에 돌아가시고, 8월 11일에 태어났으니까 유복자였죠.

-김 장로님의 아버지인 류달영 선생과 김교신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저희 시아버지가 서울역 뒤에 있는 양정고보(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었어요. 그때 저희 아버지는 경기도 이천에 사셨는데, 외삼촌께서 공부더하라고 서울로 보내셔서 양정고보에 들어갔죠.

당시 양정고보는 이조의 엄비가 세운 학교라고 해서 엄씨학교라고 했는데, 아마 지금도 엄씨들이 그 학교를 관여할 거예요. 그때는 5년제였는데,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시아버지가 담임을 하셨어요. 그때 시아버지 눈에 들었죠. 우리 시어머님 살아계실 때 '120점을 주면 딱 좋겠다'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시아버지의 애제자였어요.

결국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돈까지 되었죠. 남편이 당시 서울상대를 다녔는데, 저희 집에 와서 저에게 여러차례 청혼을 했어요.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집안이 말이 아닐때였죠. 친정아버지가 스승에 대한 안타까움에 결혼을 허락하셨고, 결국 1956년에 결혼했는데 제 인생의 고생의 시작이었어요.

- 김교신 선생은 어떤 분이셨나요?

   
▲ 김교신 선생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기신 분이셨죠.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다니실 때 일본여자들이 많이 쫓아다녔어요. 우리 자녀들도 키가 5피트 11이 넘고, 손주들은 6피트가 넘죠. 가늘고 쫙 뻗은 외모셨어요.

운동도 아주 잘해 스케이트, 등산, 농구 등 못하는 게 없었죠. 일본 동경에 있을 때 손기정 선수 트레이너를 할 정도였으니. 손기정 선수가 차를 타고 앞에 가시는 시아버지 모습을 보며 뛰었다고 하더군요. (손기정 선수는 후에 도교에서 치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 한 후 “오직 (김교신) 선생님의 눈물만 보고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려서는 몸이 굉장히 약했는데, 일본가서 기독교를 배우시면서 체격이 좋아지고, 평생 내복을 안입고 사셨을 정도였어요. 기다란 체격에 뚱뚱하지도 않으신데 힘이 아주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냉수마찰을 즐기셨는데, 어딜 가시더라도 하셨다고 해요. 심지어 감옥 안에서도 수건에 물을 적셔 하셨을 정도이니.

- 김교신 선생의 별명이 ‘양칼’ 이었다고 하던데.

저희 시아버지 머리가 곱슬머리였어요. 우리 남편도 그렇고. 시아버지나 우리 남편은 조금도 흐트러지는 걸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늘 머리를 빡빡깍았죠. 외모만 그런게 아니라 성격도 그랬어요. 뭐든지 분명했고, 인정사정 없었죠.

한복을 늘 단정하게 입고 예배 보시고 했다고 해요. 어디 빈구석이 한군데도 없는 분이셨죠. 어느날 누군가와 장기를 두었는데, “내가 이걸 하느라 성서조선 교정할 시간을 다 놓쳤다”고 깊이 후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만큼 무슨 일을 하더라도 철저하셨죠.

반면에 눈물은 많았어요. 제자들에 의하면 정의로운 일엔 맨날 눈물을 흘린다고 할 정도였고, 최영신 선생에 대해 아버지가 쓰신 것을 보시면서 수건을 적실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해요.

솔직히 가족에 대해서는 냉정(김장로는 ‘냉혈’하다는 표현까지 썼다)하셨어요. 차갑고 포용해주는 것 없었고, 혼도 많이 내셨다고 해요. 우리 시어머니도 같으셨죠. 하지만, 정의로운 데에는 감격해서 눈물을 많이 흘리시는 분이셨어요.

반면에 우리 친정아버지는 따뜻하고 다정하셨어요. 친정아버지는 자기 일생에 우리 어머니 외에는 없었어요. 개성살 때 호수돈 여학생들이 많이 왔어어요. 옆집 분들이 “저렇게 말만한 여학생들이 가득한 데 불안하지 않아요?”라고 물곤 했지만, 우리 어머니는 남편을 한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면에선 아주 깨끗했어요.

- 김교신 선생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개성송도고보에 계실 때 우리집 근처에 사셨어요. 시아버지랑 잠깐 같이 살기도 했는데, 제가 10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려서 기억이 별로 없어요. 제가 1956년 김교신 선생 장남과 결혼 한 후 주로 시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분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시할머니 말로는 공부도 엄청 많이 하셨다고 해요. 밤새도록 서재에서 공부하면 시할머니는 잡술 것을 해드렸다고 해요. 시할머니는 늘 “나나 너희 시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아 꿀같이 자는데, 새벽잠을 안자고 4시면 어김없이 북한산 골짜기에 새벽기도를 나갔다 출근했다”고 말하며 '무쇠'같이 사셨다고 말하셨죠. 한 번도 충분한 잠을 못 주무셨는데, 아마도 자기에게 주어진 수명이 길지 않은 걸 예감하셨는지...

- 류달영 선생이 기독교인이 되고, 농민운동을 하게 된 것도 김교신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하던데.

저희 시아버지도 일본에 가시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몰랐어요. 원래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러 가셨다가 후에 박물학과로 바꾸셨죠. 일본에 가셔서 하루는 길을 가는데, 구세군이 예수믿으라고 하는 것을 보고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하더군요. 함흥 사실때는 기독교라는 것을 모르셨던 것 같아요.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1861-1930) 선생을 만나고, '무교회주의'를 배우게 되었죠.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로마서 강의 등의 성서 강연을 7년간 참가했다고 하니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요. 저희 아버지도 양정고보에서 시아버지로부터 기독교를 알게 되었죠.

(류달영 선생은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을 교정하며 성경을 처음 접했고, 양정고보에서 기독교 신자가 됐지만, 다른 학교 갔다면 절대로 기독교 신자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저희 시아버지는 친정아버지가 영어를 잘해 세브란스 선교사들에게 보내 공부도 시키고, 미국으로 유학시켜 의사 만들려고 했는데, 저희 아버지는 “의사되면 나는 편하고 부자되어 살겠지만, 농민들이 몽매해 못사는데, 나만 잘 살수 없다” 하시면서 수원농림고등학교에 들어가셨죠. 당시 한국사람은 하나 아니면 둘 밖에 안 뽑을 당시였어요. 다 일본사람들 뿐이었죠.

졸업 후 교수나 총독부 관리 노릇하라는 걸 거절하시고 개성 호수돈여고보 교사로 가셨어요.

- 류선생님이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최용신의 전기를 출간하셨죠.

저희 친정아버지가 글재주가 아주 좋았어요. 시아버지가 저희 친정아버지에게 당시 경기도 화성에 있던 샘골에서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며 계몽운동을 하던 최용신(1909~1935)선생의 전기를 써보라고 했죠. 그 전에 심훈이 <상록수>를 썼지만, 그건 소설이니까 사실하고 상당히 멀었어요.

최용신은 함경도 여자였는데, 그 분을 직접 도와주면서 <최용신 소전>을 썼죠. 그 책을 저희 교회 도서관에 갔다 놨더니 없어졌어요. 저도 한권밖에 없어서 누굴 주지 않고 소장하고 있죠.

   
▲ 어린이 대상의 농촌계몽운동과 최용신 선생

- 김교신 선생이 돌아가신 상황을 설명해주세요.

시아버지의 글은 간단하고 명료해서 수필가로서도 유명했어요. 동양에서 이만한 글이 없다고 하실 정도였죠. 시아버지는 당시 직접적인 표현을 할 수 없어, 항상 독자들에게 내 글의 사이를 읽으라고 말씀하셨어요.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함석헌, 송두용 선생 등이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셨죠. ‘성서조선’ 158호가 종간호인데, 그때 게재한 ‘조와’(弔蛙, 1942년 3월)가 발단이었어요.

시아버지가 하루는 새벽기도를 가시는데, 송악산 밑에 있는 쌍폭포라는 폭포가 있었는데, 폭포가 쏟아지니 웅덩이가 생겼겠죠. 새벽기도를 가시다보니 그곳에 개구리가 얼어 죽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아직도 살아 있는 게 몇 마리가 있더란 거예요. 그래서 쓰신 게 ‘조와’에요. 개구리를 추모한다는 것인데, 일본이 조선사람을 다 말살시켜도 살아 있는 몇몇은 있다는 뜻으로 쓰셨는데, 이걸 일본 형사들이 보고, ‘악질 중에 악질’이라고 해서 다 잡아간 거죠.

조와(弔蛙)  /    김교신 (1900-1945)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다. 층층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연못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연못 속에서 솟아나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마련해 준 성전이다.

이 반석 위에서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크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찬송하다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연못 속에서 바위의 색깔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 속에 큰일이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새로 온 손님에게 접근하는 친구 개구리들. 때로는 5,6 마리, 때로는 7,8마리.

늦가을도 지나서 연못 위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하더니 개구리들의 움직임이 날로 날로 느려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연못의 투명함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고막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소식이 막힌 지 무릇 수개월 남짓!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얼음 덩어리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연못 속을 구부려 찾아보았더니 오호라, 개구리 시체 두세 마리가 연못 꼬리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연못의 적은 물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얼어 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현대어 번역 www.biblekorea.net)  

시아버지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계신 후 불기소 처분되어 나와서, 취직할 수 없다가 고향인 함흥 근처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한인 노무자 5천명의 수장이 되어 제자들과 친구들을 부르셨죠. 흥남질소비료공장은 군수품 공장이라 징용을 대신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도 부름을 받아서 거기로 가셨는데, 그곳이 아주 더러웠어요. 결국 ‘이’로 전염되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죠.

시할머니는 22살 때 청상과부가 되셨는데, 그때 시아버지가 3살이었어요. 시아버지 집안은 결핵이 걸릴 확률이 높은 체격이었죠. 시할머니는 김교신 선생을 남편삼아, 아들삼아 사셨는데, 그래서 시아버지 돌아가고 난 다음 시할머니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어요.

- 김 장로님이 이곳에서 진보적 교회를 다니시는 것도 무교회주의와 관련이 있습니까?

(김장로는 미주지역 통일운동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고 홍동근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선한 사마리아 교회 교인이었다. 홍동근 목사의 친북논란으로 교세가 축소되던 즈음 그 교회 교인 일부가 통일운동보다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평화의 교회(해람장로교회)로 옮겨온다.- 편집자 주)

무교회주의자들의 예배라고해서 특별할 것은 없어요. 목사가 없으니 세례를 받지 않고, 성찬이 없다는 것뿐이지 집에 와서 공부하고, 예배보고, 기도하고 했죠. 그분들에게 무교회주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무교회주의자들은 정말 성경공부를 많이 했어요. 우리 남편 동생도 골로새서를 희랍어로 번역할 정도였으니까. 그들은 예수님 말씀 배우는 것에 대해 아주 철저했죠. 보통은 저희 집에서는 아버지가 하시고, 시댁에서는 시아버지가 주관하시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같은 자녀들은 그냥 대학생들 오면 같이 예배 보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어요. 솔직히 저는 시집가서 하도 힘든 생활을 하니까, 하나님께 욕이 먼저 나오더라고요.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고. 너무 불공평하다고. 그래도 하나님 덕분에 이렇게 80세까지 살게 된거죠.

우리 큰 며느리가 백인인데, 페트로손 목사(기사 뒷 부분에 나오는 석진영 선생의 남편으로 네덜란드계 미국인)가 준 성경을 걸레가 되도록 읽었어요. 교회를 열심히 나가는데 성경공부도 개인적으로 정말 많이하죠. 믿음하고 공부는 많이 틀린 것 같아요. 내가 끌어서 물까지는 데려 갈 수 있어도 마시는 것은 본인이죠. 믿음도 그런 것 같아요.

솔직히 요즘 교회를 다닐 데가 없어요. 목사들이 너무 책을 읽지 않아요. 성경에 대한 공부도 부족하고요. 교회만 크고 사람만 많으면 뭐합니까. 도떼기시장 같고. 건물로 하는 교회나 편협한 근본주의를 싫어해요. 그나마 진보적인 교회 목사들이 독서량은 많으니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설교를 들어낼 수 있어요.

   
▲ 지난 19일 평화의 교회에서 김인숙 장로의 80세 생일잔치가 조촐하게 열렸다. 김장로는 자녀들이 어릴 때인 40대에 남편과 사별했다. 이후 2남 1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내 주위의 존경을 받아 왔다. 뒷줄 왼쪽 부터 막내딸, 장남 내외 © <뉴스 M>

- 김교신 선생이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과의 관계도 밀접하다고 들었습니다.

다석 선생님과는 큰 관련이 없으셨지만, 시아버지는 늘 그 분을 선생님으로 여기셨죠. 함석헌 선생은 다석 선생의 제자라 할만했죠. 함 선생은 아주 인물이 좋으셨고, 그로인해 문제가 많았죠. 결국 그것 때문에 다석 선생으로부터 내침을 당했고요.

다석 선생은 동경 물리학교를 다니신 이공계에서도 뛰어난 천재셨어요. 친정아버지 말로는 서양신학자들도 다석의 학문이 50년 앞섰다고 놀란다고 하더군요. 그분은 하루 한끼만 드시고, 일찍부터 부부관계도 정리하시고 아내는 아랫목에 자신은 윗목에 널빤지를 깔고 주무셨어요. 편하게 사시는 걸 부끄러워하셨죠. 다석 선생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으셨지만, 그 자녀들이 한결같이 천재였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 였습니다.

- 이곳에서 <복음의 전령>이란 잡지를 내셨죠?

제가 이곳에서 고(故) 석진영 선생(서울대 국문과와 Lutheran Bible Institute를 졸업한 시인으로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 여성지도자로 유명했다. 2002년 별세- 편집자 주)과 18년동안 ‘복음의 전령’ (The Christian Ambassador)이란 잡지를 출판했죠. 사무실이 부에나팍에 있었는데,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밤에 모여 잡지 편집하고, 편지 보내고 새벽 1시 넘어서까지 일했죠.

석진영 선생이 함석헌 선생을 좋아했어요. 찬송 ‘눈을 들어 하늘보라’를 작사하시기도 했고요. 23년 동안 137권을 발행했으니 참 열심히 했었죠. 우리 같은 평신도들이 모여 잡지를 낸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민 생활은 우리 때가 더 힘들었는데 그래도 평신도들이 바른 신앙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평신도들은 이민생활 힘들다는 이유로 성찰이 부족하고 맹종과 맹신만 있는 것 같아 아쉬워요.

 

양재영 기자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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