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그 '비판적 사유'의 부재함
대통령, 그 '비판적 사유'의 부재함
  • 강남순
  • 승인 2015.05.01 03: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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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혁명의 바람이 일었으면
   
▲ 강남순 교수 ⓒ <뉴스 M>

1. 남미순방 이후 귀국하여 보인 대통령의 행보를 보며 대의민주주의의 지독한 한계를 다시 느낀다. 그 대통령속에서 나는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던 '비판적 사유'가 철저히 부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책을 읽으며, 어떠한 사유와 성찰을 하면서 대통령이라는 그 엄중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어떠한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지도력을 성숙시키고 확장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아침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까. 그의 언어에서, 언술의 내용에서, 하다 못해 표정과 몸짓에서조차 이러한 '사유함'의 흔적을 참으로 느끼기가 힘든 것은 내가 유난히 까다로워서 인가.

2. 국민들이 '다수결'로 뽑은 대통령, 그 '다수결'의 정체란 과연 무엇인가. 그 '다수'들이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종합적'판단을 하지 못/안하고 있을 때, 여전히 그 다수결에 의존하여 강력한 통치권을 지니고 다양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시간으로 4월 29일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인천서구 강화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안상수 의원(새누리당)의 선거 포스터. 인간의 욕망을 치밀하게 자극한 내용으로 누리꾼들의 냉소적 관심을 끌고 있다. 

3. 한때 미국에서는 흑인과 여성들은 '영원한 미성년'으로서 그러한 '종합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그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었다. 미국의 여성들은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종합적 판단'능력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1848년부터 공식적으로 투쟁을 시작하여 1920년에야 비로서 참정권을 얻게 되었으니, 70년 이상을 투쟁하여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아무런 투쟁없이 서구로부터 모든이들에게 주어지는 그 '참정권'을 거저로 받았다. 투쟁이 결여된 채 '무임승차'하여 이 민주주의의 꽃이라고도 하는 '참정권'을 받게 된 우리 한국사회를 보면서, 나는 이 아무런 투쟁없이 거저로 받게된 참정권의 의미가 값싸게 행사되어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4. 인간이 지닌 지독한 양면성은 진정한 '지식/앎'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준다. 인류의 보편가치인 정의, 평등, 평화를 위해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속에서 끊임없이 창의적인 '개입'을 하는 '신적' 얼굴, 그리고 그 정 반대로 타자의 고통과 죽음에 철저히 무관심할 뿐 아니라, 그들을 괴롭히고 죽이기 까지 하는 소위 '악마적' 얼굴이 사실상 대부분의 인간속에 공존하기도 하고, 한 사회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이러한 양가성의 가능성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자기깨움침과 훈련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자신이 또 다른 자신과 나누는 대화'라고 규정될 수 있는 '비판적 사유'란 이러한 자기 자각과 인식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차원에서의 세계 정치적 또는 경제적 불평등과 불의의 정도는 50년 또는 100년 전의 세계가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며, 미래에 더욱 그 불평등의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지식의 증가가 인류의 진보를 이루는데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존 로크나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칸트는 지식의 증가 자체가 인류의 진보 자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그 지식이 "적절한 목적"을 이루는데에 쓰여질 때에만 지식이 인류에게 중요한 구속적 의미와 힘을 부여하는 의미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6. 한국을 생각하면서 거대한 혁명적 변혁이 불가능한 이 시대에 이런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한 개별인들의 자신을 보는 방식, 타자들을 보는 방식, 세계를 보는 방식을 조금씩이라도 바꾸고 그 지평을 넓히는 작은 모임들이 --그것이 독서모임이든 대화모임이든-- 여기 저기 많이 생기는 것; 그래서 "지적유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별인들의 "관점'들이 확장되고 성숙하는데에 중요한 통로를 마련하는 작은 공간들이 여기 저기에 생기는 것; 단순한 '지식의 증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지식이 어떻게 '적절한 목적'을 이루는데 쓰여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은 모임들이 생겨서 무수한 '작은 혁명'의 바람을 소리없이 불러일으키는 것; 그래서 총체적인 '비판적 사유의 부재'가 한국사회를 뒤덮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서로를 든든하게 붙잡아주는 것--이러한 작은 모임들이 불러일으킬 작은 혁명들을 꿈꾸어본다. 이러한 작은 모임들의 확산이 언젠가는 한국이 '다수결'의 의미가 살아나는 사회로 전이하는데에 중요한 터전이 되지 않을까?

 

강남순 교수 / 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이 글은 한국에서 재보선이 있기 전인 4월 28일 강남순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로 재보선 이후의 한국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필자의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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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2015-05-01 15:09:59
페북에도 말씀드렸지만 참정권을 거져받아 값싸게 쓴다는 논리는 그자체가 인권을 무시하는 말이 될수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참정권을 거져 얻은 사회도 아니거니와 미국 시민권 운동을 통한 흑인들의 참정권 획득은 미국사의 치욕 그자체입니다. 참정권은 인권이고 인권에 무슨 비판적 사유가 부족하다고 그 값어치를 논하는것은 논리적 사고의 비극처럼 느껴집니다. 박통을 뽑게된 사회적 배경을 비판하는것이 옳지 인권자체를 거져얻어서 헤프게 쓴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