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교회(?)
출산 교회(?)
  • 최주훈
  • 승인 2015.05.0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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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따라 별도로 드리는 예배, 과연 성과는

우리교회는 좀 특이하다. 교회 크기에 비해 미취학 아동들은 많은데 있을 법한 ‘자모실’이 없다. 그렇다 보니 주일 오전 예배는 온 가족이 어쩔 수 없이 함께 모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경건’(?)해야 할 예배시간에 아이들이 돌아다니거나 울거나 떼를 써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는다. 지난 주일에는 감히 강단 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저벅거리며 올라온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별일 아니라는 듯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웃고 만다.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사뭇 달라진 교회 풍경이다.

4,5년 전만 하더라도 예배시간에 아이들 구경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 열리길 기대'하는 것과 같았다. 젊은 부부들도 거의 없었거니와 어린 자녀가 있어도 교회에 함께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데려올라치면 투정거리고 우는 통에 아이 엄마나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불편해 했다. 엄마들 표현대로 하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레이저 광선을 한 몸으로 받아내다가 뒤통수에 화상 입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주변에서 쏟아지는 눈초리가 무서워 노이로제 걸리고, 교회 나오기 싫다고 고해성사를 할 정도였으니, 주일에 아이와 함께 예배 오는 가족 보기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명절날 설빔 보는 빈도나 비슷했다. 자연스레 젊은 부부들은 교회에 나오는 것을 극히 자제(?)했다. 그런데 오래된 신자들 입에선 ‘요즘 젊은 것들은 애들 신앙교육을 하나도 안 시킨다’며 사라진 젊은 세대를 탓할 뿐이었다.

이런 문제의 해법으로 ‘자모실’을 교회 본당 뒤편에 만들어 달라는 정식 건의가 있었다. 실제로 자모실 만들기 위해 견적도 내보고 새 단장을 하려고 했는데 이젠 그 소리가 쏙 들어갔다. 더욱이 엄마들을 공격하던 레이저 부대도 이젠 전투력이 많이 상실되었는지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돌아 다녀도 누구 하나 제지 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시선이 달라지니 유초등부 아이들이 어느 샌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희한한 현상이 하나 더 있다. 꼬맹이들이 늘었으니 당연히 더 시끄러울 텐데 전혀 반대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 사이에 앉아 종알거리며 예배의식문에 나오는 기도와 찬송을 따라 하기도 하고, 엄마 아빠는 신기한 듯 사랑의 얼굴로 아이를 바라본다. 매주 나누는 성찬 때 아이들은 부모 손을 잡고 제단으로 나와 고사리 같은 손을 곱게 모은 채 축복기도를 받는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들도 뒤뚱거리며 나오고, 예배시간에 사탕 빼앗긴 아이는 성찬 때 앞에 나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 아빠의 만행을 나에게 ‘고자질’하기도 한다. 우는 자와 함께 같이 울어 줘야 할 텐데, 나도 그렇고 주변에 있는 모두 미소가 가득하다.

이 모습은 우리 교회에서 매주 예배시간에 일어나는 실제 상황들이다. 매주 제단 앞에서 목사가 자기 자식 붙잡고 축복기도해주는 교회를 마다할 아이 엄마가 어디 있고, 모두가 함께 사랑의 미소와 눈길로 지켜 봐주는 교회를 싫다고 말할 성도가 어디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교회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이유가 있다. 내 진단으로는 그 동안 꾸준히 가르친 예배 신학 때문이다. 예수님도 강조했고, 초대교회도 그러했지만, 개신교회는 태생부터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예배에 방점을 두었다. 특별히 미사 때 철저히 ‘조용한 경건’을 강조했던 가톨릭과 달리(이제는 가톨릭 신학도 많이 달라졌다! 5백 년 전이 아니다), 루터의 경우엔 대/소교리문답서를 통해 언제나 자녀의 신앙교육을 강조했고, 실제로 이를 예배에 적용하고 실천했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설교대 앞 쪽에 앉히고(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 코랄이라는 회중 찬송을 통해 온 회중이 조화로운 화음으로 찬송하게 했다. 이는 종교개혁의 본거지 비텐베르크에 있는 시립교회 제단화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이가 우는 것, 소리 지르는 것, 뛰어다니는 것은 모두 자연스런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만들었고, 그 자연스런 모습 그대로 받으신다. 서로가 다르지만 다른 모습들은 틀린 모습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피아노 건반이 흰색과 검정으로 나뉘어 조화로운 선율을 자아내는 것과 같다. 서로가 이해하고 포용하면 서로의 다름은 아름다운 창조가 된다.

아이와 함께 하는 교회의 예배도 이와 같다. 아이는 배고프면 울고, 화나면 소리 지르고, 호기심이 나면 묻고, 신기한 게 있으면 달음박질해서라도 쫓아간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아주 자연스런 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질문해보자. 이런 자연스런 모습을 강제적으로 제지하는 것을 과연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모실을 두어 예배 공간에서 아이들을 분리시키는 것을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아니다.

우리 교회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예배교육이 없다. 어떤 교회처럼 아이들을 위한 영어예배나 특성화 교육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러나 우리 교회 아이들과 부모들, 그리고 다른 교인들은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 함께 예배하는 것을 아주 행복해 한다. 웃는 소리, 우리 소리, 떼쓰는 소리마저 행복해한다. 아이들은 가족과 함께 하는 공동예배를 통해 몸으로 자연스럽게 신앙의 교육받고 교회의 한 몸이 된다. 온 세대가 말씀과 성찬, 기도와 찬송, 감사에 함께 휘감겨 들어가는 곳이 복된 예배의 모습이고 교회가 해야 할 자녀교육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떠든다고 눈총을 주던 시절엔 모두가 불편했는데, 이젠 떠들던 아이들도 가족과 함께 참다운 교회 공동체에 녹아 들기 시작했다. 매주 나누는 성찬의 시간에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시간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판단해 본다. 물론 넉넉해진 교인들의 마음이 가장 큰 버팀목인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니 예배 중간에 제단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 거리며 올라오는 아이의 모습은 오히려 온 교인의 푸근한 미소거리가 된다.

어떤 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분: “목사님 지금 하고 있는 목회를 한 마디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나 : “글쎄요?”

어떤 분: “출산목회!”

그러고 보니 내가 목회한 이후로 결혼한 사람들이나 새롭게 등록한 신자들 중에 아이를 낳지 못한 분들이 ‘거의’ 없다. 마흔 넘어 결혼한 부부도 작년에 출산해서 유아세례를 주었고, 결혼할 때 아이 없이 살자고 약조한 채, 내가 부러울 정도로 행복하게 십 년 이상 살았던 부부도 작년에 아이 낳고 세례 받았다. 신혼부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정녕 하나님은 나에게 출산목회의 은사를 주셨는가?

어찌 되었건 아이는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복된 선물이고, 교회에서도 아이는 하나님의 복된 선물이며 우리의 미래다. 아! 이 내용으로 이번 주일 설교해도 되겠다. 어차피 어린이 주일이니까!

최주훈 목사 / 서울 중앙 루터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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