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놓아줘'
'엄마를 놓아줘'
  • 김기대
  • 승인 2015.05.06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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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희생의 존재로 묶어두려는 위선부터 회개하자

"어머니에게 언제가 제일 행복했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한참 생각하더니 ‘너희 낳아서 키울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말했다. 순간, 나는 어머니의 그 인생이라는 것에 절망하고 말았다. '고작 아이에게 행복을 걸다니. 그렇다면 나는 어머니에게 무덤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사랑에서,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무덤이 돼서는 안 된다." 일본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 <산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머니날이다. 이 날이 되면 우리는 어머니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평생을 희생해 오신 어머니에 대한 상념에 젖는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이들은 선물에 식사 대접을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둔 이들은 살아생전 보답하지 못한 그 사랑을 기억하며 잠시 침울해진다. 좀 더 예민한 이들은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목사들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에 눈물을 몰래 훔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날이 지나면 우리는 또 어머니를 잊는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이중성을 고발이라도 하듯, 작가 신경숙은 우리들에게 엄마를 부탁한다.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한국 문화의 해석이 신기한지 아니면 서구 독자를 겨냥한 한국 작가들의 귀신 열풍 때문인지 미국에서 번역된 <엄마를 부탁해>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조심스레 노벨 문학상의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때맞추어 어머니의 희생은 오간데 없고 어머니 마케팅만 넘쳐난다.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애틋한 기억 한두 가지 없고는 사회 저명인사 축에도 못 끼는 시대가 되었다.

   
▲ 2011년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가 신경숙의 소설<엄마를 부탁해>.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처럼 자식들은 모든 어머니들이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무덤과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엄연히 살아있는 인격체를 희생의 무덤으로 내몰고 나서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희생을 찬양한다.

물론 어머니들의 희생 자체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그 희생의 결과로 살아가는 자식들이 그 희생의 가치에 걸맞은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희생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다른 이의 희생 자체를 즐기는 엽기일 뿐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정말 기리고 싶다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가면서까지 키워진 우리가 오늘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특히 남성들)은 그 희생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받아들인다. 어머니의 희생을 감사하는 이들일수록 아내들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는다. 21세기라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가부장제 문화를 견뎌내는 여성들은 이처럼 어머니다움, 여성다움, 아내다움에 희생된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직 여성이 시어머니의 된장찌개 맛을 배워야만 칭찬받는 TV 드라마 같은 내용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반면 어머니의 희생을 칭송하면서, 아내에게 내 어머니를 닮기를 원하면서, 내 딸들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이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 딸들은 보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어 똑같은 길을 걸어갈 가능성이 크다. 특히 교민 사회처럼 가족적 응집력이 강한 문화에서 자녀들이 받는 문화적 영향력은 대단하다. 이 문화적 틀을 깨지 않는 이상 여성의 희생과 수동성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파악한 일부 젊은 여성들은 가족의 선택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한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희생에 의문이라도 제기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너도 나도 어머니를 기린다. 

이제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그만 칭송하자. 그 칭송에 숨어 있는 여성을 희생의 존재로만 묶어두려는 우리의 위선을 먼저 회개하자. 어머니를 어머니다움에서 풀어 주는 것이 진정한 효도다.

작가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에서 어머니도 개인의 삶이 있는 존재임을 밝힌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어머니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자식 때문에 희생되고 말았다. 아들과 딸과 남편의 다층적 진술 형식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어머니(또는 아내)에 대한 이들의 진술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런 다층적 진술 형식을 소설의 양식으로 택했는지 의아하다.

결국 신경숙 또한 어머니에 대한 전통적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어머니다움에 묶어두고 말았다. 그래서 작가 장정일은 신경숙의 소설을 가리켜 “귀신의 궁시렁”(소설 속에 어머니는 귀신의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이라고 폄하한다. 전통적인 어머니관에 대한 재해석도 없고 다층적 시각의 긴장감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에 실망한 내 입장에서 장정일의 평은 혹시 명작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라고 고민하던 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이번 어머니날에는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신파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내가 오늘 어머니다움이라는 잣대로 세상의 여성들을 대접하고 있지 않은지 회개부터 먼저 할 것이다. 그리고 신경숙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볼 것이다. '엄마를 놓아줘.'

김기대 / LA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2011년 <미주 뉴스앤조이>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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